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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론리하트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미국인 너새네이얼 웨스트Nathanael West(1903-1940)가 지어 1932년 발표했고,
이종인이 한국어로 옮겨 마음산책에서 2002년 10월 초 출간했습니다.
원제는 Miss Lonelyhearts. 156쪽.
선뜻 이 책을 산 건 제목에 끌려서입니다. 비틀즈의 음반 중에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라는 것도 있고,
예전에 읽은 만화 중 론리하트라는 탐정이 나오는 것도 있었어요.
그래서 미스 론리하트는 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지요.
절반쯤 읽을 때까지 도대체 언제 재미있어지나 생각했어요.
1996년엔가 <네이키드>라는 영국 영화(그런데 이 영화로 마이크 리Mike Leigh란 감독이 1993년 칸에서 감독상을 탔다는군요.)를 비디오로 보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자신이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의 거대한 문제 앞에서 무능한 자신과 이웃을 괴롭히는
위악적인 이야기에는 진저리를 쳤거든요.
그런데 중간쯤 미스 론리하트(이 사람은 남자입니다. 미스 론리하트는 기자인 주인공이 고민 상담 칼럼에다 쓰는 필명이지요)가 베티에게 이끌려 숲 속 연못가의 오두막에 가서 휴가를 보내는 대목(자연에서 재생을 경험하다? 사실 론리하트보다 독자인 제가 이 부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신 듯했어요. 위악의 어둡고 퀘퀘한 공기에서 벗어나)부터 슬슬 재미있어져서는, 몇 굽이를 휘돌더니 순식간에 끝나버립니다.
사실 뭔가 깨닫자마자 파국을 맞는 이야기는 그동안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봤지요. 하지만 <미스 론리하트>가 1932년 작품인 걸 감안하면 바로 이 작품이 원조일 수도 있겠네요. 비틀즈의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도 1967년에 나왔으니 "론리하트"라는 이름을 이 작품에서 끌어다 썼는지도 모를 일이죠.
읽고서 생각했습니다.
첫째, 미스 론리하트는 왜 깨닫자마자 파국을 맞을까요? 깨달음 뒤에 살아남는다면, 이 시대의 성자 아니면 미치광이가 될 뿐이라서, 더 이야기할 것도 없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한 개인의 깨달음은 수많은 다른 개인들의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가 빚어내는 부조화와 오해의 사슬 가운데 무력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결국 살아남을 수가 없는 걸까요?
둘째, 미스 론리하트를 수렁에 빠뜨린 건 많은 상심녀, 절망녀, 환멸녀 등등의 고민 상담 편지입니다. 이 편지들을 읽고, 미스 론리하트는 뭔가 조언을 해주는 칼럼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고민 상담란은 신문의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한 방편일 뿐이고, 다른 사람보다 특별할 것도 없는 기자가 그 많은 고민을 위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리스도의 사랑 운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것 어쩌구..." 정도입니다. 편지를 보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는 현실이고, 그들이 짊어지는 무게는 너무도 엄청난데, 책상 위에서 탁탁탁, 뜬구름 잡는 소리나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스 론리하트는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소설의 끝 무렵, 미스 론리하트가 어떤 힘을 얻게 되는 건 한 남자의 고민 상담 편지 때문입니다. 이 남자는 미스 론리하트가 뭔가를 깨닫게도 하고, 그를 파국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왜 문제의 출발점은 여자들의 편지이고, 해결 아니면 종말은 남자의 편지일까요? 옮긴이가 쓴 해설에 보면 그걸 동성애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도 같고...
그리고 사소한 의문이 두 가지 생겨 출판사의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
수고 많으십니다.
<미스 론리하트>를 이제 막 다 읽었습니다.
역시 미국 남성이 쓴 현대문학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군요. ^^;
아무튼 모르던 작가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 읽고 두 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바쁘시겠지만, 답해주시면 좋겠어요.
첫째, 108쪽 밑에서 다섯째 줄에
"절름발이는... 세 번째로 악수를 청해왔다"고 되어 있는데요,
이 부분, 곧 "미스 론리하트와 절름발이"란 장에서 이 부분은
도일이 미스 론리하트와 두 번째로 악수하는 것이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 악수하고, 이번에 두 번째예요.
그런데 왜 세 번째로 청해왔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번역 과정에서 중간에 악수 한 번 더 있는 부분이 빠진 것인지,
아니면 두 번째를 세 번째로 쓴 것인지요?
(참고로 저는 2002년 10월에 나온 1판 1쇄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 중에서 베티는 그냥 "베티"라고만 계속 나왔는데,
뒤편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베티 더 붓다"라고 썼더군요.
원서에는 베티 더 붓다로 되어 있는데 번역 과정에서 그냥 베티로 옮긴 건가요?
"베티 더 붓다"라는 표현은 베티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열쇠인 듯한데...
어느 부분에서 베티 더 붓다라는 표현이 나오는지,
아니면 작품 전체에서 베티 더 붓다라고 했는지 아는 게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고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걸 알려주세요.
***
그랬더니 출판사에서 이런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
<미스 론리하트>는 매혹적이면서도 모호한,
독특한 소설입니다.
<위대한 개츠비><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와 더불어
20세기 미국문학의 3대 봉우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니 대단한 일이죠...
지적하신 108쪽의 '세 번째' 악수는
그 상황에서 연속된 악수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전의 한 차례 악수와는 상관없이 절름발이는 연이어 악수를 청해온 것이죠.
"절름발이는 영광으로 느꼈는지 세 번째로 악수를 청해왔다.
그가 할 수 있는 사교적 동작이라고는 악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라는
문장에서 그 상황이 감지됩니다.
그리고 '베티 더 붓다'는
본문 36쪽에 이미 설명되어 있습니다.
"베티는 갑자기 붓다(부처)가 되었군." 그가 말했다. "베티 더 붓다. 미소는 정말
부천데. 이제 배만 좀 더 나오면 영락없는 부처야"
<미스 론리하트>를 읽는 독자를 만나니 기분이 업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렇군요. 36쪽의 그 부분은 무심코 읽고 지나가서 까먹고 있었어요.
사실 제가 베티란 인물에 주목하기 시작한 건 한참 뒷부분이거든요.
숲 속 오두막집에 찾아가는 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