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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세상을 향해 뛰어
도나 윌리엄스 지음, 차영아 옮김, 이나미 감수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자폐아 소녀가 스스로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을 찾은 이야기, 그 실제 주인공이 쓴 이야기다. 자신의 벽에 갇힌 사람, 자폐증 어린이를 이해하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다 읽은 지금도 정말 이 사람을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사람의 내면에 있었던 벽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내 안에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나는 사물과 물질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본다. 사물이 그리는 반복 무늬의 세계를 좋아한다. 나는 글을 읽을 때, 한 문장 전체를 한꺼번에 읽어내지 못하고, 마치 이제 한글을 깨치는 어린이처럼 한 글자 한 글자씩 눈으로 짚어가면서 읽는다. 내가 책 읽는 속도가 느린 것도 그 때문이다. 요즘은 책 읽는 속도를 올릴 욕심에 빠르게 훑어 읽는 법을 연습해서 좀 나아졌지만, 전에는 한 글자씩 읽을 뿐만 아니라 마치 내가 그 글자를 따라 쓰듯이 글자의 획까지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 그렸다. 벽지 무늬의 세계에 빠져 살았던 도나와 글자 획에 매여 살았던 나.
도나의 문제는 뭐냐면, 다른 사람의 행동에 ‘남들처럼’ 자연스럽게 반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들의 이른바 ‘정상적인’ 반응이 왜 정상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누군가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면, 그러니까 저 사람이 무엇을 바라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했으니 저 사람을 만족시키려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게 좋다고 가르쳐주었다면, 도나도 이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들’은 그렇게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행동 패턴을 받아들인다. 도나가 세상을 두려워했던 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의식을 작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역시 ‘정상적인 반응’을 저절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원리와 근거를 누군가에게 듣거나 나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여동생 친구가 놀러 왔는데, 여동생과 그 친구가 놀던 방에 옷장이 있어 양말인지 속옷인지를 찾으러 들어갔더니 여동생이 어서 나가라고 소리쳤던가 했다. 나는 얼버무리며 볼일을 보고 나왔던 것 같다. 내가 나가는데 여동생 친구가 그랬다. “니네 언니 공부는 잘하는데 좀 모자라다며?” 내가 뭘 어쨌기에 ‘모자라다’는 소리를 들었을까?
도나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자신의 자아는 ‘아무도 없는’ 유리벽 너머에 숨겨두고 어린 시절 친구였던 캐롤처럼 행동하며 스스로 캐롤이 된다. 캐롤이 된 도나는 활발하고 재치 있게 말하며 행동하지만, 그것은 도나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자동조종장치에 따라 로봇처럼 배우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마치 내 몸 밖에서 내가 하는 짓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는 프로그램 된 대로 말하고 웃고 움직이고, 내 자아는 공중에 떠서 그런 나를 무심히 보는 것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일 때문에 의무적으로 만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곧잘 그런다. 내 안의 이런 점을 찾아낸 것만으로, 도나를 조금은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도나는 성장기에 도나의 눈높이, 도나의 발걸음에 맞춰서 서서히 벽 너머로 이끌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학대를 겪어야 했고, 집을 나와서는 동거남들에게 폭행과 착취를 당했다. (세상엔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행히 도나는 한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고, 또 여행길에 자신과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을 만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역시 여행길에 캐롤이 된 도나의 연기를 꿰뚫어보고 자신을 찾도록 격려해준 독일인을 만나면서, 그러나 스스로의 고통은 고스란히 혼자 견뎌내면서, 마침내 유리벽 너머 세상으로 나온다. 가족의 도움 없이 이 모든 일을 해냈다니, 참으로 장하다. 앞으로 도나를 통해 사람들이 더 잘 소통할 수 있게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