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백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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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애거서 크리스티보다 앞선 추리소설의 고전이라는 말에 5권짜리 브라운 신부 전집을 냉큼 사놓고는 이제야 첫 권 [결백]을 읽었다. [결백]에는 단편소설 12편이 들어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거서 크리스티만 한 추리소설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바꿨다. 포와로와 미스 마플의 통찰력은 사실 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세계에서만 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는 ‘실제 세계’를 꿰뚫어보는 것 같다.(보르헤스가 “에드거 앨런 포보다 더 훌륭한 추리소설”이라 했다고 광고하는데, 사실 에드거 앨런 포의 추리소설은, 내가 그의 소설을 미처 이해하지 못할 나이―10대 후반―에 읽은 탓인지 몰라도, ‘추리’만 있지 ‘소설’은 없다는 인상이 강하다.)

세 번째 단편인 <이상한 발걸음 소리>에서 다음 구절을 읽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옛날 정통 귀족 계급의 사람들은 하인들에게 빈 병에서부터 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집어던졌었다. 또 정통 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건 종업원들에게 마치 동료처럼 쾌활하게 말을 건네곤 했었다. 하지만, 소위 현대 재벌이라 칭하는 금권 정치가들은 그게 하인이건 친구이건 간에 가난한 자들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고, 종업원들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고 귀찮아했다. 그들은 잔인해지기를 원치 않았지만,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야 할까봐 심기가 상했다. (117쪽)

스스로 ‘나쁜 사람’ ‘잔인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나쁘고 잔인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뭔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은 피하려고 하는 것, 나만의 못된 심성일까? (재벌도 아닌 주제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까봐 두려워, 성가신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브라운 신부가 범죄자를 대하는 방식이다. 브라운 신부는 범죄자를 단죄하지 않고 설득한다. “인간은 선한 일에 있어서는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네만, 나쁜 일에는 그 수준을 유지할 수가 없다네.”(164쪽)라면서, “범죄에서 진정한 문제가 되는 것은 점점 더 거칠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비열해진다는 것일세.”(436쪽)라고 말한다.

브라운 신부 전집 4 [비밀]에서 <브라운 신부의 비밀> 편에는 이러한 글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선한 사람이 됩니다. 범죄자들을 마치 외딴 숲속에서 지내는 유인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들을 이야깃거리로 삼을 권리가 얼마나 있는지 깨닫게 될 때까지는, 그들이 불완전한 두개골을 가진 하등 동물이라고 떠들어대는 자기기만을 그치게 될 때까지는, 아직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아직 범죄를 저지를 만한 기회와 상황을 만나지 않은 덕분에 범법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범죄자들을 마음 놓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여덟 번째 단편인 <사라딘 공작의 죄악>은 묘하게도 그 도입부와 배경 설정이, 케네스 그레이엄의 동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서 물쥐와 두더지가 수달의 어린 아들을 찾아 새벽 강을 따라가는 장면과 비슷하다. 다만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서는 물쥐와 두더지가 아름다운 요정을 만나게 되지만, <사라딘 공작의 죄악>에서 브라운 신부와 플랑보는 비열한 악한을 만나게 되는 점이 다르다. 같은 이야기의 천사판과 악마판이랄까. ㅎㅎ

다만 동양과 인도에 대한 편견은 역시나 강하게 느껴진다. 독자들(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영국인)의 편견을 이용해 이야기의 함정으로 삼은 경우가 많긴 하지만, 100년 전 서구 지식인들의 오만은 어쩔 수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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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26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가 다 나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다른 작품 좀 냈음 하는 마음입니다.

숨은아이 2006-02-2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야금야금 읽을 거여요. ^^

야클 2006-02-2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진짜 대단한 추리소설들 많더라구요. 특히, 일본추리소설들. 역시 많이 두루두루 읽을 필요가 있더군요. ^^

숨은아이 2006-02-27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일본 추리소설에도 멋진 작품이 많은가요. 사실 애거서 크리스티랑 브라운 신부는 개개 작품보다 작가 나름의 고유한 세계랄까, 아우라랄까 하는 걸 좋아한답니다. 이 책은 문장도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