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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995년에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 신문에서 이 책에 관해 짤막하게 소개한 걸 보고 호기심이 당겼지만, 미처 책을 사지도 읽지도 못하는 사이에 잊고 말았다. 그러다 10년 만에 다른 제목으로 탈바꿈한 책을 만난 걸 보니, 책도 윤회하는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든다.
읽기 전에, 연애의 전 과정을 예리하고 발랄하면서도 철학적으로 이르집은 책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과연 그러했다. 다만 생각보다 신랄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냥 즐겁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지 않나 한다. 해답이 없는 부분은 가볍게 넘어가고(이를테면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적 순간”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럼에도 곧 후회하고 화해하는 이유는 파고들지 않았다.), 이기적인 욕망은 가볍게 긍정하며, 권태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즐겁고 유쾌하고, 그걸로 끝나나 했는데, 섬광처럼 빛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165쪽에서 176쪽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정체성이 관계에 따라 변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대목이다. 이 책에선 “사랑”만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반드시 애인 사이일 필요는 없다. 애인이나 부부가 아니라면 그 친밀성이나 독점욕은 덜하겠지만, 서로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건 마찬가지다. 클로이는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사막으로 떠났다. 사막에는 클로이라는 사람을 비춰주는 거울(곧 한 사람의 행동이나 태도를 비춰주는 다른 사람의 반응)이 없었고, 거울이 없으니 “상상력은 우리의 얼굴에 베인 상처나 점을 자기 마음대로 꾸며내게 된다.” “그러자 그녀의 상상력이 그녀를 장악하여, 그녀를 괴물 같은 존재로 부풀려버렸다.”
우리는 스스로를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나 자신을 온전히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사람이 된다. 직장에서 궁합이 맞지 않는 상사와 함께 있을 때의 나, 그리고 자유 시간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 있는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똑같은 일을 보고 전혀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싫어하는 상사가 열심히 일하는 내 자리 바로 앞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하면 내 일을 방해하는 무례한 행동이라 생각하고 성질을 내지만, 좋아하는 친구가 거리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나는 때로 신경질적이고 편협한 사람이 되었다가, 순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곤 한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진심이기 때문에, 그걸 내숭이나 위선이라고 한다면 마음이 괴로울 것이다.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딱 이거다. 그렇다고 난 왜 나를 모를까 뒹굴지 말고,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 이러이러한 사람이야, 하고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나름대로 귀여운 생물이라는 걸 받아들임이 어떨까.
(참, 그 "마르크스주의적인 사랑"에 왜 "마르크스주의"란 꼬리표를 붙였는지 잘 이해 안 된다. 그리고 아마 원서엔 romantic이라고 되어 있었을 부분을 다 "낭만적"이라고 옮긴 것도 좀... 이때의 romantic은 romance에 대한, 곧 연애에 관한 것일 텐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원제 Essays in Love (1993)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지은이), 정영목 (옮긴이) | 청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