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가 귀찮고, 일없이 빈둥거리고 싶을 땐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이 제일이다. 그래서 해문의 문고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5권 [삼나무 관]을 집어들었다. 이 책을 다 읽고는 잇따라 26권 [구름 속의 죽음]도 읽어버렸다. 둘 다 예전에 읽었던 것이 틀림없다.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구름 속의 죽음]은, 오래 전 읽었던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집에 책이 없다. 누군가에게 빌려줬나? 이사하면서 빠뜨렸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전에 다시 샀다.

역시 번역은 가끔 웃긴다.

포와로는 그녀를 주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예, 그리고 당신들은 모두 함께 그 집으로 올라갔죠?”
“예. 우리는 ― 응접실에서 그 샌드위치를 먹었어요.”
포와로는 한결같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예, 예 ― 여전히 그 꿈속에서...... 그리고 난 다음.......”
“그리고 난 다음?”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저는 그녀를 두고 나왔어요 ― 창문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전 식기실로 갔죠. 당신 말씀대로 여전히 꿈속에서였어요......”
- [삼나무 관] 262쪽.

“꿈속에서”라니? 지금 이 여자는 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왜 갑자기 “꿈속에서”라는 표현이 등장할까? “멍한 상태”나 “꿈처럼 몽롱한 정신으로”라는 뜻 아닐까? 대충 뜻을 짐작할 수 있으니까 봐준다.
 
이번엔 유난히 인종 차별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 "유대인 같은 코를 가진 남자"([삼나무 관])라느니(유대인 같은 코란 어떤 코일까? 아무튼 좋은 느낌으로 쓴 말은 분명 아니다.), 아주 멀쩡한 선남선녀가 서로 호감을 느끼며 공통점을 꼽는 부분에서 “그들은 개를 좋아했고 고양이를 싫어했다. ... 두 사람은 큰 소리로 떠드는 것과 시끄러운 레스토랑, 그리고 흑인을 싫어했다.”([구름 속의 죽음])는 말이 버젓이 등장한다. 1930년대 평범한 영국인의 상식이 이 정도라는 거겠지. [구름 속의 죽음]이란 소설 자체는 걸작인데, 조금 언짢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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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6-11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추리소설에 보면 인종 차별적 표현 많지요. 대중적인 장르이다보니 당시 상식에 비추어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나본데,가끔은 정말 거슬릴때도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 시리즈도 좀 그렇구요. -_-a

숨은아이 2005-06-1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군요. -_-

아영엄마 2005-06-1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장이 너무 많다>던가 하는 추리소설을 보면 흑인을 노골적으로 비하해서 대하는 모습들이 나와요. 백인이 여전히 흑인을 노예로 생각하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겠죠. 저도 가끔 해문판 소설 꺼내서 봅니다. 전 권을 다 사지 못해서 좀 아쉽지만..

물만두 2005-06-11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고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을 다 보면 처음에는 재미있다가 나중에는 씁쓸해지죠. 오만한 영국인들... 그리스인을 비하한 <말없는 목격자>도 있어요. 제목이 맞나??? 그리고 코넌 도일 작품도 그렇고요. 다 그렇다는 생각이 드네요. 안 그런 척 하는 책도 있는데 그게 더 기분 나쁘죠.

숨은아이 2005-06-1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해문 전집이 곶감 빼먹듯 한 권씩 꺼내 읽기 좋죠. ^^ 저도 아직 전권은... 올해는 꼭 채우리라!
만두님/그렇군요. 애거서 크리스티는 차라리, 영국인들 중에는 외국인혐오증이 많다는 걸 드러내고 얘기하니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씀대로 안 그런 척하는 게 더 나쁘잖아요.

panda78 2005-06-1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어게인에 깨끗한 해문책 많이 나왔던데.. ^^
그러고 보면 이집트인 무시하는 것도 장난아니죠.. ;;

숨은아이 2005-06-12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그렇군요. 전 되도록 알라딘에 몰아 쓰느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