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지식총서 004권으로 2003년 6월 나온 책입니다. 미국에 노예가 처음 들어오기 시작한 때부터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노예제를 중심으로 사회 변화 상황을 간략히 훑고, 똑같이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은 노예제 폐지론과 노예제 찬성론의 대립을 소개했습니다.
100쪽도 안 되는 책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책으로서 한 권의 생명을 타고났다면 그 한 권으로 완결되는 어떤 것이 있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책은, 노예제 폐지론과 찬성론의 요지는 명확하게 전달했지만, 전체 분량의 절반을 바친, 노예제를 중심으로 미국 초기 역사를 개관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충’ 넘어갔습니다. ‘1850년의 타협’이니 ‘유혈의 캔사스 사태’니 하는 걸로 당시 미국 정황은 숨 가쁘게 요동친 모양인데, 도대체 1850년의 타협 내용이 무엇이고 유혈의 캔사스 사태는 어찌 된 건지 설명이 없습니다.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려면 한 가지만 이야기해라” 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것저것 건드리다 마는 책은 실망스럽습니다.
그래도 이 책의 주제만큼은 칭찬하고 싶습니다. 노예제와 기독교와 미국 역사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짐작대로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신약성서를 주요 근거로 삼고, 찬성론자들은 구약성서를 근거로 삼더군요.
폐지론자들은, 인류는 모두 아담의 자손으로 형제이니 형제를 노예로 삼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마태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자유민인 백인처럼 흑인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남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고 나온 데 따라서, 노예사냥을 범죄시합니다.
반면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아브라함도 노예를 거느렸으니 하느님은 노예제도를 용인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레위기에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우거하는 자같이 너와 함께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하고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돌아오는 해인 희년에 그 종을 해방하라고 했는데, 이방인에 대해서는 “너의 종은 남녀를 무론하고 너의 사면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도 살 것이며”라고 한 데다 희년에 풀어주라는 말도 없으니, 이교도인 흑인은 대대손손 노예로 삼아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노예로 데려온 덕에 이들이 기독교를 믿고 구원받게 되었으니 도리어 노예주들은 선을 베풀었다고도 합니다. 흑인이 기독교를 믿고 형제가 되었으면 이제 이교도가 아니게 되었으니 마땅히 자유롭게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그리고 구약의 하느님은 유목민인 유대민족의 신이니, 이방인의 인권까지 보호하지 않은 게 당연하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닌 것을!
그리고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는 신약성서 베드로전서의 구절과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는 디모데전서의 구절도 근거로 삼았다 합니다. 그런데 이건, 종들에게 현실 생활에 잘 적응하라고 한 말이잖아요! 노예 신분인 이들에게 자기 할 일을 충실히 잘 하라고 한 말이지, 노예를 부리는 자들에게 노예를 부려도 좋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에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한 말씀은, 뺨 맞는 사람에게 원수도 사랑하라고 한 말이지, 뺨을 때린 자에게 맘대로 상대편의 뺨을 때려도 좋다고 허락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쪽이 무조건 선하고, 찬성한 쪽이 무조건 악하지는 않겠지요. 백인 폐지론자들은 산업 발전에 노예제가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폐지를 주장한 측면도 있고, 또 맘 좋은 주인을 만날 경우 북부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보다 더 편하고 자유롭게 노예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링컨도 미국의 여러 주가 연방으로 통일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노예제를 폐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선악이 아니라,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중일진대...
흠 하나. 68쪽에 나오는 “아프리카 리베리아”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