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우선, 책 너무 무겁습니다. 내용이 무겁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들고 다니기 무겁습니다. 책 크기도 B5 용지보다 커서는...(가로 길이는 조금 좁지만). 만화의 때깔을 좋게 하고, 앞면의 그림이 뒷면에 비치지 않도록 스노화이트지를 쓴 모양입니다. 하지만 스노화이트지는 종이 두께에 비해 무거워요! 모조지 종류로 했다면 훨씬 두꺼운 종이를 써야 했겠지만(얇은 종이를 쓰면 그림이 뒷면에 비치니까요. 그럼 뒷면의 그림을 보는 데 방해가 되지요), 도리어 무게는 이보다 덜 나갔을 거예요.

그리고 말이 많습니다. 무슨 만화에 이리도 글자가 많단 말입니까! 조 사커의 수다를 읽으며, 저는 그와 함께 지쳐갑니다.

... (또 흠잡을 거 없나...)

아, 이 사람 삐딱한 거 맘에 안 듭니다. 시종 냉소적인 익살로 자료 채집 중인 미국인 시사만화가라는 자신의 정체를 잃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게 다 '소재'일 뿐입니다. 종반에 들어서기 전까지, 참혹한 인권 유린의 현장을 고발하는 사진기자들의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신 조선인님 글(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540982)이 내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심지어 그런 자신의 태도까지 비웃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기꺼이 보여주는 사람들, 기형아로 태어난 자기 아이, 폐허가 된 집을 사진으로 찍어 가주길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세계를 향해 절규하고 싶은데 자신은 그럴 힘이 없으므로 누군가 대신 말해주기를, 알려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24년 전 광주 사람들이 서방의 기자들을 그런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 책이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뭘로 알고 있었을까? 철학이 있고 조직력도 있고, 상황을 지켜보며 자위 수단을 강구하고, 경제를 일구기 위해 창의적인 발상을 짜낼 줄 아는 그들을, 그저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무력하게 떨고만 있는 존재로 여겼던가?

열악한 생존 조건 속에 그들을 던져넣어 자기 존재에 대한 존중심마저 빼앗으려는 안사르 Ⅲ 감옥에서, 그들은 보여줍니다. 250명이 쓸 화장실을 달랑 세 칸만 주었더니, 이들은 화장실 앞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드잡이하는 대신 한 줄 서기라는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한 조건(수감자 네 명당 밥그릇이 한 개였다니, 부족하다는 말이 오히려 부족하군요!)에서 이들은 나눠 마실 차의 양과 순서를 정해 모두 골고루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합니다. 이들은 각 구획끼리 고립되지 않고, 감시의 눈길을 피해 쪽지를 돌멩이에 매달아 던지는 방법으로 소통합니다. 이들은 교육위원회까지 조직해, 생태학, 철학, 아인슈타인, 소련 붕괴 등에 대해 서로 가르치고 배웁니다. 80년 광주에서 구현되었다는 코뮌이 생각나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로 의사소통을 했다는 장기수 할아버지들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아, 물론, 그들도 바깥에서는 당파끼리 싸우다 서로 죽이기도 하고, 여성의 인권을 이야기하면 입을 막아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미떼 같은 군중이 아님을, 핍박에 즉자적으로 반발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님을 이 책은 알려주었습니다. 그 하나만으로 이 책은 제게, 둘도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만화의 그림체는, 미국 냄새가 강해서는 첨엔 영 정이 안 가더니, 한 권을 다 보고 나니 익숙해집디다. 어린아이보다 통통한 아저씨나 앞니 빠진 할아버지 표정이 더 귀엽더군요. 하...)

한 가지 더. 군인들이 잔인하게 구는 것은 두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살인 훈련을 받은 이들은 겁에 질릴 때, 방어의 최고봉 - 인정사정없는 공격 - 을 휘두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를 "벌레 같은 놈"으로 깎아내리지요. 그래서 제대 후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이스라엘 군인도 생기는 거겠지요. 참으로 파괴적인 짓입니다.

조 사코Joe Sacco가 1991년 말에서 1992년 초를 팔레스타인에서 보내고 나서 발표한 이들 만화 아홉 편은  2002년 이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도 2002년에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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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10-0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무척 솔직하게 삐딱하게(!) 쓰신 리뷰 마음에 듭니다. 저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며 광주가 생각났어요. 외신에 드러나면 뭐하나 달라지지 않는 이노무 현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만 밝혀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다른 무엇무엇도 거듭 겹쳐 보이더군요...

숨은아이 2004-10-0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 시종 거리를 두는 듯한 시각이 못마땅했답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선동보다 도리어 이것이 더 설득력 있겠지요...
이안님 : 감사! 그런데 써놓고 보니 "개미떼 같은 군중"이라는 말은 개미에 대한 모욕 같군요. (^^)a

로드무비 2004-10-06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이 이 리뷰로 5만원 버셨잖아요.^^
숨은아이님 리뷰는 또 다른 관점에서 재밌게 읽히네요.
저도 추천!

숨은아이 2004-10-06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이안님이 이벤트 하셨잖아요. 그 이벤트에 당첨돼서, 바로 이안님께서 이 책을 보내주셨답니다. ^________^ 추천 감사!

숨은아이 2004-10-1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하긴요. 제 옆지기는 늘 왜 일케 못됐느냐는데요. --;

내가없는 이 안 2004-10-1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축하드려요. 이 주의 마이리뷰 당선작이에요! 와아~
그럴 줄 알았다니깐요. ^^

숨은아이 2004-10-1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런 일이... 님들 덕분이어요. 이안님 리뷰 읽고 이 책 볼 생각 굳혔고, 게다가 이안님께서 이 책을 보내주셨고, 따우님 말에 좀더 엄격하게 보려고 노력했어요. 추천해주신 로드무비님, 제일 먼저 댓글 달아주신 새벽별님, 모두 고맙습니다!

깍두기 2004-10-1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물만두 2004-10-1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알았어요. 축하드려요^^

숨은아이 2004-10-1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쑥스럽사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