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오래 전에 절판되었기 때문에,

마이리뷰에 쓸 수가 없군요. 상품 검색이 안 되니.

그래서 마이페이퍼에 올립니다.

***

2003. 5. 1

 

네스또 파즈의 일지 <동지를 위하여>, 형성사, 1983


"볼리비아 한 젊은이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형성사에서 1983년 3월에 펴낸 책입니다.
1983년이라. 제가 몸담았던 대학의 여성주의 교지도 그 해에 창간호가
나왔고, 그래서 며칠 뒤면 20주년 기념 모임을 연다더군요.
115쪽짜리 작은 책-B6 판형, 예전의 시집 크기입니다.
책값은 1500원이네요.

제가 이 책을 손에 넣은 것은 1998년 12월 마지막날.
대학로에 있는 대현서점의 점포 정리 50% 할인 판매 때입니다.
창고 어디쯤에 오래 처박혀 있었겠지요.
흰색 표지에 묻은, 지워지지도 않을 거무튀튀한 때와
누렇게 바랜 내지(아마 이런 종이를 서적지라고 할 텐데)가
이 책의 나이를 말해 줍니다.

헌책방이나 재고 서적 정리 행사 중에 남아메리카의 혁명운동에 관계된
책을 만나는 경우가 곧잘 있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그만큼 가깝고도 간절하게 읽혔을 역사.
현재 진행중이었을 혁명.
재작년쯤 전세계적으로 체게바라 선풍이 분 것도
30-40대들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혁명 영웅을 그리워했기 때문일 거예요.

요새 대학생들은 교재나 실용 지침서,
리포트 내기 위해 읽는 책말고
어떤 책을 읽나요?

철학이나 전공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그리고 교양을 높이기 위해 읽는 책말고는 또
어떤 책을 읽나요?

제가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나
<피어라 들꽃>, <전태일 평전> 같은 책을 읽었죠.

이 책, <동지를 위하여>는 저보다 10년쯤 일찍
세상에 태어난 분들이 읽었을 것입니다.
그다지 깊고 너르게 책을 읽지 못한 저는 잘 모르는 세계입니다.
제가 남미에 관해 아는 건 영화 <미션> 정도?
그것도 고등학교 다닐 적에 봤기에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 책, 사랑하는 아내에게 썼다 해서 무조건 "...하오, 했소"로 끝나는
무미건조한 번역, 가끔 문장의 의미가 이해 안 되는 직역으로
독서를 불편하게 하지만,
1945년생으로 70년에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수회 수사였던 번역자(김명식)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옮겼을지
생각하며 읽을 만합니다.

이 책은 바로 1945년 볼리비아에서 태어나,
1970년 볼리비아 민족해방군의 일원으로 게릴라 투쟁을 하다가
고립되어 굶어 죽은 가톨릭 신학도, 네스또 파즈Nestor Paz,
일명 프란치스꼬의 일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내 쎄실리아 아빌라Cecilia Avila, 일명 쎄시Cecy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는데, 두 사람은 1968년 4월 14일 결혼했고,
함께 볼리비아 군부 정권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조직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1970년 7월 17일 프란치스꼬는 게릴라 부대에 참여하고,
쎄시는 가족과 함께 지원 활동을 벌입니다.
프란치스꼬는 그 해 10월 8일(체게바라가 죽은 지 꼭 3년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사망했고, 쎄시는 네스또가 죽은 지 2년이 채 안 되는
1972년 3월 23일 볼리비아 민족해방군의 집회에서
정부군의 포격을 받아 사망합니다.

1970년 8월 1일의 일지에는,
처음 두 번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고 이 사람이 느꼈을 '충격과 공포'를
전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나의 전반적인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했소. 아마 그것은 폭력,
임무 수행, 투쟁의 의미, 희생의 가치, 우리 부대의 효율성 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근저에 맴돌고 있는 당신의 부재에 관계된
것일 거요. 그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비통에 잠기게 되오.
그렇지만 나는 성장했소. '옛 사람'의 모델을 버리고
그것을 '새로운 인간'의 모델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소.
모든 성장은 고통을 의미하오."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것과 실제 전투 상황에서 피를 튀기는 것,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은 천양지차일 거예요.
저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 길에 나섰다는 이 사람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요.

하지만 이 사람은 이렇게 다짐하지요.
"우리는 역사와 진리의 한가운데에 있소.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내보이시고 있소. 아니 그렇다기보다 현실이 우리에게
주고 우리 스스로 직조한 실로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짜고 있소."(8월 6일)

8월 6일자 일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양말과 옷을 말리면서 아침 식사를 짓는 석탄불 옆에 앉아 있소.
어제 나는 18일 만에 처음으로 목욕을 하고, 몸에 소독약을 뿌리고,
양말을 갈아신고, 할 수 있는 빨래를 했소.
이 모든 일들을 하면서 나는 당신의 매우 섬세한 충고를 기억했소."

자, 남반부의 볼리비아에서 7, 8월이면 한겨울이지요.
한겨울 안데스 산맥의 산악 지대에서 70여 명 되는 사람들이
마을을 피해 훈련과 행군을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일상의 모든 것,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10월 2일, 결국 패배한 후 해산을 결정하지요.
그날 프란치스꼬가 쓴 마지막 일지에는
"이제 쓰기가 어렵소. 내 자신을 표현하기조차 힘드오.
가족들,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고 있소.
이제 곧 그들을 껴안게 될 거요.
무엇보다도 처음 며칠 동안은 먹고 먹고 또 먹고만 싶소."
라고 쓰여 있습니다.

싸우다 죽고 싶었던 그들,
그러나 결국 고립되어 영양 실조로 사망한 그들.
그들에게는 그게 가장 괴로운 일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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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5-24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04-05-24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4-05-2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께서 계속 들러주시는군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09-23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책이군요. 책값 천오백원이 무색한... ^^ 80년대에 출간됐던 책이 2000년대 재출간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려고 할까요...

숨은아이 2004-09-2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글인데 새로 봐주시니 쑥스럽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