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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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 문장인데다 원문도 쉬운 내용이 아니라서 서너 번 반복해서 읽어야 소화되는 책이지만 한 번만 읽고도 100자평을 쓴다. 보잘 것 없는 평이지만 이걸 보고 한 명이라도 더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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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인류 역사 대부분을 지배한 원칙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다.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소련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협박은 인간을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뿐 아니라 아예 달리 행동하고픈 유혹에 빠지지도 않게끔 생각하고 느끼도록 강요한다.

경제적 과잉 시대에 가능해진 기본 소득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을 굶어 죽을 위험에서 자유롭게 하고, 경제적 위험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키고 독립시킬 수 있다. 그 누구도 굶어 죽는 게 겁나 특정 노동조건을 수락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재능이 뛰어나거나 야망이 넘치는 남녀는 다른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 재교육을 받을 수 있다. 아내가 남편을, 자식이 가족을 떠날 수도 있다. 배를 곯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으면 인간은 더 이상 불안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물론 이 말은 정치적 협박이 자유로운 사상과 연설, 행동을 방해하지 않을 때만 들어맞는다).

인간이 일하고 노력하는 것이 물질적인 자극 때문만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두 번째 논리는 인간은 활동하지 않으면 괴롭고 인간의 본성이 게으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기본 소득의 남용은 아마 얼마 안 가 다시 사라질 것이다. 단것을 공짜로 주면 몇 주 후 아무도 단것을 과식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기본 소득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최대 소비에서 최적 소비로 방향을 바꾸어야 하며 개인의 욕구에서 공공 욕구에 맞춘 생산으로 극적 전환을 꾀해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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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음악을 듣는 일, 하루 분량의 음악은 영혼을 지탱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

‘하루 분량의 음악’이 ‘미덕’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런 단어들이 연상시키는 의무감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한편으로는 클래식 음악이 주류 문화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거나 우리를 더 지적이고 더 세련되고 더 교양 있게 만들어준다는 이유로 클래식 음악을 ‘들어야 한다’라는 희미한 문화적 각성이 존재하는 시대다. 딱히 도움이 되는 생각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 다른 종류의 음악보다 ‘우월하다(아주 잘못된 생각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클래식 음악은 특정 배경, 특정 교육 수준, 특정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로 남아 있어야 한다(가장 나태하고 역겨운 수준의 기회 강탈이다)고 내심 믿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클래식 감상의 이유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상충하는 메시지 가운데에서(이런 메시지들은 계급, 교육 정책, 그리고 미디어 환경을 둘러싼 훨씬 더 큰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그 중심에 있는 것, 바로 음악을 간과했다. 우리를 황홀하게 하고 감동시키고 기운을 북돋아주고 평온하게 만드는 음악, 우리를 울고 웃고 생각하고 숨 막히게 만드는 음악, 뭔가를 가르쳐주고 의문을 갖게 하고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음악 말이다.

바흐의 두뇌는 슈퍼컴퓨터 같았다. 그는 여러 일에 매여 있으면서도 3,000곡 이상의 작품을 작곡했고, 두 번 결혼해 스무 명의 자식을 키웠다. 그는 모국인 독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 음악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였는데, 그중 가장 흥미로운 요소들을 결합시키고 여기에 (결정적으로) 자신만의 비법을 첨가했다. 바흐가 가장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보기에, 기술적 정교함과 위대한 감성을 결합하는 방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바흐의 음악에 나타나는 복잡하고 정교한 패턴을 보고 그를 ‘수학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냉철하고 분석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는 강렬한 기쁨과 거친 슬픔을 알고 있었다. 인간 마음의 예측 불가한 변화를 그보다 더 잘 조율하는 작곡가는 결코 없을 것이다.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다. 그가 없었다면 재즈, 펑크, 힙합, 테크노, 하우스, 그라임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후에 나타날 모든 음악을 위한 청사진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현명하고 재치 넘치며 풍부하다. 그의 음악은 모든 것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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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결코 게으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노력한 만큼 결과가 그대로 뒤따르는데 어찌 게으를 수 있겠는가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느슨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긴장과 집중이 반드시 동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완과 집중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는 듯했다

피아노엔 대부분의 다른 악기보다 유독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다. 기본적으로 피아노는 반주자와 함께하지 않는 독립적인 악기이기 때문에 조언을 구할 동료나 선생님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옆에서 객관적으로 연주를 들어줄 누군가의 귀가 꼭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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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이란 개념이 존재하는 않는 곳이 피아니스트의 세계다.

“음악은 똑같이 두 번을 치면 안 된다.”


  같은 곡을 반복해서 치더라도 매번 전혀 다른 곡을 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음악의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흥적으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굳은살이란 오히려 피아노를 한동안 치지 않았다가 오랜만에 쳤을 때야 박이는 것이다. 고로 굳은살이 박였다는 것은 곧 그 연주자가 훈련을 게을리했다는 뜻이 된다

요즘에야 피아니스트들이 마치 피아노 장인처럼 ‘피아노 외길’의 훈련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사실 전통적으로 연주자에게는 다양한 견문과 공부가 요구되어 왔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엠마누엘 엑스, 하버드대학교에서 인류학을 배운 요요마, 역시 같은 대학에서 철학을 배운 장한나 등 그러한 예시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한번은 선생님의 무대를 보고는 내 옆에 있던 동료 학생이 “선생님, 즐겁게 잘 들었습니다I enjoyed it very much” 하고 말했더니 선생님은 아주 조용히, 그러나 힘주어 대답했다.


  “나는 자네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연주하지 않았네.”

“사람은 자기가 언어로 알고 있는 것만큼만 표현하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네. 정확한 단어가 아니라 그냥 그림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 희미한 표현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연주자한테 연주 말고 필요한 것은 전부 다everything야! 자네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까지 모두. 음악에서 연주는 아주 일부에 불과하네. 음악을 이루는 것은 1퍼센트의 음악적 요소와 99퍼센트의 비음악적인 요소라네.”

러셀 셔먼 (Russell Sherman). 이 분의 음악을 듣고 이 분의 책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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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우리가 입고 싶지 않은 옷 여러 벌이 주렁주렁 걸린 옷걸이로 만들어놓고는 그 모든 것이 그라고 믿으며, 우리가 그에게 입힌 옷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또 우리는 투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미지를 왜곡하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 탓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성은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삼독, 즉 탐, 진, 치와 일치한다. 탐욕을 품고 상대에게 무언가를 원하면 그 상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탐욕이 원하는 대로, 화가 강요하는 대로,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한다.


한 사람이나 하나의 대상 전체를, 그것의 온전한 현실을 본다는 것은 현실에 꼭 맞게 응답하기 위한 조건이다. 대부분의 응답은 인지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며 순전히 지성적이다. 신문에서 인도의 기아를 다룬 기사를 읽으면 나는 거의 반응하지 않거나 생각으로만 반응한다. 그냥 참혹하다는 생각으로, 가엾다는 생각으로, 기껏해야 동정으로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 눈앞에서 고통받는 광경을 본다면 사정이 다르다. 나는 가슴으로, 온몸으로 반응한다. 그와 함께 아파하고 돕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 충동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구체적 고통이나 행복을 대면할 때조차 나는 겉핥기식으로만 반응한다. 그런 상황에 적당한 감정을 ‘생각’해서 적당한 행동을 하지만 그럼에도 거리를 유지한다. 현실적 의미에서 반응하고 응답한다는 말은 나를 아플 수 있게, 기쁠 수 있게,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인간적 힘을 동원해 응답한다는 의미다. 그럴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게 응답한다. 타인에 대한 내 경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내 응답을 결정한다. 나는 머리로 혹은 눈과 귀로 반응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내 온 인격으로 응답한다. 온몸으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본다. 내 안에 존재하는 실제 힘으로, 응답의 능력을 갖춘 온 힘으로 응답한다면 그 대상은 대상이기를 멈춘다.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며,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의 재판관이기를 멈춘다. 이런 식의 응답은 보는 자와 보는 대상,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되는 완벽한 관계 맺음의 상황에서 가능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내 안에서 생각한다’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 사람의 착각은 레코드플레이어에 빗댈 수 있다. 레코드플레이어가 생각할 줄 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지금 모차르트의 심포니를 연주하는 중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레코드판을 플레이어에 얹었고 그것이 자기 안에 녹음된 음악을 그저 재생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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