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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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면, 인상부터 찌푸려지는 나 같은 사람, 아마 많을 거다.

그런데 뭘 모르고 인상만 쓴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쓸 인상이라면 알고 인상을 써야 좀 폼이 나지 않겠는가. 무조건 나는 그런 거 몰라요, 라고 손사레만 치면서 물려 내는 것은, 밥상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이렇든 저렇든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고, 대한민국은 내 밥상이다.

내 밥상에 내가 온통 싫어하는 구역질 나는 음식들만 잔뜩 차려져 있는데 꾸역꾸역 먹으면서 - 단식을 하면서 숟가락을 내팽개치는 자존심도 없지 않은가 - 이건 내가 싫어하는 건데, 왜 먹으라고 해, 라는 불평을 내뱉어봐야, 무기력할 뿐 더러 달라지는 것이 절대 없을 것이고, 달라지지 않음에 누구를 탓하지도 못하게 된다.

대선이 또 다가온다.

나는 김대중을 찍었었고, 그 이유는 전라도도 한번 해봐야지, 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 이상은 잘 몰랐고, 알려고 노력도 안했다.

그다음엔 노무현을 찍었고, 그 이유는 노빠여서가 아니라, 무언가 크게 바뀔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라기보다, 대통령에게 막 비판해도 되는 사회 분위기가 되는게 좋아서였다. 감히 대통령에게, 라는 두려움 없이, 서로 다른 노선을 갖더라도 비판만 하기 보다는 다르다는 것에 중점을 둘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이제 결론은 그게 전혀 안되었다, 로 판명 된 거 같지만.

그나저나, 당시와는 달리, 요즘은 정말 찍을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밥상을 되도 않은 음식들로 차려놓은게 못마땅해죽겠는데, 그중에 하나라도 집어 먹지 않으면, 내가 굶어 죽는다. 그런데도 젓가락이 갈 곳이 없다. 배고파 죽겠어도 먹을 게 없다.

그렇다고 아무 짓도 않고 이대로 이 밥상을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어본다.

지승호씨도 그래서 이런 인터뷰를 열심히 하시겠지. 고마운 분이다, 앉아서 답답한 거 다 물어보는 거 보고 있게 해주어서. 사실 답하는 분들보다 훨씬 열심이고 성의가 있다. 답하는 분들 모두 우리나라에서 한 자리 하시는 분이지만, 왠지 패배감이 느껴진다. 개중에 어떤 분들은 더 어떻게 해보기도 지쳤다는 피로감의 호소가 하도 절절해서, 차라리 내가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솔직히 이렇게 비관적인 나라에서, 이민 밖에는 도리가 없지 않나. 그 이민이라도 갈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해야 하나. 이민 가면 거기선 행복하겠나. 거기선 내게 딱 맞는 밥상 차려주겠나. 골 아프다. 이런 게 평범한 소시민들의 고민 아니겠나. 나도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민의 수준에 정치가 따라간다는 말이 딱 맞다. 부랴부랴, 내 수준을 언능 높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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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7-11-05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맞아요. 골 아파요. 밥상 비유, 굉장히 들어맞는데요?
그리고 김대중 찍은 이유, 노무현 찍은 이유가 어쩜 이리 저랑 같으신지, 비실비실 웃어요.
게다가 현재의 심사도 비슷... 다만, 이 책을 읽게 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ㅋㅋ

그나저나, 좋은 책들 많이 방출하셨더군요. 몇 개 흥미로운 게 있던데, 역시나 저는
또 한 발 늦은 관계로다가.. ㅋㅋ

치니 2007-11-05 12:44   좋아요 0 | URL
카이레님, 저랑 같은 이유, 동지가 있었군요. 으흐흐 역시...
제 생각에 이 책은, 전부 다를 권하기엔 무리가 있고 그중 중언부언 없이 딱 부러지게 말 잘하는 사람 거 몇개만 읽어봐도 됩니다.
다음 책 방출 때, 기대하세요. 히힛.

sudan 2007-11-05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오일제한다고 해서 그거 하나 보고 노무현 찍었는데, 정말로 주오일제 해서 별 불만 없어요.(친구는 너 참 생각없다고 하지만서도. ㅎㅎㅎ)
그런데 이번 대선에선 별로 땡기는 공약을 내거는 사람들이 없어서.. 대운하 이런건 정말이지.. -_-;;;

치니 2007-11-05 12:45   좋아요 0 | URL
수단님처럼 따박 따박 공약 찾아보고 그거에 의거하여 찍은 사람도 거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걸요.
친구분은 더 대단하신가부당.
이번 대선에선, 처음엔 외모나 목소리 위주로 뽑을라고 했어요, 하두 한심해서. 그 부분에서 마릴린 맨슨 아자씨는 일단 제껴졌고... 근데 외모로 보자고 해도, 마땅하질 않으니, 흑.

치니 2007-11-05 12:47   좋아요 0 | URL
흑, 근데 우리 회산 아직 주오일 아니에요. 노무현에게 임기 마지막 동안에 강제적으로 규정 만들어달라고 하고싶다...

콩스탕스 2007-11-05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마릴린 맨슨 아자씨..사무실에서 웃음참느라 괴롭습니다..
어쩜 그리 딱 맞는 인물을 콕 찝어내시다니..

치니 2007-11-05 16:42   좋아요 0 | URL
콩스탕스님, ㅋㅋ 그쵸그쵸, 전 아무리 봐도 그분이 동양적인 마릴린맨슨 같아요 ~ 마릴린 맨슨이 알면 넘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sudan 2007-11-05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릴린 맨슨. 으흑. 넘 웃겨요. ㅎㅎㅎㅎ

치니 2007-11-05 23:11   좋아요 0 | URL
지금도 테레비에 나오고있어요. 으흐흐흐, 목소리도 웃겨요.
 
[애덤 스미스 구하기] 서평단 알림
애덤 스미스 구하기 - 개정판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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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리뷰는 서평단 도서의 리뷰입니다>

오래 전 한 때 괜한 오기 같은 연정을 품고 아쉬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들이대 보았던 어떤 사람이, 가을 낙엽처럼 부석거리며 그 연정이 시들해진 지가 벌써 한참인 내게, 뜬금 없이 전화를 걸어, ‘넌 요즘 행복해?’라고 물었다.
행복? 반문을 하며 피식 웃고 말았지만,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너에게 그때 같은 마음이 없이 평화롭게 전화를 받고 있는 나를 보니, 행복해’라고.

원래부터 돈 욕심은 없는 편에 속하는 지라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먹어가는 나이와, 대신 부양해 줄 누구도 없는 내 처지, 나름대로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자립심 사이에서 길을 잃고 한 없이 마음이 가파른 길을 달릴 때, 에라 모르겠다,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이 중요하지,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이나 떠올리자, 하면 갑자기 ‘행복해’라는 생각이 들면서 금세 심란함이 가시기도 한다.

아무 일도 없는 날들이 계속되는 어느 한 날에 예고 없이 갑작스런 어려움이 닥치면, 어영부영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을 하다가, 문득 아무 일도 없던 날들을 생각하매, 이러다 또 그 아무 일 없는 날도 오겠지, 생각하면서 ‘행복해’ 암시를 걸기도 한다.

‘행복이란 마음의 평화에서 온다’라는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누구도 그게 아니야라고 토를 달 수 없게 만드는 이 애덤 스미스의 말은, 이 책 속에서 대주제로 반복되고, 나는 위에 말한 내 행복감들이 자진해서 만들어 낸 마음의 평화라는 것에 우쭐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이렇게 소박한 행복 구현법을 구축하고 살아도 되는 자본주의도 있을 수 있다는, 아니 있어야만 한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모토였음을 알고 그의 이론들을 면면히 대하다 보니 마음에 조그만 등불이 생기는 것 같은 게 꽤 기분이 좋아진다.

남의 몸을 빌어서까지 현대의 자본시대에 찾아와, 자신이 주창한 [국부론]의 왜곡을 바로 잡으려고 하고, [도덕감정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애덤 스미스와 주인공인 경제학도의 로드무비는 소설의 골격을 갖추었지만, 내용상으로는 순전히 애덤 스미스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이론을 오늘날에 제대로 전파하고자 하는 한 경제학자의 오마쥬일 뿐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다른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 학교 때 배운 거 다 까먹고(또, 우리나라 학교에서 배우면 얼마나 제대로 배우겠냐만) - 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의 주장과 비교하기 위해 혹은 그 역사적 의미와 변화를 되새기기 위해 나온 것으로만 짐작하는 무지한 내 주제에도, 이 소설이 완전히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쓰여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마쥬의 형식을 갖춘 도서들이 다 그러한 지는 몇 권 읽어본 것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문학작품의 한 쟝르인 소설로 대해서만은 점수를 높게 줄 수는 없는 어색한 이어 가기와 지지부진함도 눈에 띠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같이 경제학의 경 자도 모르고 살아가는 어떤 현대인들에게 그야말로 ‘좋은’ 의미의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깨우치게 하고, 내가 걸고 사는 행복의 잣대가 이렇게 이론적으로도 맞는구나 하는 동감을 얻어낼 방편으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아무튼 원래 경제학 책들보다는 쉽고 조금은 재미난 것은 자명하니, 이 정도면 감사히 읽어줘야 한다 싶다.
그나저나 이제는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가미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있음을 단단히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조금 더 다양하게 고심해봐야겠다. 그 동안 너무 무식하게 살았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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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4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쥬같다는 데 일부 동감이요~^^ 스믈스믈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한마디가 딱 오마쥬였어요~

치니 2007-11-04 21:35   좋아요 0 | URL
네 전반적으로 너무 사랑하는 거 같아서 살짝 부담스러웠어요. ㅋㅋ

프레이야 2007-11-0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스미스에 대한 오마주요^^ 그리고 로드무비 같다는 생각도
동감이에요. 다른 경제학자의 이론에 훨씬 손들어주고픈 사람도 있겠죠.

치니님 보내주신 책 잘 받았어요. 고맙구요. 즐독할게요^^

치니 2007-11-06 16:45   좋아요 0 | URL
네 다른 경제학자 이론도 스미스 이론 만큼이나 모르니까, 할 말은 없지만...
왠지 스미스가 다 옳지는 않으리란 생각도 들구 그렇더라구요.

책이 잘 도착되었군요. 히힛 기뻐요.
 
육일약국 갑시다 - 무일푼 약사출신 CEO의 독창적 경영 노하우, 나는 4.5평 가게에서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배웠다!
김성오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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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개인의 아우라를 포기한다는 뜻.

나도 권유에 못이겨 읽었다.

육일약국 갑시다, 라는 제목이 어디서 나왔는가만 알면 이 책을 읽는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

그것은 고맙게도 책의 첫부분부터 나오니, 혹시 읽고 싶으시다면 그 부분까지만 읽으시라.

나머지는 다 사족이고 쓸데없는 자랑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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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10-24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인들에게 억지로 읽히는 자기계발서류의 책들 진짜 짜증나죠?
과장 약간 섞어 세 줄 이상이면 글을 안 읽는, 남편의 회사 과제를 대신해 줄 때가 있는데, 챕터를 잘 구분해 놓아서 그런지 답만 쏙쏙 찾아내고 제대로 읽지도 않아요. 사실 요만큼도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들 때가 더 많구요.

치니 2007-10-24 20:31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읽으라고 할 때 알았다 하고 안 읽어버린 적 많은데, 이 책은 그래도 하는 맘으로 읽었다가 , 낭패.
세 줄 이상이면 글을 안 읽는 남편, 그야말로 쿨 하십니다. ㅎㅎ

sudan 2007-10-25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별은 두개나 두셨어요. 리뷰만 보면 별을 마이너스로 줘야할 것 같은데. ㅎㅎ

치니 2007-10-25 12:52   좋아요 0 | URL
기억할 만한 꺼리가 두 개라서 별 두개. ^-^

sudan 2007-10-25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할 만한 게 뭐가 있었는지도 알려주세요. 음, 혹시 그 중 하나가 회사에서 권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겠다! 뭐 이런건가요? ^^

치니 2007-10-26 09:29   좋아요 0 | URL
아하하, 역시 수단님.
덕분에 회사에서 권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겠다! 도 추가로 넣어서 세 개가 되었네요.
음...제가 건진 두 가지는,
안되는 것도 되게 하는 방법이 꾸준한 거 말곤 별게 없더라,
소규모 회사에서는 정이 최고다 정도에요.

누에 2007-10-2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의 비밀 알려주셔요^^

치니 2007-10-26 09:30   좋아요 0 | URL
비밀이랄 거 까진 없고 ^-^;; 말 그대로 삼분의일 읽고 나면 이 사람이 주구장창 하고자 하는 말은 다 알겠드라 뭐 그런...그 이후를 읽자면, 느무 지루하다는거죵.

이게다예요 2007-10-2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규모 회사에서는 정이 최고다' 명언이네요. 이거 읽고 되게 웃었는데 뒷맛이 개운치 않네요. 그 말 참 무서워요 사실.
작은 회사는 정말 정 때문에 대충이라도 굴러가지만, 정 때문에 아작난 경우를 진작부터 많이 본터라. ;;

치니 2007-10-28 09:12   좋아요 0 | URL
저는 원래 '정'이라는 우리네 개념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작은 회사에서 그마저 없으면 살 길이 막막할 때가 많은 거 같아요.
고단한 세상이죠. 이래도 고단 저래도 고단. ^-^;;
 
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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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쉽거나 단순하지 않으면 그것이 책이든 영화든 미술품이든, 거부하는 습성이 생겼다.

왜 그럴까, 라는 건 자문하지 않아도 너무 뻔하게 알고 있다.

그게 편하니까.

<피아노 치는 여자>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못 본 나로써는 (디비디를 빌리러 갈 때마다 나와 함께 볼 사람이 이미 그 영화를 봐버린 상황이라, 차마 못 빌리고 나오곤 했던 것) 이 책과 그 영화의 연관성도 모르고 그저 제목만 보고, 또 전에 마하연님이 읽고 싶어했던 책인지라, 덮석 집어든 것 뿐이다.

아 근데 딱 걸렸다. 말랑말랑하고 편안한 것으로 막연히 기대하던 책의 첫페이지부터 난감스러웠다.

어머니. 내 트라우마인 어머니와의 관계. 아 이거 싫은데, 라는 거부감.

앞표지를 다시 보고, 노벨상 수상에 빛난다는 작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대단한 여자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책을 잡기까지 몇일이 걸렸다.

중간까지 가도록 에리카는, 아니 정확히는 작가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사로 장황하고 현란하게 에리카를 수식하고, 나는 줄줄 읽어나가면서 아무래도 번역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구나 라는 것만 느껴 간다. (나중에 번역자의 해설을 보니, 독일어로 읽어도 그 독해의 어려움은 마찬가지라는구나), 아무튼 읽다가 숨을 고를 새가 없다.

왜 이렇게 난하게 써내려가야 했을까. 왜 이렇게 어딘가 광기 어린 냄새가 나게 휘몰아치는 걸까.

이제 더듬더듬 장님 문고리 잡듯 마지막 페이지까지 겨우 걸어와, 그 해답이 살짝은 보이는 것 같다.

이 사람은 에리카인 것이다. 에리카를 대신하는 작가로써 쓴 글이 아니라 에리카 그 자체. 에리카가 썼는데 차분하고 단순하게 쓸 수가 없는게 당연하다. 에리카는 어머니의 모성이라는 굴레에서 숨도 못쉬고 억압받다가 남성에게서 그 보상을 받으려 애를 쓰지만 성도착증에 가까운 정신 분열 상태의 피아노 치는 여자. 이런 사람이 침착하게 자기 이야기를 상대방이 알아듣도록 조근조근 말할 수 없는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객관적이라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천재 천재 하는 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던게다. 이 책을 섣불리 비난하느니 내 좁은 식견과 짧은 이해력을 비난해야겠지, 라고 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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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옐프리드 옐리넥 <피아노 치는 여자>
    from 고치 2007-10-27 18:03 
    이 책을 읽은 후 난 오랫동안 자주 책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에리카를 떠올리고 내 친구를 떠올리고 떠나간자들을 떠올리고 이자벨 위뻬르를 떠올리고 구멍가게 아줌마를 떠올리고 결혼식장의 먼 친척을 떠올리고 학예회때의 아이들을 떠올리고 콩꾸르에 나갔을 적 입었던 촌스런 쉐타를 떠올리고 통통 튕기던 나무 주판알의 느낌을 떠올리고 늘 집에 배치된 차밍샴푸의 냄새를 떠올리고... 지금 양초가 꺼진 후 나는 쿰쿰한 냄새도 떠
 
 
이게다예요 2007-10-2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이 웃기잖아요! ㅋㅋㅋ
저도 요즘 가볍게, 안전하게 빨리 읽는 것들에 몰두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는게 얼마나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인지 아주 많이 느껴요. 전 거의 몸으로 책을 읽는 거 같아요. 한 권을 끝내고 나면 몸이 어찌나 뻐근한지 아주 웃겨요. ㅋㅋ

치니 2007-10-24 20:33   좋아요 0 | URL
아, 다예요님의 리뷰가 그렇게 알찬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몸이 뻐근할만큼 몰두해서 읽고 싶은 책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만, 어째 그런 책을 못 찾고 있네요.

누에 2007-10-2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열두번도 더 읽다 집어던졌다 다시 읽고 그랬더랬어요. 이 책 땜에 독일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으나 게을러서 포기.^^

치니 2007-10-26 09:31   좋아요 0 | URL
으아, 저도 실은 열두번 이상 되는 거 같아요. 독일식 문학이라는게 정말 있는 거 같아요. 한국어도 아마 그렇겠죠? ^-^

mooni 2007-10-2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숙하지 마시고, 비난을 무차별로 해주셨으면 재밌었을텐데 말예요. 헤헤. 그럼 제가 막 이 책 편들어서, 치니님한테 시비걸고 말이죠. (비온뒤에 굳어지는 땅처럼 언쟁뒤에 친해지는 이웃들..하하.) 전 이 책 꽤 재밌게 봤어요. 앞에 몇장만 쫌 읽기 힘든거 넘기고 일단 적응되니까, 흥미진진. 리뷰도 한참 전에 쓰기 시작했으나... 횡설수설이 되는 바람에 거의 포기상태지만요. ^^

근데, 어머니와의 트라우마적인 관계. 치니님도네요. 아닌 사람이 별로 없는 것같애요. 저 아는 사람은 다들 그래요...아니면 이것도 유유상종인지, 제가 그러니까 비슷한 사람들만 낚아서 친구하는지도 모르겠어요. :)

치니 2007-10-26 14:52   좋아요 0 | URL
네, 그랬어요. 처음에는 비난을 무차별하게 해버릴 지도 모르겠다 싶더니, 중반 이후부터는 어라 이게 아니네 싶어지고, 흥미진진하더라구요.
아마 초반에는 무의식 속에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거부감도 약간 있었나봐요. ^-^;; 상 탄 책들 중에 좋았던 게 별루 없어서...
마하연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제 거는 리뷰라기보다 그냥 자신의 무식한 처지를 토로하는 감상일 따름이죠.

어머니...쯔읍.



누에 2007-10-27 18:06   좋아요 0 | URL
저도 마하연님 편들었을텐데 아깝네요. - -+
그리고 저도 한탄의 리뷰였음. ㅠ.ㅠ
그런데 먼댓글 달기는 정말 민망해요.

치니 2007-10-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누에님 리뷰를 일찌기 읽었답니다. 그리고 영화 <피아니스트>를 기필코 보리라 맘 먹고 있어요. 위자벨 이뻬르를 보고 싶어서라도...먼댓글 달아주심 좋은데. 헤헤.

누에 2007-10-29 20:00   좋아요 0 | URL
이자벨 위뻬르가 없었다면 영화는 꿈도 못꿨을 꺼라는 생각.
그리고 진짜 민망하도록 먼댓글 마구 달아버리는 수가 있어요. - -+

치니 2007-10-30 08:45   좋아요 0 | URL
이자벨 위뻬르,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항상 생각... 아쉽게도 그녀의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쉬이 보긴 힘들어요.
먼댓글 마구마구, 좋아좋아요 ~ ㅋㅋ

Fox in the snow 2007-10-30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왠지 이책은 예전부터 읽고는 싶은데, 두렵다고 해야할까, 선뜻 꺼내들기 어려웠는데, 이참에 저도 읽어봐야 겠어요

치니 2007-10-30 13:51   좋아요 0 | URL
충격적이다, 라는 선입견을 이미 지니고 읽어서인지 두려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쉽게 이해가 되는 책은 아닌 것 같아요.
Fox in the snow님의 예리한 리뷰를 기대. ^-^
 
허니와 클로버 세트 1~10(완결)
우미노 치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만화를 잘 안 보는 편인데, 그 이유는 뭐, 전적으로 그다지 큰 재미를 못 느껴서 그렇다.
(라고 써놓고 보니, 중학교 때 읽었던 ‘캔디’는 엄청 재미나게 읽었었네)
아무튼, 심심하니까 만화방 가서 만화나 보자 라거나 비 오는 날 만화책 쌓아놓고 읽는 맛 같은 거는 나랑은 좀 동떨어진 취미였다.

그래도 알라딘에서 좋아하는 알라디너 분들이 극찬 하는 만화책을 보면, 냉큼 읽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호기심. 에라 하고 아예 한 질을 구매한 것이 있었으니, 영화로도 나름 인기를 끌었던 <허니와 클로버> 시리즈가 그것이다.
내가 샀던 한 질은 1~8권이었는데, 지금 보니 10권까지 완결판이 나왔던 모양.

8권까지 읽고 영화를 보고 한참 잊었던 이 만화의 9권을 어제 아들에게서 빌려 읽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이 만화의 성공비결이 눈에 팍팍 들어온다.
8권이나 읽고도 그냥 그랬었는데, 왜 9권을 읽고서야 이런 감동이 뒤늦게 오는 지야 모를 일이다.

청춘의 군상을 그리며 그 중에서도 예술을 하는 주인공들을 내세워 그들의 고뇌와 사랑과 열망과 허무를 제법 짜임새 있게 펼쳐 나갔다고 느낀 정도에서 그쳤었는데,
이제는 ‘청춘’이라는 제한적인 단어를 빼고 나머지를, ‘인생’이라는 커다란 그림 속에 넣고 담담히 바라보게 하는 힘을 주는 작가의 내공을 절절히 느껴버렸다.

게다가 아주 잘 그렸다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것 같은데, 간혹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기도 하는 표정 묘사는, 심각한 내용을 픽 하는 웃음으로 비껴 가며 긴장을 풀기에는 완전 제 격이다.

잘 된 작품은 – 그것이 소설이건 만화건 아니면 그림이건 – 공통점이 있다.
이제껏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전혀 공감하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에 갑작스러운 동일시 현상을 느끼게 되는 게, 그 공통점인 것 같다. 이 만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캐릭터에서, ‘아 나도 이런 마음이 된 적이 있었는데…’ 라는 감정을 느끼면서 괜히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는 나를 보면.

이제 10권이 남았는데, 왠지 ‘완결’이라는 말이 벌써부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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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10-11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이러지 마세요.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 있는데, 여기에 만화까지... (제 마음을 너무 들쑤시고 계셔요. 흙.) 근데 만화가 됐든 드라마가 됐든 동화가 됐든요, 제일 위험한 캐릭터는 '나도 그랬는데' 하게 만드는 캐릭터예요. 이건 뭐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으니 말이에요.

치니 2007-10-12 12:39   좋아요 0 | URL
네꼬님, 읽지 못한 책들을 잠깐 치우고 이 만화를 봐도 될걸요, 아마 하루 안에 다 보시게 될테니...^-^;;
맞아요, 위험해요, 그런 캐릭터...(실제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누에 2007-10-13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읔, 이 만화를 어디가서 입수하냔 말이에요. -_- 쿨 치니님~

2007-10-13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7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7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8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