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들어 쉽거나 단순하지 않으면 그것이 책이든 영화든 미술품이든, 거부하는 습성이 생겼다.

왜 그럴까, 라는 건 자문하지 않아도 너무 뻔하게 알고 있다.

그게 편하니까.

<피아노 치는 여자>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못 본 나로써는 (디비디를 빌리러 갈 때마다 나와 함께 볼 사람이 이미 그 영화를 봐버린 상황이라, 차마 못 빌리고 나오곤 했던 것) 이 책과 그 영화의 연관성도 모르고 그저 제목만 보고, 또 전에 마하연님이 읽고 싶어했던 책인지라, 덮석 집어든 것 뿐이다.

아 근데 딱 걸렸다. 말랑말랑하고 편안한 것으로 막연히 기대하던 책의 첫페이지부터 난감스러웠다.

어머니. 내 트라우마인 어머니와의 관계. 아 이거 싫은데, 라는 거부감.

앞표지를 다시 보고, 노벨상 수상에 빛난다는 작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대단한 여자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책을 잡기까지 몇일이 걸렸다.

중간까지 가도록 에리카는, 아니 정확히는 작가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사로 장황하고 현란하게 에리카를 수식하고, 나는 줄줄 읽어나가면서 아무래도 번역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구나 라는 것만 느껴 간다. (나중에 번역자의 해설을 보니, 독일어로 읽어도 그 독해의 어려움은 마찬가지라는구나), 아무튼 읽다가 숨을 고를 새가 없다.

왜 이렇게 난하게 써내려가야 했을까. 왜 이렇게 어딘가 광기 어린 냄새가 나게 휘몰아치는 걸까.

이제 더듬더듬 장님 문고리 잡듯 마지막 페이지까지 겨우 걸어와, 그 해답이 살짝은 보이는 것 같다.

이 사람은 에리카인 것이다. 에리카를 대신하는 작가로써 쓴 글이 아니라 에리카 그 자체. 에리카가 썼는데 차분하고 단순하게 쓸 수가 없는게 당연하다. 에리카는 어머니의 모성이라는 굴레에서 숨도 못쉬고 억압받다가 남성에게서 그 보상을 받으려 애를 쓰지만 성도착증에 가까운 정신 분열 상태의 피아노 치는 여자. 이런 사람이 침착하게 자기 이야기를 상대방이 알아듣도록 조근조근 말할 수 없는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객관적이라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천재 천재 하는 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던게다. 이 책을 섣불리 비난하느니 내 좁은 식견과 짧은 이해력을 비난해야겠지, 라고 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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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옐프리드 옐리넥 <피아노 치는 여자>
    from 고치 2007-10-27 18:03 
    이 책을 읽은 후 난 오랫동안 자주 책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에리카를 떠올리고 내 친구를 떠올리고 떠나간자들을 떠올리고 이자벨 위뻬르를 떠올리고 구멍가게 아줌마를 떠올리고 결혼식장의 먼 친척을 떠올리고 학예회때의 아이들을 떠올리고 콩꾸르에 나갔을 적 입었던 촌스런 쉐타를 떠올리고 통통 튕기던 나무 주판알의 느낌을 떠올리고 늘 집에 배치된 차밍샴푸의 냄새를 떠올리고... 지금 양초가 꺼진 후 나는 쿰쿰한 냄새도 떠
 
 
이게다예요 2007-10-2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이 웃기잖아요! ㅋㅋㅋ
저도 요즘 가볍게, 안전하게 빨리 읽는 것들에 몰두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는게 얼마나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인지 아주 많이 느껴요. 전 거의 몸으로 책을 읽는 거 같아요. 한 권을 끝내고 나면 몸이 어찌나 뻐근한지 아주 웃겨요. ㅋㅋ

치니 2007-10-24 20:33   좋아요 0 | URL
아, 다예요님의 리뷰가 그렇게 알찬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몸이 뻐근할만큼 몰두해서 읽고 싶은 책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만, 어째 그런 책을 못 찾고 있네요.

누에 2007-10-2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열두번도 더 읽다 집어던졌다 다시 읽고 그랬더랬어요. 이 책 땜에 독일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으나 게을러서 포기.^^

치니 2007-10-26 09:31   좋아요 0 | URL
으아, 저도 실은 열두번 이상 되는 거 같아요. 독일식 문학이라는게 정말 있는 거 같아요. 한국어도 아마 그렇겠죠? ^-^

mooni 2007-10-2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숙하지 마시고, 비난을 무차별로 해주셨으면 재밌었을텐데 말예요. 헤헤. 그럼 제가 막 이 책 편들어서, 치니님한테 시비걸고 말이죠. (비온뒤에 굳어지는 땅처럼 언쟁뒤에 친해지는 이웃들..하하.) 전 이 책 꽤 재밌게 봤어요. 앞에 몇장만 쫌 읽기 힘든거 넘기고 일단 적응되니까, 흥미진진. 리뷰도 한참 전에 쓰기 시작했으나... 횡설수설이 되는 바람에 거의 포기상태지만요. ^^

근데, 어머니와의 트라우마적인 관계. 치니님도네요. 아닌 사람이 별로 없는 것같애요. 저 아는 사람은 다들 그래요...아니면 이것도 유유상종인지, 제가 그러니까 비슷한 사람들만 낚아서 친구하는지도 모르겠어요. :)

치니 2007-10-26 14:52   좋아요 0 | URL
네, 그랬어요. 처음에는 비난을 무차별하게 해버릴 지도 모르겠다 싶더니, 중반 이후부터는 어라 이게 아니네 싶어지고, 흥미진진하더라구요.
아마 초반에는 무의식 속에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거부감도 약간 있었나봐요. ^-^;; 상 탄 책들 중에 좋았던 게 별루 없어서...
마하연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제 거는 리뷰라기보다 그냥 자신의 무식한 처지를 토로하는 감상일 따름이죠.

어머니...쯔읍.



누에 2007-10-27 18:06   좋아요 0 | URL
저도 마하연님 편들었을텐데 아깝네요. - -+
그리고 저도 한탄의 리뷰였음. ㅠ.ㅠ
그런데 먼댓글 달기는 정말 민망해요.

치니 2007-10-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누에님 리뷰를 일찌기 읽었답니다. 그리고 영화 <피아니스트>를 기필코 보리라 맘 먹고 있어요. 위자벨 이뻬르를 보고 싶어서라도...먼댓글 달아주심 좋은데. 헤헤.

누에 2007-10-29 20:00   좋아요 0 | URL
이자벨 위뻬르가 없었다면 영화는 꿈도 못꿨을 꺼라는 생각.
그리고 진짜 민망하도록 먼댓글 마구 달아버리는 수가 있어요. - -+

치니 2007-10-30 08:45   좋아요 0 | URL
이자벨 위뻬르,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항상 생각... 아쉽게도 그녀의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쉬이 보긴 힘들어요.
먼댓글 마구마구, 좋아좋아요 ~ ㅋㅋ

Fox in the snow 2007-10-30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왠지 이책은 예전부터 읽고는 싶은데, 두렵다고 해야할까, 선뜻 꺼내들기 어려웠는데, 이참에 저도 읽어봐야 겠어요

치니 2007-10-30 13:51   좋아요 0 | URL
충격적이다, 라는 선입견을 이미 지니고 읽어서인지 두려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쉽게 이해가 되는 책은 아닌 것 같아요.
Fox in the snow님의 예리한 리뷰를 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