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리소설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읽은 것도 없었다. 미미 여사의 책을 (좋아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어찌된 일인지 "주홍색 연구" 같은 작품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추리소설하고 나는 잘 안 맞나 보다 생각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유명한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들은 어린 시절 언니가 읽고 얘기해줄 때 너무 무서웠던 기억 때문에 더욱 관심 밖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영국 드라마 "미스 마플" 시리즈랑 "명탐정 포와로" 시리즈에 홀딱 빠져서 보고 또 보았다(무료로 보게 해준 올레티비께 감사). 특히 마플 역을 맡은 할머니가 너무 좋아서 막... 아, 이 얘기를 하려면 너무 길고 옆길로 새기 쉬우니까 여기까지만. 아무튼 드라마 덕분에 음, 그럼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을 만나 볼까, 생각했다. 그런데 읽으려고 보니 아니 이분 이분 무슨 책을 이렇게 많이 쓴 거야! 어디서부터 읽는담? 드라마로 본 작품을 읽으면 재미가 덜할 것 같고, 유명한 작품들은 너무 많고(?), 다 읽을 수도 없고 어쩌지! 그러던 차에 황금가지의 '에디터스 초이스' 판이 나왔다.  

 

나는 '에디터'라는 말이 싫다. 자기 자신을 '에디터'라고 부르는 것은 더 싫다. 이 단어에 무슨 원수가 져서는 아니고, 이 말을 쓰는 뉘앙스가 싫은 것이다. 편집자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에디터'라고 하는 게 왠지 스스로 세련되게 보이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싫다. 내가 편집자일 때도 싫었는데 지금도 싫다. 아니 그러니까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어쨌든 '에디터'라는 말은 싫지만 그래도 꾹 참고 이 시리즈를 산 것은, '초이스'에 방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름(이 경우 직업이지만)을 걸고 작성한 목록을 일단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부록으로 주는 "A to Z"도 욕심 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목록은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이 목록 덕분에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추종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추리소설이라는 정글을 탐험할 의지가 생겼다. 세상에 읽을 것은 많기도 하지!

 

* 여기서 잠깐. 오오. 나는 추리소설 무지렁이였던 덕분에 스포일러 없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ABC 살인사건>>을, 그리고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읽었다. 이것은 정녕 행운. 오오. 세상은 아름다워라. 그리고 알고 보니 추리소설의 핵심은 범인 찾기가 아니라 형식의 아름다움에 있었어!

 

여기까지 쓰고 보자면 나는 페이퍼가 아니라 리뷰로, 이 '에디터스 초이스'에 별 다섯을 주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럴 생각도 있었는데, 별점을 주는 게 골치 아팠다. 내용상으로는 별 다섯이다. 그런데, 그런데. 늘 얘기하지만 나는 오탈자에 관대한 독자다. 아마 편집자, 그리고 한때 편집자였던 사람들 중에서 내가 이 문제에 가장 관대할 것이다. 오탈자 문제는 '섬세함'과 관련 깊고, '섬세함'은 개인의 성격과도, 부득이한 일정(즉, 미친 일정)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정자의 덤벙대는 성격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원고를 봤어도 오탈자가 생길 수 있고, 정말 꼼꼼하게 보고 싶었어도 정해진 일정 때문에 할 수 없이 실수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맞춤법 문제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계속해서 틀리는 경우라면. 이건 알고 모르고의 문제니까.

 

~하는지 /~하는 줄

~했대 / ~했데

맞추다 / 맞히다

~했든 / ~했던

 

이 몇 가지 내용은 요즘 세상의 편집자들이라면(!) 강박적으로 챙기는 것들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할 수 있다. 몰랐을 수도 있고, 알고도 놓쳤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초이스'가 '에디터스 초이스'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려면 한 번 이상 크로스 교정을 해야 하고, 그랬다면 이 정도로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목록이 좋고, 더불어 기획도 좋다. 이 세트의 표지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열 권 뒷표지의 문구를 다 다르게 작성한 것도 표 안 나는 고생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적어도 '에디터스 초이스'를 표방했으면 이 실수들을 어떻게든 줄였어야 했다.

 

아무래도 열 권이나 되니까 관리가 어려웠을까? 그래도 표지에서조차 '맞히다'를 '맞추다'로 잘못 쓴 데 대한 설명이 되진 않는다. 시간이 없었을까? 비교해보진 않았지만 판권으로 짐작컨대 이 세트 도서들의 번역 원고는 이미 출간된 것들을 그대로 활용한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더 어두워진다. 몇 년 동안 찍고 또 찍은 원고를 그대로 '에디터스 초이스' 판에 흘린 셈이니까. 물론 새로 받은 원고라고 해도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아아, 나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을까. 내가 편집한 책을 두고 누가 오탈자가 있다느니 교열을 못했다느니 맞춤법이 틀렸다느니 하면 진위를 가리기 전에 얼굴부터 달아올랐던 내가. 지금도 판권에 내 이름 적힌 책들이 오류를 한껏 품은 채로(ㅠㅠ 쓰고 보니 비통하다) 누군가의 서가에, 더 심각하게는 도서관에 꽂혀 있을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베개에 얼굴을 묻는 내가. 이 목록은 왜 하필 '에디터스 초이스'인가. 나는 그래서 선택했고, 그래서 화가 난다. 이것이 애거서 크리스티를 사랑하게 된 이 봄 나의 고뇌다. ㅠㅠ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4-03-24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이런걸 두고 직업병이라고들 하나봅니다. 우리 모두의 사랑 애거서 여사를 드디어 보셨군요. 애거서 여사의 가장 거대한 스포일러는 언급하신 세 작품말고 다른 작품에 있죠... 저는 그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가장 먼저 퍼뜨린 사람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ㅠㅠ

네꼬 2014-03-24 09:08   좋아요 0 | URL
아앗 소이진님. 뭐죠? 뭡니까, 뭐죠? 제가 안 읽은 책이면 좋겠네요. 저 10권에 포함되지 않는 책이었으면! (두근두근)

그렇게혜윰 2014-03-2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자셨군요?^^저도 요즘 이 책 읽고 있는데 아가사여사의 매력이 진짜 넘칩니다. 다만 전 번역이 가끔 매끄럽지 않다 느꼈었는데 그게 편집자의 역할일수도 있겠네요...번역자만 욕하고 있었어요ㅋ 유명하신분인데 왜 이래? 이러면서요^^ 하지만 이런 문제로도 덮어질수없는 매력!

네꼬 2014-03-24 13:07   좋아요 0 | URL
네, 지금은 아니지만요;; 그나저나 애거서 여사님 매력은 *_* 막 여사님 뜻대로 제 마음이 막 막 요동쳐요.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책이 한 권 나오려면 여럿이 힘을 합쳐야 할 텐데.. 아아 ㅜㅜ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될지 모르지만 너무 아쉬웠어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뭐라도 쓰지 않을 수 없는 여사님 매력!

paviana 2014-03-24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자 본인이 10번 읽어도 절대 못 잡는거 아시잖아요. ㅎㅎ 자기가 읽고 싶은대로 미리 읽어버리니까요. 한명 이상이 크로스 체크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안되는데 미친 일정때문에 ......
그래도 맞히다는 심하네요. 표지는 진짜 여러명이 보잖아요. 안그런가?
2권이나 안 읽은게 있네요. 살짝 반성하고 갑니다.ㅎㅎ

네꼬 2014-03-24 13:09   좋아요 0 | URL
파비님, 제가 바로 그 10번 읽고 못 잡는 편집자였습니다. 하하... (웃음이 나오냐.) 표지에 실수도 했고요 하하하하...(ㅠㅠ) 딴 사람 실수한 것만 봐도 제 가슴이 다 철렁하는데, 이 경우는 이 '에디터스 초이스'라는 이름 때문에 제 마음 한구석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봐요. 이 페이퍼 괜히 썼나 좀 후회도 돼요. ㅠㅠ

치니 2014-03-2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리소설 무지렁이인데, 미미 여사에게 광분도 잘 안 되는 쪽인데, 네꼬 님이 이러니까 마구 마음이 흔들려요! 지금이라도 애거서 크리스티를 읽어야 하는가!
저 역시 형식미를 보기 이전에, 누가 범인인지 생각해야 하는 게 골치 아파, 귀찮게 뭘 그리, 이러면서 멀리 한 편이거든요.
흐, 편집자라는 직업은 정말 힘든 직업인 거 같아요. 편집자 여러분, 존경합니다.

(에디터, 라는 단어를 보면 저는 보그 ㅂㅅ체가 먼저 떠올라서 ㅋㅋ 이미지가 안 좋은데 하필 왜 문학작품 시리즈에 저런 제목을 다셨을까)

네꼬 2014-03-24 13:14   좋아요 0 | URL
오오 치니님 어서 오시와 어서 오시와, 애거서 여사의 세계로! 으왕 전 정말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어요. 깜짝 깜짝 즐겁게 놀라고 있습니다.

이 세트, 엄청 공들인 것 같아요. 일단 이런 선을 내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시도고요. 그렇지만 본문이 이러니 아무래도 속이 상하더라고요. ㅠㅠ 어느 직업이라고 안 힘든가요. 불철주야 애쓰는 편집자들을 저 역시 조.. 좋아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3-2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미치너 말년의 걸작 <소설>엔 작가와 편집자와의 줄다리기가 정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죠.그 소설을 읽고 한 작품이 출판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타협이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네꼬 2014-03-24 20:17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 오래간만이어요! 사실 저는 편집자로 일할 때도 별로 작가랑 줄다리기 안 하는 불성실파였어요. -_-a 물론 합이 잘 맞으면 일하는 보람이 크지만 뭐 꼭... (이하 생략) "소설"도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너무 많죠 ㅎㅎ

서니데이 2014-03-2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읽었던 <봄에 나는 없었다>는 추리소설 아니라고 하지만, 재미있었어요. 이 책 세트라서(그것도 열권) 아직도 사, 말어 하고 있는데, 아아... ;;


추가, 조금있다 생각나서 찾아보니까 이런 거 있더라구요.

"본격 미스터리는 양식미의 세계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
--마야 유타카의 <애꾸눈 소녀>에 대한 온다 리쿠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심사평 중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저도 범인 찾는 거 말곤 별 관심이 없는 편이었는지, 그런 건 몰랐습니다. )

네꼬 2014-03-24 20:19   좋아요 0 | URL
아아 그렇습니다. 아아... 이긴 하지만 이 목록 자체는 편집부에서 꽤 자부심 가질 만한 것 같아요.

그나저나 추리소설의 형식미에 대한 건 전혀 생각도 않고 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범인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이것은 그야말로 "범인은 바로 너!" 수준의 발견!!

2014-03-24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4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4-03-2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살까말까 하면서 노려보고 있는 책인데 ^^; 네꼬님 덕분에 얼른 산다. 로 바뀌었어요. ㅎㅎ
예전에 저 오탈자 못 참고 괴로워하는 성격이었는데요. 가만보니 저역시 모르고, 맞는 줄 착각하
고 썼던 말들이 많더라구요. 그 이후부터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어요. (백만년전에;) 논문 쓸 때는 수십번 읽고도 놓치는 오자들 -_-;;;;
(새삼스레;) 네꼬님, 그리고 제가 모르는 편집자분들, 수고 많으셨어요!!!!!

하여간에 주문하러 고고씽~^^

네꼬 2014-03-24 20:22   좋아요 0 | URL
어이구 문나잇님. 저는 오탈자 되게 잘 참아요.(원래 그랬어요 ㅎㅎ) 편집자가 그랬으니 그게 문제였죠 ㅎㅎ 근데 오탈자가 아니라 맞춤법을 반복해서 틀리는 데다 이게 '에디터스 초이스'라는 것, 게다가 원래 있던 원고로 짐작되는 점 때문에 그만 툴툴대는 페이퍼가 되고 말았네요. 저라고 뭐 얼마나 잘 알아서 그러겠습니까.. ㅠㅠ

일단 리스트는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요. 이 세트의 장점 또 하나는 표지. 또 하나는 세트 부록 문나잇님도 재밌게 읽으시면 좋겠네요~

2014-03-25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5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