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비하도 아닌데 내가 좀 까막귀다; 어린날 남들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피아노학원을 때려쳤을 때 이미 이런 상태였다. 핑계를 궁리하자면 이렇다. 그때 우리집엔 피아노는 고사하고 멜로디언도 없어서 음악에 재능이 있던 언니조차 음악 시험은 다 리코더로 쳤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다니는 걸 보고 내가 졸랐던 건지, 하여간 나는 피아노학원을 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에 피아노가 있어도 연습이 그렇게 싫다는데, 나는 종이 건반을 두드리는 처지였으니 재미가 있을 리도 실력이 늘 리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매주 청음 시험은 나를 좌절의 늪으로 떨어뜨렸다. 선생님이 건반을 두드리면 오선지 카드에 음표를 그리는 거였는데, 나의 정답률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것도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는 아니었을까, 약간 애틋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래, 어쨌든 재능은 없었던 거다.

 

고등학교 때 음악 선생님은 학교를 통틀어 가장 엄격한 할아버지셨다. 음악시간은 언제나 클래식 감상으로 시작했고, 시험엔 늘 듣기 평가가 들어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선 시험범위에 해당되는 곡들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팔았다. 어리고 둔한 귀에도 음질은 엉망진창이었고, 듣기 평가의 정답률은 청음 시험의 경우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사지선다였으니까). 클래식 음악에 호감을 갖기엔 열악한 성장 조건이었다.

 

대학 때 종로 뮤직랜드에서 엉겁결에 산 컴필리에이션 카세트 테이프에서 처음 브란덴부르그 협주곡을 듣고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으면서도 '브란덴부르그'라는 말조차 외우지 못했다. 계기도 까먹었을 정도로 우연히 기든 크레머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 CD를 몇 장 사서 들으면서도 그것뿐이었다. 잠이 안 올 때 즐겨 들었던 글렌 굴드의 변주곡? 들으면서도 한동안 글렌 굴드가 사람 이름인지, 연주 형식 이름인지, 자.... 작곡가인지 연주자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악, 저 얼굴 빨개졌어요.)

 

그래서 누군가 클래식 애호를 자랑하면 공연히 (부끄럽습니다) 빈정이 상했다. 누구의 무슨 곡은 누구보단 누구 연주가 더 좋다거나, 역시 무슨 곡은 어디 필이 좋다거나 하는 말을 들으면 그래 뭐 어려서 교육 잘 받았나 보네, 그러거나 심하게는 흥, 알고 하는 소리겠어? 하기도 했다. 더 나쁜 것도 있다. 집앞 도서관에서 '오페라 감상 길잡이' 강연을 한다는 포스터를 보고는 뭐야 음악도 배워서 들으라는 거야? 하면서 못난이처럼 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창피하지만 후련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책 읽고 집안일 하고 하는 데도 소위 '노동요'가 필요해 아끼던 CD들을 들었는데, 온종일 틀어두기엔 역시 라디오가 좋았다. 광고도 피할 겸, 혹시 영어처럼 자꾸 들으면 귀가 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클래식 FM을 주로 듣는데 가끔 타령도 듣고 간지러운 퓨전 음악도 듣고 괜찮긴 하지만 그걸로 음악에 한 톨이라도 지식이 더 생기거나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주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어떤 연주가 서재방에서 뒹굴던 나를 거실 라디오 앞으로 불러세웠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아름답고 정직한 연주였다. 나는 처음으로 스마트폰에서 '음악 검색'이라는 것을 해서 그것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라는 것을 알았고, 연주가 끝나고 박수 소리가 잦아들도록 그렇게 서 있었다. 진행자 말로는 이 앨범에 수록된 곡 중 하나라 했다.

 

 

 

 

 

 

 

 

 

 

 

 

이렇게 해서 갈등 끝에 내 처지에서는 정말 큰 돈을 들여 이 음반을 사게 됐다. 아직 리뷰도 페이퍼도 쓰신 분이 없어서 땡스투도 못했다. 그래도 안 쓰고 간직해둔 알사탕을 몽땅 적립금으로 바꾸고, 음반 할인 쿠폰, 회원 쿠폰, 중고서점 이용하면서 어쩌다 받은 쿠폰, 모아둔 적립금을 탈탈 털어서 133,000원짜리 음반을 97,250원에 샀으니 돈 번 거라고 (ㅠㅠ) 애써 기뻐하고 있다. 내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싶으면 서둘러 중고서점에 내다 팔 책들을 찾는다. 뒤로는 아련히, 하루 한 장씩만 듣기로 한 켐프 할아버지의 연주가 흐른다. 라디오에서 들었을 때처럼 아름답고 정직하며 CD로 들으니 어쩐지 더 기품 있는 것 같은 그런 연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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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0-01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 네꼬님을 라디오 앞으로 끌어들인 피아노 소나타가 어떤 곡이었는지,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인지 궁금해지네요. 저도 낮에 FM 듣는 날 많거든요.

네꼬 2013-10-01 14:32   좋아요 0 | URL
나인님, 그때 곡은 안 적어놔서 모르겠어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였다는 것밖에.. (제 수준은 위에서 고백했지요. ㅎㅎ) 어느 순간엔가는 나인님이랑 같은 라디오를 듣고 있겠군요. :)

다락방 2013-10-01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땡투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이 음반을 살 돈도 돈이거니와 이 음악을 들을 귀가...쿨럭.

저는 지금 있는 부서로 오기 전에 사무실에서 라디오를 들었었거든요. 클래식 FM 듣다가 저도 완전 쑝가서 시디를 사게 된 경우가 있어요. 그 시디가 '비탈리'의 '샤콘느' 였는데, 그 시디야 말로 제가 제 돈 주고 산 유일한 클래식 시디였죠. 정말 열심히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역시 막귀라 그 음반에서도 그 곡만 열심히 들었....지금도 아는 클래식은 그것 뿐이고 그래서 좋아하는 클래식도 그것 뿐이에요. 너무 좋아요, 비탈리의 샤콘느!!

저는 2CD 였는데 아니, 네꼬님, 저 음반은 몇장 짜리인거에요? 클래식 듣는 네꼬님이라니. 좀 멋지다...♡

네꼬 2013-10-01 14:38   좋아요 0 | URL
그니까 이걸 누가... ㅠㅠ

다락님1 (일단 꺅.)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저도 좋은 음악 들으면 그냥 그것만 듣는 거지, 확장된 적이 없어요. 그러니 클래식이든 가수 노래든 내 마음은 다 똑같... 아니, 한결같다고 합시다. 이 씨디는 모두 9장에요. 케이스도 예쁘고 튼튼해서 뽀대나고, 일본에서 나온 앨범이라 일본어도 되게 많아요.(응?) 나 좀 멋짐? 크하하.

치니 2013-10-0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나 이 글을 읽고 받은 감동이 네꼬 님이 저 음반 듣고 받은 감동 만큼이나 커서, 주체가 안 될 정도로 좋아요, 지금.
하지만 가격대가 ㅠ 정말 세네요. 저는 나중에 생일 선물로 받으려고 찜해놨어요. 하하.
클래식 채널 라디오에서는 장일범인가? 그 분 거 좋던데. 가끔 들으면, 해박하면서도 내세우지 않고 차분하게, 클래식 모르는 이건 아는 이건 부담없이 들을 수 있게끔 잘 리드하시는 것 같아요.

작은오빠가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 써서 저는 중딩 때 오빠로부터 록의 역사를 들으며 자랐어요. 근데 그 오빠가 사십 대 넘어가더니 하는 말 - 모든 음악의 귀결은 클래식이다. 난 이제 클래식이 아니면 들을 수가 없어. !!!! 놀라우면서도 한편 납득이 되더라고요. (하지만 요새 다시 대중음악 듣게 되었다는 게 반전 ㅋㅋ)

네꼬 2013-10-01 14:43   좋아요 0 | URL
가격이 진짜 세죠. 들어본 적도 없는 호로비츠 실황 앨범을 케이스에 홀려 살 뻔 했는데 안 사길 천만 다행. ㅠㅠ 클래식은 부자들의 음악인가요! (씩씩) 아아 저도 장일범의 가정음악을 들어요. 오페라 소개할 때 막 성악가들이랑 같이 발연기하는 것도 웃기고, 맞아맞아 해박하면서도 잘난척하지 않고 조곤조곤 설명해주셔서 좋아요. 좀 귀여우시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 많은 소개곡들을 다 흘려들었습니다....)

작은오빠님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 ㅋㅋㅋ 저는 그럼 록은 패스하고 클래식으로. (나 나이 들었어!!)

Mephistopheles 2013-10-0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겠지만.....클래식만 주구장창 틀어주는 라디오 주파수도 있어용....그걸 활용해보시는 것도.. 그리고..형식에 얽매이지 마시고 그냥 귀에다 음악 감는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들으세요...ㅋㅋ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음악을 가요로 시작해 팝송으로 가고 락과 헤미메탈을 거치고 그다음에 결국은 클래식....마지막은 뽕짝으로 진행되더라고요..ㅋㅋ

전 이쯤에서 네꼬님의 노래실력은 과연......!!! (그리고 제 점수는요...!)

네꼬 2013-10-01 14:45   좋아요 0 | URL
남편이 그 주파수를 찾아 주어서 들어보았어요. 근데 주구장창 그것만 듣기보단 가끔 창도 듣고 타령도 듣고 가야금 거문고도 듣고... 합창도 듣고 하는 게 또 재미더라구요. 뭐, 가끔은 사람 목소리도 듣고, 몇 신지도 듣고요. ㅋㅋ

노래실력은 과연! 귀가 까막인데 목이라고 과연! 자진 사퇴하겠습니다. (팔뚝으로 눈물을 닦으며...)

레와 2013-10-0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을 위해 오늘부터 열심히 땡투하겠어요!!

작곡가가 누군지 연주자가 누군지 곡명은 뭔지, 아이고 머리 아파요.
그냥.. 들으면 안되나...ㅎㅎㅎㅎㅎㅎ;;;

네꼬 2013-10-01 14:50   좋아요 0 | URL
이 앨범은 비싸니까 틈틈이 다른 땡투를... (오열)
그래요 우리 그냥 들읍시다. 들어서 좋으면 됐지 뭘! (돈 생각도 잊읍시다. 또 오열.)

paviana 2013-10-01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도 막귀에요. 오디오나 연주가 차이도 잘 모르지만 , 그런거 구분해내는 사람들보면 막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요. 예전에 낮에 출근할 때눈 생생클래식을 들으며 출근했는데 ... 네꼬님도 막귀라서 좋아요 . ㅎㅎ

네꼬 2013-10-01 14:52   좋아요 0 | URL
빙고~ 저도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어요. 사실은.... 너무너무 얄미웠어요;; 내 비록 막귀지만 마음만은 순정하다오! (<-파비님아 왤케 오래간만이에요!)

다락방 2013-10-0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댓글들에 대해서..댓글 달기 되게 힘들것 같아요, 네꼬님. ㅎㅎㅎㅎ

네꼬 2013-10-01 14:53   좋아요 0 | URL
응? 머? 왜? ㅋㅋㅋ 다락님 밥 잘 먹었죠? 난 커피랑 아이스크림이랑 아껴놨지롱!

moonnight 2013-10-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용감하게 땡투하고 보관함에 넣었어요. 불끈 ;;(어, 얼마라구요? ㅠ_ㅠ)

네꼬님 글 읽으면서 막 공감을 ㅠ_ㅠ;;;;;;; 저도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을 졸라 다니긴 다녔으나 집에 피아노는 당연히 없고 종이건반에 연습을 하니 재미는 없고. 얼마 다니다 결국 때려쳤었지요. ㅠ_ㅠ
클래식이라 하면 좀 사는 집 애들이 듣는 거라고 생각하고 누가 클래식 얘기를 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혼자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했던 아픈 기억이. ㅠ_ㅠ;

그랬던 제가 이제는 하루 왼종일 클래식 에프엠을 틀어놓게 되었어요. 히히 ^^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잠자는 동안에도 침애 옆 작은 오디오로 약하게 틀어놓아요. 막귀에 음치, 박치라 -_- 음악 좋아한다는 말 꺼내기는 심히 부끄럽지만 (ㅠ_ㅠ) 그리고 사실 잘 알지는 못하지만요. 저도 에프엠 듣다가 어, 이거 뭐지 하며 편성표 검색해보고 그럴 때가 있어서 네꼬님 글이 너무 반가와요. 어떡해. 네꼬님 사랑해욧!!!! (격한 고백으로 갑자기 마무리;;;)

네꼬 2013-10-02 18:20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너무 무모하시다! ㅎㅎㅎㅎㅎ 그러나 절 위해 보관함에 담아 주시는 그 마음 잊지 않겠어요. (불끈)

저 지금 문나잇님 댓글 읽다가 어? 이거 내가 썼나? 했어요. 으왕 이거 완전 빙고네. 그런 마음 아시는 거죠 그쵸. 그리고 지금도 저랑 같은 마음이신 거죠 그쵸. 꺅. 우리 막 너무 죽 잘 맞는다 히히히히. 좋아라.

마노아 2013-10-0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사랑스러운 네꼬님의 이 앙탈 가득한 페이퍼라니, 좋아요, 좋아! 음악을 듣지 않고도 이미 그 음악에 빠진 것만 같아요.
음악 찾아주는 어플도 깔아야겠어요. 나도 이런 순간이 닥칠지도 모르잖아요. (>_<)

네꼬 2013-10-02 18:21   좋아요 0 | URL
아..아...앙탈요? 그렇게 좋게 말씀해주시니 몸둘 바를... (보통은 심술이라고 하던데...) 마노아님, 어플 아니고 포털 사이트에서 음악 검색했어요. 와 신기하게도 금방 찾아주더라고요. 좋은 세상이에요~

이순화 2013-10-2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와 같음. 음반을 사야겠음. 멜론에서도 서비스 될라나???

이순화 2013-10-23 13:3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소영 덕분에 캠프님 연주 영상을 찾아봤어. 고령의 모습으로 연주하는 것 그 자체가 감동이네...

네꼬 2013-10-28 15:30   좋아요 0 | URL
으헹 선배 언제 오셨어요? (제 서재에.) ㅎㅎ 멜론에서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원래 할아버지 연주자들한테 약해서.. ㅠㅠ 요즘 아껴서 아껴서 듣고 있는데 좋아요! 평생 두고 들을 음반으로 살 만해요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