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나는 도서관과 친하질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어떤 경로였는지 학교에서 보낸 바람에 구립 도서관에서 하는 독서 캠프에 참여한 게 아마 나와 도서관의 첫 만남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라고 쓰지만 수십년 전;; ) 책을 찾으려면 서랍 가득한 카드 목록을 뒤져야 했고, 서가에서는 눅눅하고 달달한 냄새가 났다. 한 일주일 정도 다니면서 책 찾는 법, 독후감 쓰는 법 같은 걸 배웠는데 참 재미가 없었다. 기억에 남는 인상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버스에서 내려 도서관 표지판을 보면서 도서관은 참 먼 데 있는 거구나 하고 생각한 것, 또 하나는 그곳 선생님이 (아마도 여러 종류의 글쓰기를 가르치다 그랬겠지) 편지 봉투에 주소 적는 법을 설명하면서 우체부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쓰면 좋겠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때 선생님의 가무잡잡한 얼굴과 긴 퍼머 머리, 진지한 표정이 어제 본 것처럼 생각난다. 왜냐. 선생님이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주소 대로 찾아오시면...(머뭇) 물이라도 한 잔 드릴게요." 라고 쓰라고 예를 들었는데 열한 살 네꼬의 생각에도 우체부 아저씨가 별로 좋아할 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난해?)

 

중고등학교 도서실은 별로 인상에 없고, 대학시절에도 도서관이 내겐 썩 좋은 곳이 아니었다. 꽤 넓고 책도 많았는데도 수업 참고 도서는 언제나 자리에 없었다. 다만 전공과 관련 없이 어린이책 서가는 제법 자주 찾았다. 나의 퍼스나콘 고양이도 그 서가에서 알게 되었다. 동화책을 빌려 전공 시간에 몰래 읽은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게 다다. 도서관 앞 건물에서 '케찹 양파 볶음 얹음'인 스파게티를 거의 날마다 사 먹었고, 시험 기간이면 혼자 도서관 옆 계단에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 대학시절 도서관은 그래서 그 바깥 풍경이 훨씬 선명하다.

 

*

 

지금 우리집 앞에 제법 큰 도서관이 있다. 걸어서 5분 거리. 거실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고개를 돌리면 도서관 간판(?)이 보인다. 이 집을 구했을 때 도서관이 가깝다는 게 남들한테 자랑거리였는데 사실 도서관에 간 적은 거의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는 곧잘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온다. 그림책을 쌓아 놓고 읽다 오는 날도 있고, 개 도감을 구경하다 오는 날도 있고, 필요할 땐 살짝 공부 비슷한 걸 하고 오기도 한다. 한참 더운 지난 며칠은 늘어져 있느라고 코앞 도서관에 갈 기운도 못 냈는데, 어제 오늘은 좀 다닐만 해서 공부하러 다녀왔다. 물론 나는 일관성 있는 사람이라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하기 싫으므로, 옆 자리에서 너무 저돌적으로 필기하며 공부하는 아가씨(책상이 울렸다) 때문에 신경 쓰여 자리를 옮겼다가, 역시 옆자리에서 땀냄새 풍기며 신문을 휙휙 넘겨 보는 아저씨 때문에 자리를 옮겼다가, 초집중해서 얌전히 공부하는 앞자리 학생 때문에 더이상 핑계댈 게 없어 시무룩했다가, 끝내는 공부하던 책을 덮고 서가 사이를 기웃거렸다. 한약에 대한 책들을 지나고 요가에 대한 책들을 지나고 회사원 매너에 대한 책들을 지나고 박물관에 대한 책들을 지나고 책에 대한 책들을 지나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방을 쌌다. 

 

나오는 길에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안경을 쓰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다. 로비에서는 초등학생 여자애 너댓 명이 저희끼리 와서는 까치발을 하고 회원 카드를 작성하고  있었다. 안내하는 청년이 보일듯 말듯 웃으면서 여기에 주소를, 여기에 이름을 적으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햇볕을 조금이라도 덜 쬐려고(나는 소중하니까) 지하로 해서 도서관을 나서려는데, 여태 밖에서 뛰어놀았던 게 분명한 초등학교 5,6학년 쯤 되어 보이는 건달, 아니 남자 어린이들이 지하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 둘이 재잘거리면서, 손가락으로 긴 생머리를 경쟁적으로 빗어내리면서 지하를 통해(역시 소중하니까)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예로부터 도서관과 친하지 않았던 나는 이제 생각해본다. 도서관은 좋은 곳일까? 정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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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8-2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에~ 도서관은 좋은 곳 맞아요!^^
요즘은 마을마다 작은도서관까지 있으니 예전보다 많이 가까워져 친하게 지내기 좋아요.
네고님 페이퍼는 언제나 좋아요, 라고 쓰고 '옳아요'라고 읽어요!!!

네꼬 2013-08-23 17:19   좋아요 0 | URL
옳긴요 ㅎㅎ 그런 말은 저랑 어울리지 않아요!!
마을 도서관도 좋고, 저희 집 앞 공공도서관도 좋고 다 좋아요.
구경하면 더 좋고요. ㅋㅋ

세실 2013-08-23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대한 인식도, 수준도 많이 좋아졌지요^^
좋은 프로그램도 많이 한답니다.

네꼬 2013-08-23 17:20   좋아요 0 | URL
역시 세실님 ㅎㅎ
저희 집앞 도서관에도 좋은 프로그램이 많아요.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것도 좋고, 심지어 독서동아리 회원들이 막 새벽에 모여서 토론하고 그래요. (이 열심들...)


게으른 건 저뿐인가 봐요. ㅠㅠ

다락방 2013-08-2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도서관을 가 본 일이 거의 없어요. 이 날까지 살면서 다섯 번쯤 갔으려나... 여튼, 대학시절에도 3학년때까지는 도서관 출입을 안하다가 4학년 때 친구와 한 번 학교 도서관 갔다가, 그 다음에 두번째는 혼자 갔거든요.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구경을 간 거였어요. 그런데....길을 잃었지 뭡니까!! 출구를 못찾겠는거에요. 출구가 안나와요. 꽥!!

결국 친구한테 전화하고 어떤 책들이 있는지 불러주고 나서 친구가 너 거기 꼼짝말고 있으라고 찾아가겠다고 해서 정말 거기 꼼짝않고 있었더랬어요. 하아-

난 도서관 이란 말만 들으면 그 기억이 자꾸 떠올라요. 휴..

네꼬 2013-08-23 17:22   좋아요 0 | URL
꽥! 출구가 안 나와! 정도가 되어야 도서관이죠. ㅎㅎ 도서관에서는 멀미 한번 해야 제맛. (뭐래.) 그 에피소드 재밌네요. 무슨 책 있는지를 보고 찾아 오는 친구 얘기.

서점은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도서관이라면 한숨이 나오는 당신이란 여자. ㅎㅎ

Mephistopheles 2013-08-2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책을 읽고 접하는 공간이라기 보다 수험생들이 득시글거리는 시기를 거쳐 왔기 때문에 사실 좋은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더군요. (그런데 개는 언제 나와요? 개요..개...!!)

네꼬 2013-08-23 17:27   좋아요 0 | URL
메피님, 요새 도서관도 수험생은 많은데, 그냥 저냥 책 보고 잡지 보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서 재밌더라고요. 사람 구경하러 가는 것도 있어요.

글쎄 좀 기다려 보세요. 이번 주말에 개 한 마리 풀게요. (에헴..)

레와 2013-09-10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글은 신기해요.
단어를 따라 눈으로 걸어가면 마치 내가 네꼬님 곁에 있는 것 같아요. 히히히히


대학 다닐때 한동안은 학교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도서관 자리 잡기였어요. 네. 저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만 엎어져 잤던 시간이 더 많았어요. 도서관을 그렇게 다녔는데, 책을 읽었던 적은 거의 없어요. 맨날 숙제만했다는. 대학생이였는데!!ㅋㅋㅋㅋ

아, 우리 학교 도서관은 학교 꼭대기에 있었어요. 산행을 해야했어요. 그래서 중앙도서관엔 예비역들만 바글바글. ㅋㅋ 아침 일찍 올라가면 저기 바닷가에서 뱃고동 소리도 들렸어요. 계단을 다 올라가 뒤돌아 보면 저 멀리 바다가 보여요. 참 좋았는데..
졸업할땐 중간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그 풍경 조져놨어요 아놔.... ㅡ.ㅜ

근데 나 왜 이렇게 말이 많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3-08-23 11:08   좋아요 0 | URL
조져놨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꼬 2013-08-23 17:26   좋아요 0 | URL
레와님, 잘 따라 오고 있어요? 내가 글자 깔아 놓을 테니 잘 밟고 따라 와요. ㅎㅎ 귀여운 레와님. 어찌 그렇소? 아이고. 이뻐.

맞아. 나도 자리 열심히 잡았는데. 근데 열심히 그래 노력은 했는데 잘 잡지는 못했어요. 게..게... 게을러 가지고. 그나저나 그 도서관은 멋지네요.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도서관이라니, 어머, 나 설레요..라고 쓰려 했는데... 풍경 조진 아파트...(다락님아, 조지다는 국어원에 등록된 말이라구. 웃지 마요. 웃지 마. 웃지 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해한모리군 2013-08-23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은 시원하고, 요즘 어린이 도서관들을 좀 다녀보니 아늑하기까지 하더라구요.
아.. 저도 대학다닐때는 도서관에서 공부외에 다른건 많이 해봤는데 ㅋㄷㅋㄷ

네꼬 2013-08-23 17: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에어컨의 은혜를 입으러 가요, 저도. 간 김에 사람들 구경도 하고. 도서관에서 다른 거 뭐요? 저처럼 케찹 볶음 스파게티 먹는 거? 맥주 마시는 거? 낮잠? ㅎㅎ (난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한 친구가 없어요. ㅋㅋㅋㅋ)

밤의숲 2013-08-2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마음에 드는 도서관 찾기가 너무 힘들어요. 우리 동네 도서관 역시 애새끼들이 시험공부하러 오는 데거나 주말에 마음붙일 곳 없는 아저씨들이 손으로 맨발 만지면서 신문 보는 데라 너무 싫어요. 최근에.. 이진아기념도서관이 좋다고 해서 꾸역꾸역 찾아가봤는데 거기도 생각보다 좁아서 탈락... (저 왜 이렇게 까다로움? ㅜㅜ) 제가 가본 도서관으로는 서강대 로욜라 도서관이 짱.
네꼬님, 글 좀 자주 올려주세용. ㅎㅎ

네꼬 2013-09-04 16:12   좋아요 0 | URL
으앗, 이 댓글을 못 봤네요. 동네 도서관은 아무래도 그렇죠. 저희 도서관도 그래요. ㅎㅎ (애들.. ㅋㅋㅋ) 근데 그래도 저는 구경 삼아 가니까 또 좋더라고요. 서강대 도서관은 너무 학구적이지 않나요? @_@ 밤의숲님 그런 분이시구나! ㅎㅎ

moonnight 2013-09-0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학교 다닐 때는 도서관은 책 읽는 곳이라기보다는 시험기간에 공부하는 곳이어서 좋은 기억이 없어요. ㅠ_ㅠ(사실 가 본 적도 몇 번 없;;;)

그러고보니 멋도 모르는 신입생 때 중간고사기간에 친구가 중앙도서관 자리맡아달라해서 맡아줬다가 건방지게 자리 맡아놨다고 뻔뻔스럽다 그랬던가 이기적이라 그랬던가 3학년이라는 여자분에게 엄청 혼났던 트라우마가 있네요. 늦게 온 친구는 자리 안 맡아놨다고 또 짜증냈다는 -_-;;;;;; 그 이후로 도서관과는 빠빠이했던 것 같아요. 흑. ㅠ_ㅠ

작고 예쁘고 조용한 도서관에서 실컷 재미있는 책 읽는 걸로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싶어요. ㅎㅎ


네꼬 2013-09-06 23:03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문나잇님, 하하하 그래요그래 문나잇님이 옛날에도 문나잇님이었을 테니까.. 하하하하 웃어서 죄송하지만, 왠지 그때의 문나잇님이 지금이랑 겹쳐져서... 어유 착해라. 어유 순해라. 내가 그 친구도, 그 3학년도 만나면 혼쭐을 내줄게요! 트라우마는 나의 복수로 극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