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4년 전, 회사를 옮긴 첫 해 건강검진 때 난생 처음으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괴로운 검사라며 촬영으로 하는 검사를 권하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내시경 검사라는 것도 궁금하고 내 위도 궁금해서 자진한 터였다. 그래도 목으로 해서 넣는 건데 뭐 굵어봤자.... 라고 생각했다가 막상 눈앞에 등장한 관을 보고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내 기억 속의 그 때 내시경관은 최소한 츄파춥스 알만 했다. '이건 목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잖'까지 생각했을 때부터 참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짐승이 되어.... (이하 생략)   

그뒤 매년 건강검진 때마다 '나중에 수면내시경으로 하겠다'고 말만 하고 미루어온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맨정신에. 검사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나 말고도 네 명이나 있어 위로가 되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받는 일반적인 검사니까 뭐. 그런데 알고 보니 나를 제외하고 네 사람이 모두 수면내시경을 받는 거였다. 이미 주사도 맞았고 목에 마취 스프레이도 뿌렸고 내 이름은 불렸고 손쓸 사이 없이 나는 침대에 눕혀졌다. 아아, 지금부터 10분은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이야. 그럭저럭 5분 안에 검사가 끝났고 이상하게도 4년 전보다는 훨씬 견딜 만했다. (그렇다고 짐승이 안 된 건 아니에요.)

그가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울고, 웃다가 울라면 웃다가 울었다. 매일 저녁 지붕뚫고 하이킥이 끝나고 나면 동거녀와 나는 '우리는 김병욱 감독의 노예인가!' 하는 탄식을 합창했다. 그랬던 드라마가 끝나는 것만도 서러운데 이런 엔딩이라니. 그 안에 담긴 철학과 예술이 깊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내가 받은 상처는 어찌할 것인가. 개연성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울고 웃으며 따뜻해하던 시간들이 결국은 다 비극의 준비 기간이었다니. 이제 다시는 하이킥 재방송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미학적 성취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지난 사랑과 추억을 부정당하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희망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데, 그건 감독님이 아니어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우릴 웃기지나 말지. 그렇게 잘 만들어서 나를 그 세계에 살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사실은 전체적으로 굉장한 비극이었어라고 말씀하시면 어쩌라고. 처음부터 감독님이 창조한 세계였으니 그것을 허물거나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것도 감독님의 몫인  건 맞다. 다만 나는 슬픔을 머금고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울고 웃고 소리지르고 화내고 안쓰러워했던 시간들, 이제 내겐 이 세상에 없는 시간.  

나는 차라리 순발력이 있으면 있었지 지구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순발력을 요하는 일을 오래 하다보니 지구력이 딸려서 더는 못하겠다. (응?) 마침 동료와 업무 내용을 맞바꿀 때가 되었다. 쑥스럽게도 전해줄 건 별로 없고 ("그냥 뭐 되는 대로 그때그때 판단해서 잘 하면 돼"로 요약), 일하면서 새로 배워갈 건 너무 많아 걱정이 앞선다. 거의 새로 입사한 기분이랄까. 그래서 기왕 그런 거, 정말 새로 출근하는 마음을 가져보려고 휴가를 냈다. (...-_- 쫌 이상?) 그래 봐야 월화수 3일이지만 나는 시간을 흥청망청 쓰기로 마음먹었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을 갖추는 데 그만한 여유는 나에게 주어야 하지 않나. 그 3일은 내겐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이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치니 2010-03-25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야모야, 3일간 흥청망청이라니, 이런 염장질하는 고양이라니욧!
(지붕킥, 대체로 공감, 하지만 전 그래도 김병욱 감독이 좋아요. 아 이넘의 편애)

네꼬 2010-03-29 00:56   좋아요 0 | URL
흥청망청 전에 우선 좀 놀고 왔어요.(쓰고 보니 어딘가 어색하고 좋으네요.) 하하, 염장질은 최근 페이퍼가 최고.. -_- 저도 김병욱 감독님을 미워하진 않아요....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제일 속상해요. 으앙.

다락방 2010-03-25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왜 페이퍼를 자주 안쓰는겁니까!

네꼬 2010-03-29 00:56   좋아요 0 | URL
이제 자주 쓰겠다는 거 아닙니까!!

다락방 2010-03-25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일간 흥청망청은 아 완전 부럽 ㅠㅠ

네꼬 2010-03-29 00:57   좋아요 0 | URL
다락님, 근데 나 진짜 아무 계획 없어요. 굳이 계획이라면 파마를 하겠다, 미니스커트를 사겠다 정도? 예쁜 옷 사 입고 있을 테니 꽃 피면 만납시다!

무스탕 2010-03-25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병욱 감독님. 감독님은 빵꾸똥꾸야!!! 라고 소리질러주세요. ㅎㅎ
저도 아직 위내시경을 한 번도 안해봤어요. 작년에 장내시경은 해 봤지만요. 저도 겁나서 수면내시경으로 했더니 까무라친동안 뭔 일이 있었고 내 대장속이 이렇다고 보여주고 증거사진도 주더군요 -_-;;
흥청망청 3일을 뭐 하며 어떻게 흐트러 지실건지 심히 궁금하외다.

네꼬 2010-03-29 00:58   좋아요 0 | URL
어우, "빵꾸똥꾸야" 소리 질리서 속이 풀린다면 백 번은 질렀겠어요. ㅠㅠ

이번에 위내시경을 하면서 생각했는데요, 음, 만에 하나 장내시경을 할 일이 생긴다면 그거야말로 수면내시경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흥청망청 3일은 보고서 따로 올리겠습니다요.

2010-03-25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0-03-2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시적인 페이퍼라니!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을 우리에게 나눠주세요!!

네꼬 2010-03-29 01:00   좋아요 0 | URL
아아, 이런 것을 시적이라고 하신다니... 긴 겨울밤 한 부분을 크게 베어내 님 오신 날 펼치겠다는 황진이가 떠올라요. (뭔소리) 자자, 제가 쓴 시간은 차후에 보고서 올리겠습니다요2.

nada 2010-03-2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붕킥 빠였다면 아마 지금쯤 머리 풀고 꽃 한 송이 물고 멍때리고 있을 듯해요.
성격상, 7개월 간 정을 준 대상이 신기루처럼 허물어졌을 때 멀쩡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닐 거 같거든요.
그걸 생각하면 이 대규모 공황 사태에 나는 방관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이게 몹시 서러운 거예요.
그동안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흥분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상실감이든 공황이든 같이 할 수 없다는 게 사람 쓸쓸하게 만들잖아요!
망자와 아무 추억도 없는 의례적인 조문객이 된 기분이랄까.
제가 위로한들 네꼬씨 휑한 마음이 채워지겠냐고요. 에휴.


3일 휴가라니! 3일 휴가라니!
오오 너무 황홀하고 달콤하게 들려요.
부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네꼬 2010-03-29 01:02   좋아요 0 | URL
그렇다니까요. 이게 무슨 실연당한 여자도 아니고.. 이해가 갔다가 서운했다가 미웠다가 안쓰러웠다가.. 그러고 있어요. 이제부터 간 작은 사람들은 시트콤조차 마음 놓고 볼 수 없는 건가요? 응? 꼬장배추님, 무슨 세상이 이렇다요? ㅠㅠ 이럴 땐 꼬장배추님이라도 방관하고 계셔주는 게 마음이 놓여요. 내가 그 긴 세월들을 잊고 모른척 일상에 복귀할 수 있게. ㅠㅠ (나 정말 지붕킥 사랑했다고요. ㅠㅠ)

부러워도 할 수 없어요. 부러우면 직장생활 하시든가, 그래야 휴가가 있지. 흥. (전혀 성립 안 되는 콧방귀구나.)

2010-03-28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0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30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4-10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차라리 순발력이 있으면 있었지 지구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순발력을 요하는 일을 오래 하다보니 지구력이 딸려서 더는 못하겠다.
이말에 심하게 감정이입하고 있습니다ㅋㅋ
새 직원에게 염장지르는 추가멘트~
"그냥 뭐 되는 대로 그때그때 판단해서 잘~~ 하면 되, 다만 잘 안되었을 때는 니가 욕먹을 각오로..."

네꼬 2010-04-14 12:00   좋아요 0 | URL
아시는군요, 이 마음을!!!!! 반갑습니다. (악수 흔들흔들~) 네네, 그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욕은 제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