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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평점 :
꼭꼭 씹어 먹듯 읽을 책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 성격상 어쩔 수 없이 배아파하며 읽게 되는 남의 여행기에 이토록 두근거릴 수 있나. 어쩔 수 없이 크게든 작게든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독서기가 이렇게 나를 지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나. 거의 항상 뜬구름 잡기가 되기 십상인 음반과 영화 소개가, 이토록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나. 때로는 너무 삐딱하고 때로는 대책없이 순진하며(아니 그 차에 탄 사람들이 누구일 줄 알고 덥석 낯선 승합차에 올라탄답니까? 사람 가슴 졸이게 참!) 대체로 완벽하게 주관적인 이 책은, 이미 많은 독자들이 말했듯 여행기가 아니라 산문집에 가깝다. 그리고 내가 이때까지 읽어온 어느 여행기보다도 재미있고 아름답다. 저자처럼 삐딱하고 순진하고 주관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빌 브라이슨보다 요네하라 마리보다 훨씬 나를 즐겁게 한 여행기였다. 제일 마음에 든 점은 저자가 전혀 잘난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카프카를 안쓰러운 동네 청년으로, 지젝을 참 별난 옆집 할아버지로 느끼게 하는 이 천진한 눈과 입을 보라지. 동유럽의 나라들 뿐 아니라 다양한 책과 영화, 음반의 세계를 종횡무진 헤엄치는 필자를 만난 기쁨이 나를 벅차게 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작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 "인생을 긍정하고 찬미할 줄 아는 천성"(143면)이라면, 저자도 참 좋은 작가의 천성을 갖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오바를 마다 않고 늘 끈적이며 감상이 많고 잔걱정이 많은 글이니, '쿨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들춰볼 생각도 않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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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기도 참 잘 만들었다. 저자가 읽고 보고 들은 책과 영화, 음악에 대한 설명을 각주로 처리하고, 각주 표시조차도 보일 듯 말 듯 한 세심한 편집도 마음에 든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저자의 산문을 읽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고, 원한다면 각주만 모아서 읽어도 좋은 읽을거리가 된다. 많은 여행서들이 그렇듯이 사진도 꽤 실었는데 이게 또 맘에 드는 것이, 아는 사람이 보면 모를까 나같은 사람이 봐서는 본문과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진들이다. 글은 촘촘하고 사진은 성기다. 얼마나 괜찮은 조합인가. 다만 수사가 너무 많아 이건 좀 걸러줬어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시 봐도 참 말 되는 비유들이라 뭘 덜고 뭘 남겨둬야 하나 고민됐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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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는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여행자가 있다"는 문장이 쓰여있다. 그럴듯하긴 한데, 사실은 어느정도만 맞는 말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윤미나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