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캐롤을 좋아하는데, <울면안돼> <징글벨> <홀리 졸리 크리스마스> 등과 함께 상위에 랭크된 노래로 <아이 위시 유 어 메리 크리스마스>가 있다. 이 노래가 내 입에는 "위 위시 유 어 메리 크리스마스"로 붙어 있는데(아마 아이로도 부르고 위로도 부르는 거겠지요), 그건 고등학교 때의 기억 때문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가톨릭계였다. 교장선생님이 수녀님이셨고, 학교에 성당과 수녀원이 있었다. 일년에 두 번, 부활절과 성탄절에 즈음해서는 전교생이 모여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은 이런 저런 행사로 학생들에게 친숙하고 인기가 많은 분이셔서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별 부담 없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내 기억이다.) 그중 성탄절 미사에는 특별한 코너가 있었다. 각 반에서 '한 해 동안 제일 고마웠던 친구'로 뽑힌 아이들이 하는 연극이었다.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 뜻밖의 인물이 무대에 등장하곤 했다. (뜻밖의 인물이면서도 한 번도 뽑히지 못한 나는 3년 내내 질투로 눈에 화염이 일었다. 아이고 내 눈이야.) 전교생과 선생님들이 하나 하나 그들의 얼굴을 보았고 연극 끝에는 박수와 환호로 감사를 전했다. 배우들이 인사를 마치면 전교생이 일제히 뒤를 돌아 선생님들과 마주보았다. 그리고 <위 위시 유 어 메리 크리스마스>를 선생님들께 불러드렸다. 속 좁고 샘 많은 여고생 네꼬조차도 그 순간에는 따뜻한 기운으로 몸과 마음을 적셨다.  

그 밖에도 사소하고 많은 추억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좋아한다. 전통과 예절, 훈육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학교였지만, 동시에 체벌 대신 반성문을 쓰게 하고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학생회에 투표가 살아있는, 또한 축제가 살아있는 따뜻한 학교였다. 중학교 때까지 선생한테 매맞는 데 익숙했던 '불량아'들이 이따금 선생님 품 안에서 울기도 하는 그런 학교였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기억이다. 어떤 아이는 강제 미사가 싫었을 거고, 친구 뽑기를 싫어할 이유도 많았으며, 엄한 교복 단속과 앞치마를 두른 청소시간, 히스테리컬한 무용 선생을 증오한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시간을 지내고도 기억은 그렇게 다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같은 시간을 따뜻하게 기억할 수 있는 내 처지는 어쨌든 다행인 것 같다.  

찾아보니 내가 지난해에 마지막으로 쓴 페이퍼에 쓴 바람은 '내년이 특별할 것 없는 보편적인 한 해가 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색하게도 벽두부터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다. 너무 많은 분노가, 너무 많은 이별이, 너무 많은 눈물이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 그 많은 이름을 적었다가 너무 아파 지운다. 누군가 지난 가을, 이제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2009년은 슬펐던 해로 기억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모두의 기억은 다르게 마련이니, 2009년을 보편적인 해로 기억할 수 있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겠지. 내 친구들 중 누군가가 그렇다고 해도 모쪼록 내가 끝까지 그것을 모르고 넘어가기를.   

그래도 내게는 같이 울었던 사람과, 사람들이 있다. 내년에도 손을 잡을 사람과, 사람들이 있다. 아주 죽으란 법은 없구나, 생각하게 하는 사람과 사람들이. 친구 여러분의 험했던 한 해에 나도 그런 사람이자 사람들 중 하나였기를 어느 때보다 깊고 진실된 마음으로 바란다. 당연히 내년에도 그렇기를. 친구 여러분 고마웠어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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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29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 투입니다 내년엔 고등어가지고 약 조금 올릴께요 네꼬님..

네꼬 2009-12-29 13:14   좋아요 0 | URL
내년엔 메피님이 나 몇번 놀리나 바를정자 그으며 세어 보겠어요. ㅎㅎ 메피님, 새해에도 사이 좋게 지내요!

무해한모리군 2009-12-2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저도 잘부탁드립니다.
내년은 정말 무탈한 한해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네꼬 2009-12-29 13:27   좋아요 0 | URL
일본에 다녀온 휘모리님(응?)
우리 내년에는 더 자주 만나고 (어디서든!) 술도 더 많이 먹어요 (이건 만나서. ㅎㅎ) 새해 무탈을 함께 빌어요.

다락방 2009-12-29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학교를 다녀서 네꼬님은 좋은 어른이 된것일까요? 내가 이모양 이꼴이 된건 학교탓일까요? 끙. 네꼬님의 고등학교시절이 부러워요.

저는 네꼬님의 '내년에도 손을 잡을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말이죠. 저는 알라딘을 하면서 네꼬님을 만나고 또 네꼬님과의 그 많은 수다들을 결코 잊을 수 없을거에요. 네꼬님이 뭐라 하든 나는 계속 계속 네꼬님께 손을 내밀거에요. 불끈!

네꼬 2009-12-30 17:46   좋아요 0 | URL
좋은 학교를 나와도 이렇게 살고 있는 저로선;;;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하고 또한 섹시한 다락님. 내년에는 우리 더 많은 술을 마시고 더 많은 수다를 떨기로 해요. 우린 계속 계속 친구니까!!!

보석 2009-12-2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꼬 2009-12-30 17:46   좋아요 0 | URL
어이쿠, 보석님, 제가 내년엔 더 반짝이게 닦아드릴게요. (응?)

치니 2009-12-2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고 대학이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시절. 암흑기 같기만 한데, 네꼬님이 기억하고 묘사하는 학교는 마치 외국의 어떤 영화에 나오는 보수적이면서도 정이 있는 학교 같아요.
내년 뿐입니까, 오래 오래 잘 지내자고요. 헤헤. :)

네꼬 2009-12-30 17:51   좋아요 0 | URL
치니님, 오늘 어떤 원고에서 치니님을 떠올렸어요.

학교에 대한 기억을 좋게 간직할 수 있는 것도 아주 큰 행운이지요. 고3시절조차 제 기억 속에선 아주 따뜻합니다. (^^) 치니님, 오래오래, 치니님한테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히히.

레와 2009-12-29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2010년에는 친하게 지내요.. 헤헤.^^

네꼬 2009-12-30 17:51   좋아요 0 | URL
레와님,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내년에는 더욱 친하게 지내요. 제가 더 자주 갈게요!

쟈니 2009-12-30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는 웃을 일이 많은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

네꼬 2009-12-30 17:59   좋아요 0 | URL
쟈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내년에는 많이 웃어요. 혹시 울더라도 꼭 같이 울어요! (^^)

도넛공주 2010-01-0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부탁드리고~저한테 잘 보이시고~
지금 프랑슨데 잘 보이면 불란서제 편지나 선물이 갈지도?

네꼬 2010-01-04 11:15   좋아요 0 | URL
공주님 드뎌!!! 어쩐지 공주님이 프랑스에 계신다니 우아하고 멋진 기분. (^^) 새해에 잘 부탁드려요. 편지는 보내주시면 감사하지만... 한글로 쓰실 거죠? ㅎㅎ

여긴 오늘 눈이 산처럼 왔어요. (거짓말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