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영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조차 중력 같은 것의 지배를 받지만 “오직 은총만이 예외”라는 첫 문장부터 이 뻔뻔한 명상에 매료되었다. 이 책은 고요히 생각해보아라, 네 안의 신을 만나라, 신은 너를 사랑하니 용기를 내라, 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성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정리할 뿐이다. 지성은 천박한 일에만 적합하다”고 오만하게 단언하면서, 고통을 주는 신을, 이기적이고 무심한 신을, 너를 노예처럼 부리는 신을 닥치고 섬기라고 한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람을 납작 엎드리게 하다못해 심지어 처참한 기분이 들게 하면서도 한 문장 한 문장 눈부시게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 책을, 밑줄을 그어가며 아껴 읽고 있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는 신이 언제 찾아왔던가 생각해본다. 유아세례를 받았을 때? 첫 영성체 때? 견진 성사 때? 아니,  



심장이 조각났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안아준 친구가 내 머리카락에서조차 메마른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했을 때, ‘치욕’을 느끼며 번 돈이 한순간 사라졌을 때, 나쁜 남자가 너무 나쁜 방식으로 나를 떠났을 때, 가족이 찢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링거를 꽂은 채로 병원 화장실에서 혼자 토할 때, 딴 생각을 하려고 내가 내 살을 잡아 뜯을 때, 따뜻한 것은 아무것도 입에 대고 싶지 않던 때, 밤마다 아침에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잠이 들던 때, 그러니까 내가 손톱에 피가 나도록 기를 쓰고 벼랑을 기어오를 때마다 누군가 자꾸만 다시 밀어 떨어뜨린다고 생각했을 때,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것을 보니 진짜로 신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고, 이를 갈았다. 그러다 신이 얼마나 외로우면 자기 좀 봐 달라고 이렇게 나를 쿡쿡 찔러대나 하는 생각도 했다. 신은 그렇게 내가 숭숭 구멍이 났을 때 그 빈자리들을 채우러 왔다. 현명하고 예민하며 질투하는 신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찾아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내가 느낀 신에 대한 서운함은 신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신이 자비롭다는 오해.  

 

   
 
피할 수 없는 필연, 비참, 곤궁, 지쳐 메마르게 하는 노동, 짓누르는 결핍의 무게, 잔인함, 고문과도 같은 괴로움, 갑작스러운 죽음, 강제, 공포, 질병들. 이 모든 것이 신의 사랑이다. 신이 사랑을 통해 우리로부터 멀리 물러서야만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물질의 보호 없이 신의 사랑에 직접 노출된다면 우리는 햇볕을 받은 물처럼 증발되어 버릴 것이다.

‘신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힘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든 신이 될 것이다. (59면)
 
   


*

 

   
  절망의 효능은 이렇게 우리를 미래와 단절시키는 것이다. (39면)  
   

 
돌아보면 나는 두려울 때 씩씩해졌고, 외로울 때 다정해졌다. 단점이 구천 구백 개인데도 내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거다. 나란 사람은 얼마나 멋진가! (얼씨구) 그러니 네꼬 씨, 너무 걱정하지 말자. 사람은 어려울 때 강해지는 법이다. 사랑은 어려울 때 강해지는 법이다.

 

*
 

[딴 얘기] 알라딘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오히려 알라딘 밖에서 들었다. 서로 주고받는 상처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 말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비겁한 것처럼 만드는 것도 속상하다. 그러나 때로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나름의 방법으로 싸우기도 해야 된다는 것은 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나는 쿨한 것도, 쿨한 척하는 것도(그거나 그거나) 싫다. 이 와중에 내가 좋아하는 핫한, 그래서 때로 동의하기 어렵고 불편할 때도 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서재가 닫힐락 말락 하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09-10-20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멋져요.

레와 2009-10-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페이퍼도 추천, 태그도 추천합니다! ^^

프레이야 2009-10-2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추천 열다섯 개 누르고 싶은 페이퍼에요.
흑흑.. 신은 저를 너무 질투해요.

다락방 2009-10-2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사랑해요 ♡

마노아 2009-10-2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에게는 위로의 은총이 있어요. 위로해주는 고양이라니, 너무 따뜻하잖아요..

네꼬 2009-10-20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 네꼬 네꼬 네꼬 네꼬, 와 다섯 분이 연달아 불러주셨어요. 신나라! (왕단순)

2009-10-21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1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라비스 2009-11-20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저더러 "시몬느 베이유같다"고 한 친구가 있었어요.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 덕분에 읽은 중력과 은총은 제게 은총이라고 할밖에는... 아직도 젤 가슴아프게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랍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 리뷰를 따라오다가 네코님을 알라딘 서재에서도 만나게 되었네요^^ 앞으로 우리 친구해요^^;;

네꼬 2009-11-23 12:04   좋아요 0 | URL
아라비스님, 안녕하세요? (^^) 아니 시몬느 베이유 같다면 무지무지 지적인 것 같은데!! @_@ 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좀 (많이) 멀지만, 그래도 친구를 해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환영이에요. ^^

잘잘라 2010-06-2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나의 질투하는 신' 페이퍼 추천수 삼땡 만들어드렸어요^^
저 이뿌죠^^ <중력과 은총> 땡스투~ 저도 읽어보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