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1등 한번 안 해본 사람 찾기 어렵듯이, 한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일 줄 아는데, 나도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다. 우리 네 식구가 전전한 셋방은 그 종류가 꽤 다양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유독 한 집이 각별하다.
그 집은 길 위에 있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 집은 대문이 없었다. 길가에 닿은 현관의 자물쇠를 열면 바로 부엌이 나왔고 바로 방이 들여다보였다. 겨울에도 찬물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 집, 세탁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집에 이따금 주인집 아저씨가 다녀가고 나면 엄마는 온종일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끄러울 만도 했는데 이상하게 별로 그렇진 않았다. 친구들을 데려와 같이 라면도 끓여 먹고 TV도 보고 잘 놀았다.
나를 괴롭힌 건 다른 데 있었다. 그건 바로, 도둑이 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었다. 어떤 도둑이라도 맘만 먹으면 들어올 수 있는 집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어떤 도둑도 눈여겨보지 않을 집이기도 했지만, 그땐 밤마다 불안해서 잠을 못 잘 지경이었다. 열한살, 열두살, 그때 내 나이가 그랬다. 어려서부터 눈치가 빤했던 나는 그 불면의 이유를 부모님께 절대 말하지 않았다. 목이 꽉 메어 억지로 잠을 청하면서 내가 바란 것은 단 한 가지, 대문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이었다.
그 꿈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알게 된 것은, 엄마와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오던 어느 겨울, 명동성당 앞에서 비닐 천막을 치고 거주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철거민들을 보았을 때였다. 비닐 천막 위에 얼기설기 천을 씌운 가건물 안에서 아기가 빽빽 울고 있었다. 그 충격에 나는 그날밤부터 아예 소원을 바꾸기로 했다.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말이 실현되지 않기를, 주인집에서 우리집에 자꾸 찾아오지 않기를, 우리를 지켜주는 저 시멘트 벽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느라고 어린 네꼬의 밤은 길고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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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진 것은 시너밖에 없던 사람들이, 그들의 마지막 '일터'였던 초라한 가건물에서, 죽었다. 이른 아침 시내 한복판에서 불길에 싸인 얄팍한 상자 같은 건물. 밖에서는 그들의 동료가 저 안에 사람이 있다고 온몸으로 울부짖었다. 경찰 관계자의 기자회견을 보니, "왜 이렇게 불이 커졌을까요?"라는 질문에 "시너를 안 갖고 들어갔으면 괜찮았죠."라는 답이 돌아온다. 태어나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살의를 느꼈다. 남대문이 불타는 것을 넋 놓고 보아야 했듯, 오늘도 나는 그 불길을 지켜보기만 했다. 국가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있는 걸까. 슬프고 참담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는 꼭 적어두어야 할 것 같아서 오늘이 가기 전에 쓴다. 오늘은 2009년 1월 20일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