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간교한 눈속임이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면서도 SK의 이미지광고가 새로 나올 때마다 나는 눈물과 사투를 벌인다. 감히 비틀즈의 렛잇비를 저렇게 써먹다니, 돈이면 다냐!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사람을 향합니다’라는 카피가 뜰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고등학교 때까지 내 소원 중 하나는 LP를 실컷 사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CD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건 아예 신경도 안 썼다. 대학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받은 돈을 LP 사는 데 다 써버리겠다고 결심도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대학생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레코드샵에서 LP가 싹 사라져버렸다. (종로에 있던 신나라 레코드에서 망연자실 서 있는 네꼬 씨 영상.) 충격으로 한동안 음악을 멀리 했다. 그렇다고 고집을 피워 LP 마니아를 자처할 정도로 부지런한 것도 아니어서, 할 수 없이 CD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마집 내 방엔 아직도 턴테이블과 몇 장의 LP가 남아있다.) 이런 처지이다 보니 MP3를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 CD플레이어는 납작하고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미련 맞게 그걸 들고 다닌다. 가방에 CD를 가득 넣고 다니다가 지하철 역 같은 데서 갈아 끼우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_-;;; ) 그래도 나는 어쩔 수가 없다. 고집이나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느린 탓이다.

차를 샀을 때 초보인 내게 선배들은 네비게이션을 권했지만,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위성까지 써가며 운전을 해요, 하고 말았다. 지도와 이정표를 보고 다니고, 모르면 헤매고 하면서 익히죠. 언젠가 필요한 날이 오면 장만하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아직은? 어떤 사람들은 20세기 때부터 21세기로 살았다는데, 어찌 된 게 나는 여태 20세기다. 그런 내가 ‘아직은’ 소리를 하다니. 30대에 이미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는데 노년엔 어떡하지? 가끔 그런 걱정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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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단 기별은 들었지만, 헛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층 빌딩에서 공항에서 도심에서 나쁜 놈들과 맞서서 몸이 으스러져라 싸우는 그를 보면서 어린 나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죽으려야 죽기도 힘든’ 그라는 걸 알면서도 행여 어떻게 될까봐 조마조마하면서 논리적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액션들에 입을 벌렸더랬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 존이 그렇듯 브루스 윌리스도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돌아오겠는가 반쯤 포기했다. 그가 정말로 돌아왔다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러 갔다. 늙은 배우의 액션 연기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할 것을 걱정했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온 옛 친구를 모른척할 수야 있겠는가. 다이하드 4.0 - 존 맥클레인 형사 말이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형사” 존 맥클레인. 어린 해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얘기를 듣다가 순진한 얼굴로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하고 물을 때 나는 그만 가슴이 찡-했다. 통신도 컴퓨터도 아는 건 없지만, 테크놀로지의 재앙에서 마지막까지 죽도록 열심히 육탄전을 벌이는 늙은 형사 존이 너무 좋았다. CG인 줄 알면서도 터널의 액션신을 볼 땐 너무나 신이 났고, 존이 승강기 통로를 빠져나올 땐 절로 손뼉을 칠 정도였으므로 “그래서 네가 영웅인 거야” 류의 부끄러운 대사는 잊어주기로 했다. 어쩐지 다시는 존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우릴 찾아오긴 어렵겠지만 어디선가 오래오래 살아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긴 참, 그는 죽기도 어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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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06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다이하드는 굉장히 잘만든 액션영화라는 평이 대부분이더군요..^^
하긴 존 맥클레인 형사..벌써 머리숫부터 따지면 나이 정말 많이 자신 거죠..^^
그나저나 네꼬님의 행동성향은 어찌 40대 중후반을 달리는 듯한 이 느낌은 뭔지..??=3=3

네꼬 2007-08-0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영화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신 났고요! 여름에 꼭 맞는 영화랄까요. 전 이 시리즈를 무척 좋아하는데, 늙은 그를 보니 다음 편을 기대하기 어려워서 아쉬워요. ㅠ.ㅠ 근데, 그냥 40대도 아니고 40대 중후반이라고욧??? =3=3=3

다락방 2007-08-0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의 브루스 윌리스.
저는 아직 못봤어요. 조만간 볼 예정이긴 한테 예정이란건 언제든 틀어질지도 모르는거라 불안불안. 존 맥클레인은 브루스 윌리스가 아니면 할 수 없지요.
브루스 윌리스도, 다이하드도, 존 맥클레인도, 그리고 네꼬님도.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아요 :)

짱꿀라 2007-08-0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루스 윌리스 매달려 있으려니 너무 힘들어 보이네요. 이 영화 한번 챙겨야겠네요.
존맥클레이 형사로 나오는 브루스 월리스의 연기도 기대됩니다.

2007-08-06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7-08-06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맞아요, 그건 브루스 윌리스가 아니면 안되는 부분이죠. 그래서 어딘가 더 실감나게 애틋했어요. (액션 영화의 엉뚱한 감상) 우리 같이 오래오래 살아요.

섬사이님.
석기시대부터 살아계셨는데 앞으로도 장수하셔야죠!! 자자 우리 돌도끼 든 사람들끼리 버텨보아요. 글 읽는 재미라니, 그건 제가 섬사이님께 드릴 말씀인걸요. : )

산타님.
저도 보는 내내 어찌나 안타까운지. "아유 아프겠다" 소리가 절로 나오던걸요. 몸 연기는 정말 제대로예요. (^^)

비밀님.
저 좋아서 막 뛰어다녀요. (상상이 되시는지?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온 사무실을....)

파비아나 2007-08-06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우연히 케이블에서 다이하드1을 해주었어요.
브루스 윌리스가 나오는 첫장면을 보면서 허걱 저때는 저아저씨가 저렇게 젊었단 말인가 하고 놀랐어요.얼마전에는 회사사람들이랑 밥먹으면서 다이하드시리즈를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물었다가 깜딱 놀랐어요. 전 1편을 분명히 극장에서 봤는데 대부분 아가씨들은 주말의 명화로 보았대요.흑흑흑
어쨌든 저도 친구랑 보러가기로 약속은 해놓았어요.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맥클레인 형사를 위해 그정도의 예의는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프레이야 2007-08-0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도 다이하드 할래요^^

nada 2007-08-06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페이퍼는 우직한 사람들을 위한 헌사 같은 것이로군요.
우직하게 CD를 듣고 지도에 의지해 운전을 하는 뚱뚱한 네꼬 할머니가 되어 주세요!
네꼬 님의 노년을 생각하면 음마 라모츠웨 여사가 떠올라요~

다락방 2007-08-07 10:07   좋아요 0 | URL
아, 꽃양배추님.

우직하게 CD를 듣고 지도에 의지해 운전을 하는 뚱뚱한 네꼬 할머니, 라는 표현은 정말 '완소표현' 이군요. 그 모습을 상상하니 한없이 행복해져요 :)

네꼬 2007-08-07 12:57   좋아요 0 | URL
알라딘은 꽃대인을 위해 댓글 추천 기능을 개설하라! 개설하라!

에디 2007-08-0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중학생때부터 CD 수백장(!) 을 차곡차곡 사 모았는데 아이팟이 나온 후로 별 의미가 없지 뭐에요. 그래서 작년즈음에 조금 고민하다 전부 중고샵에 헐값에 넘겼어요. 먼지만 쌓여서 제 방에 숨어 있느니 아직 CD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가라고;

누군가 제 비틀즈 CD를 듣고있겠죠? _


마노아 2007-08-07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의 머리 속에 이야기 보따리가 숨어있는 듯해요. 일상 속의 작은 일도 소중한 이야깃거리로 만드는 그 재주라니, 너무 사랑스럽잖아요^^

산사춘 2007-08-07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증말 멋지게 늙고... 증말 귀여운 마초고...
캐릭터다운 캐릭터 없는 액션영화는 정말 싱거워요.

네꼬 2007-08-0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아무개님.
그러고 보니 그런 말 들은 것도 같네요. 하지만 꼭 숱이 적어서 섹시한 건 아니고. ^^;;; 네, 이번 다이하드도 무지하게 재미있었어요. 페이퍼에도 적었지만 터널 신 정말 완소!

파비아나님.
그렇죠, 그거 아시는구나! "그 정도 예의" ^^ 저도 그런 마음으로 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어요. 그저 여름엔 액션 영화가 최고. 다이하드를 주말의 명화로 본 어린 것들은 가벼운 코웃음으로 넘겨 주세요. (내가 왜 불끈이냐!)

혜경님.
당근이죠 당근이죠. 에- 우리 같은 아날로그들은 대체로 다이하드일 거라고 봐요. : )

꽃양배추님.
뚱뚱한 할머니가 되는 것은 제 인생의 중요한 목표예요. "반드시" 그래야 해요! 배추님의 예언, 생각만 해도 떨려요~ 좋아라-

다락님.
뚱뚱한 네꼬 할머니와 시를 짓는 다락 할머니가 되도록,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요. 왈왈!

주이님.
비틀즈는 아니지만 제가 갖고 있는 중고 씨디 중 어떤 것은 주이님으로부터 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모르니까 모두에게 제가 잘 해줄게요. (^^)

마노아님.
('' ) (..) ('' ) ( '') .. 그냥 하신 말씀이겠지만 괜히 부끄럽잖아요;;;;;

산사춘님.
액션 영화의 묘미는 액션의 스케일에도 있지만 거두절미하고 보여지는 확실한 캐릭터에서 오는 게 커요. 그런 점에서 "잊을 만하면 이렇게 쌩고생을 해요" 라고 투덜대는 존 맥클레인의 표정은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어요. >_<

비로그인 2007-08-08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뚱뚱한 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은게 젊은 여성의 마음일것 같은데요...

2007-08-08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7-08-0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네꼬님, 네꼬님!
저 쫌전에 이거 보고 왔어요.
정말 너무 재미있었구요, 존 맥클레인 완전 사랑해요. 배가 약간 나왔지만 정말 짱 좋아요!! 우리 이 아저씨 만나러 미국가요, 네?

네꼬 2007-08-0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서님.
핫핫. 그것은 저의 로망인 걸요? (아가씨일 땐 말고, 할머니일 때만!) 휴가 잘 다녀오셨어요? : )

비밀님.
♡ 이렇게만 써도 알겠죠?

다락님.
가요, 가! 미국 가면 이 아저씨도 만나야 하고, CSI 반장님들도 만나야 하고, 아 참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