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배움의 주인이 되는가 - 학습자 주도성과 생성 교육
정기효 지음 / 비비투(VIVI2)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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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자극하는 것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신체와 온전히 동일하거나 익숙한 것들이어서는 곤란하다. 지금의 나와 이질적인 무엇과의 만남으로 자신의 사고와 신체의 배치가 흔들리는 경험이 배움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자 시작이다. 이질적인 감응으로 욕망의 배치와 신체의 강도가 달라져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세계를 변혁하는데 기여하는 일이 배움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86~87)

 

저자는 초등학교 현직 교감이다. 교사 시절때부터 학생들의 '배움'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고민해왔다. 교육과정 안에서 학생들의 '배움'이 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어 직접 학생 개별 학점제, 학생 학점제, 학생 자율 학점제, 학생 자율 과정, 학생 자율 시수, 학생 생성 교육과정을 시도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앞두고 그의 노력들이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경상북도교육청에서는 시범적으로 학생 생성 교육과정을 도입하고 실험적으로 진행중에 있다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학생 생성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 학생 생성 교육과정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저자가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학생이고, 학생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통해 진정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의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은 주어진 교육과정일 뿐이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제시한 성취기준마저도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획일적으로 각 학교급에 따라 뿌린 주어진 교육과정의 한 부분이었다. 현장에서 남다른 시각으로 고민하고 애쓰는 교사들에게는 성취기준마저도 걸림돌이 되었고, 특히 COVID-19 로 인해 시행된 원격수업에서는 기존에 뿌려진 성취기준이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원격수업과 대면수업이 혼합된 블렌디드 수업을 위한 성취기준의 수정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조차도 국가에서 획일적으로 정한 성취목표일 뿐이다.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겉만 번지르한 교육과정으로 다변화한 시대 속에서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학생 생성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 경상북도 일부의 초등학교에서 현재 실험적으로 진행 중에 있다. 관련 자료를 보면 국가에서 제시한 성취기준은 참고하되 학생이 직접 만든 성취기준을 가지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국가에서 제시한 수업 시수 중에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교육과정 시수를 과감히 할애하여 학생들의 주도성과 창의성을 키워보자는 의미이다. 교사는 당연히 조력자로 피드백을 상시 염두해 두고 학생들이 만든 교육과정에서 앎이 제대로 생성되고 있는지 눈여겨 보는 역할을 한다. 학생 생성 교육과정이 지금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시도되고 있지만 이것이 활성화되면 전 교과에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배움은 누군가가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말그대로 학습자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다. 교사가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배움 조차도 학습자가 아닌 누군가가 판단해 주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배움을 빙자한 학력 또한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학력의 잣대는 무엇이며 학력이 과연 변화되는 시대 속에 고정불변한 것인지도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배움의 주인이 되는가>는 학교 현장에서 실천한 배움의 에세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그동안 탐구한 교육 철학서이기도 하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깊이 있게 책을 탐독해 왔으며 어려운 철학서를 붙들고 고민했는지 그려진다. 그렇기에 결코 가볍지 않는 책이자 이론에만 천착되어 현실을 터부시한 책이 아님을 대번 독자들이 알게 될 것이다. 앞부분에는 저자가 고민하는 교육, 학력, 배움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교육과정의 실제부분이 나오니 인내하며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현직 교감으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의 최선두에 서서 교사들과 고민하고 연구하는 저자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부러울따름이다. 하루아침에 쌓여진 깊이가 아니라서 과연 범접할 대상은 아니지만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교육과정에 대해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교육의 새로운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해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간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깊이 있는 내용은 아직 쉽게 이해하기 어려워 두고 두고 생각해 보며 문맥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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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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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도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만나보았으면.....

 

주인공 허남현은 굴착기 기사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현재 두 번째 아내와 살고 있다.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고, 지금의 아내와의 사이에서도 딸을 두었다. 67세 노년이 나이에 접어둔 남현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았났을 때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기록한 <청년일지> 노트를 서재에서 찾아낸다. 거기에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도 기록해 두었다. 그 중에 하나가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보연이를 찾는 일이고 보연이에게 아빠 노릇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었다. 남현은 수소문 끝에 보연이를 찾는다. 그리고 보연이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난다. 스페인 광장에서 플라멩코를 춘다. 수 많은 관광객들이 지켜 보고 있지만 남현이에게는 딸 보연이가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연이는 잃은 아빠를 늦게나마 찾게 되고 서로가 용서를 하게 된다. 

 

학교에 근무하다보면 한부모 가정이 제법 많이 늘어나고 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그렇겠지만 안쓰럽게 느껴진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는데 고스란히 상실의 아픔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아이의 미래가 그려지기 때문에 마음이 쓰인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도움이 더욱 필요한 때가 있을텐데 어떻게 하나 생각이 든다. 행여나 상처가 곪아 터져 삐뚤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된다. 아빠와 엄마가 있는 가정에서도 여러가지 힘든 일이 많은데 한 부모 그늘아래에서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할 아이의 장래가 눈에 밟히기도 한다. 내가 그런 삶이 살았기에 피부로 더 와 닿나보다. 아버지 없이 자랐기에 그 설움을 잘 안다. 아버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나, 단 둘이서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금기어였다. 나 스스로도 아버지가 누군지 간절하게 물어보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과거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 같아 깨끗이 잊어버리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읽으며 잊었던 아버지의 존재가 다시 생각난다. 왜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았을까? 지금도 살아계실까? 만약 플라멩코 추는 남자, 허남현처럼 지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나도 제법 나이가 들었다. 이제 곧 있으면 50이니 말이다. 혈기 왕성할 때야 우리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존재가 불편하고 원망가득하겠지만 반백 인생을 맞이하는 지금에서야 만약 나타난다면 보연이처럼 처음에는 당황스럽겠지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가정을 꾸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자녀들도 장성하여 손주까지 보고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 있겠다. 허남현의 두 번째 가정의 가족들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 남편에게 전 처 소생의 딸이 있다는 사실도 이해해 준다. 허남현의 또 다른 딸 선아도 다른 엄마의 딸, 언니가 있다는 것에 적지 않게 당황하지만 아빠를 용서하고 넉넉히 이해한다. 나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이왕 이렇게 살아왔는데 왜 우리 가족을 버렸냐고, 나를 찾지 않았냐고 따질 수 있겠는가. 그저 생명을 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늦게나마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을 따름이다. 젊었을 때는 이 모든 가정사가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이것 또한 내 삶의 일부분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오히려 이런 가정사가 있었기에 가정의 소중함을 절실히 바라고 지켜내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말못할 아픔과 상처가 있지 않을까? 다만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없기에 지금도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있을 뿐. 나를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사람이 수두둑 할 것 같다. COVID-19를 신호탄으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각퍅해 지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감염될 줄 모르기에 만남을 꺼려하고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더더욱 대화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자멸의 위기에 처해 있고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지원금으로는 회생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의 아픔을 서로 공감해 주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굴착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인간미가 묻어 있는 늙다리 청년에게 마음을 준다. 약삭빠른 젊은이보다 무디지만 진솔한 청년에게 자신의 굴착기를 넘기려 한다. 공감해 주는 사람, 용서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다. 설령 사회적 지탄을 받을 짓을 한 사람이라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과정이 필요한 시기다. 누가 플라멩코를 추는 남자, 허남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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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교육공동체운동 - 세계적 동향과 전망 한국교육연구네크워크 총서 10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지음 / 살림터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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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아니, 교육은 달라져야 한다. 시대가 바뀌면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도 바뀌듯이 교육을 통해 변화시킬 인간상도 조금씩 수정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제4차산업혁명, COVID-19 등 미래가 갑자기 소환되어 교육의 발자국들은 가속화가 불가피졌다. 학교가 교육의 중심이라는 생각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근대학교의 시작은 단시간안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국가 주도의 일방향적인 교육 정책은 나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문제는 앞으로다. 각 국가별로 교육을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마을교육공동체운동: 세계적 동향과 전망>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덴마크, 영국의 사례는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해 준다. 1930년대부터 미국은 필요에 의해서 커뮤니티 스쿨을 확대해 가고 있으며 가깝고도 먼나라 이웃 일본은 법령에 근거하여 커뮤니티 스쿨 즉 지역과 함께 하는 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다민족 국가인 캐나다도 각 주별로 교육 자치권을 통해 지역 사회와 함께 교육적으로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공화주의라는 국가의 가치 아래 기회평등을 위해 시민주도의 교육을 추구해 가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우리나라는 2010년대부터 '마을교육공동체'라는 우리나라만의 지역과 학교가 함께 협업하는 교육운동을 전개해가고 있다. 마을교육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우리나라만의 특성에 맞는 민관학 거버넌스를 교육과 어떻게 맞춰 가야할지, 마을교육공동체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할 지 등 각계 각층의 목소리를 담아 연구한 소논문 형식의 글들을 모은 이 책을 여러분에게 추천한다. 

 

먼저, '마을교육공동체'라는 뜻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각 지역교육청 조례(경기도, 광주시, 세종시 등)에 근거하면 "마을 내 학생, 교직원, 학부모, 마을 주민 등이 함께 학생의 교육활동 지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 로 정의할 수 있겠다.  '지역의 아이들은 지역이 키운다' 라는 모토 아래 마을을 통한 교육, 마을에 관한 교육, 마을을 위한 교육을 행하는 것이다. 

 

'마을을 통한 교육' 과 '마을을 위한 교육' 은 학교가 중심이 된 교육이라면 '마을을 위한 교육'은 지역이 중심이 된 교육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공동체란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요소다. 공유된 가치, 정서, 관심과 참여를 토대로 구성원 간의 소속감이 완성되는 곳이다. 지역은 인적, 물적 기관으로 구성된 일종의 복합적 기능을 가진 곳이다.  학교교육이 지역사회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역사회 발전과 교육적 가치가 함께 가야 한다는 네트워크적 인식이 깔려 있다. 다른 세계 여러나라와 차별되는 우리나라만의 마을교육공동체 운동의 차별점은 학교 단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장점도 될 수 있지만 지속적 동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재정 지원이 중단되면 마을교육공동체 운동이 위축될 수 있다. 학교 안으로 사업들이 밀려오면 학교 구성원의 인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또 다른 인력 보충이 필요하게 된다. 아니면, 지역 거점 마을교육공동체 전담센터를 개설하여 지역 안의 마을교육공동체 운동의 구심적이 되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학교가 구심점이 되어 사업을 진행하다보면 좀 더 효율적으로 예산이나 재원들을 사용하기가 어렵게 된다. 

 

교육과 돌봄은 지역의 공동 과제여야 한다. 지금까지 학교는 학생들의 앎과 공동체적 삶을 통합시키지 못했다. 학생이 살고 있는 마을과는 동떨어진 수업을 진행해 왔다. 현실과 지식이 분리되어 있었다. 학교와 마을이 분리되어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없었다. 최근들어 마을을 알아가기 위한 다양한 교육과정 재구조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학생들이 마을의 현안 문제를 학생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일,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의 일터를 돌아보며 정주 의식을 가지게 하는 일, 마을을 둘러보는 현장체험학습, 마을 주민들과 만나 대화를 시도하는 일 등은 얼마든지 교육과정 재구성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COVID-19 로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대도시로 향하는 현장체험의 움직임들이 뚝 끊겨 버려 자발적으로 마을 안에서 체험의 기회를 늘려가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지역사회 안에 있는 인적, 문화적, 환경적, 역사적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마을을 통한 교육

학생이 속해 있는 지역에 대해 배우는 일이다. (마을에 관한 교육)

학생들이 지역사회의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도록 미래 진로 역량을 키워 주는 일이다. (마을을 위한 교육)

 

마을 안에 다양한 인적 자원들이 많다. 현재 방과후학교 강사로, 진로 멘토로, 마을 선생님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다. 마을 주민들을 통해 생각과 가치, 역량을 생생히 배울 수 있다. 학교는 마을과 함께 가야 한다. 수업이 마을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마을이 수업이 되어야 한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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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왜 사라졌는가 -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애널리 뉴위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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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이면 도시가 된다.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먼저는 생활의 편리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직업을 위해서든 교육 때문이든 결국 사람들을 모이게 끔 하는 뭔가의 이유가 도시에게 있으며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현재도 그렇거니와 과거에도 수 많은 도시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해 왔다. 유서깊은 도시는 그만큼 사람들이 왕성하게 모여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와서 도시의 필요성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감지되고 있다. 아마도 감염병에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때문이다. COVID-19 로 시작된 팬데믹 위기는 시작일 뿐 앞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감염병이 인류를 지속적으로 위협할 것임은 분명하다. 감염병의 창궐은 현대의 도시의 모습을 변형시킬 가능성이 크다.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은 흩어지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서는 도시를 쪼개는 것이다. 감염병 뿐만 아니라 기후 재앙이라고 불리우는 재난이 도시를 위협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산불, 허리케인, 홍수, 가뭄, 지진 등 천재지변은 도시를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옛 도시들의 역사 기록이다. 도시史를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는 일이다. 몇 천 년, 몇 만 년 전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현대의 과학기술법을 활용하여 고고학자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옛 도시史를 찾아내고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다. 수 많은 도시 중에 4개 도시를 기록한다. 그 도시들은 당시 인구 몇 만명이 거주할 만큼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터기, 이탈리아, 캄보디아, 미국에 엄청난 대도시들이 존재했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 4개의 도시들이 커졌다가 사라졌다가 반복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사한 고고학자들의 모습에 경이를 보내고 싶다. 파묻힌 지층에서 발굴해 낸 뼈조각들을 분석하고, 각종 유물들, 집터, 물줄기, 새겨진 조각상 등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 상을 그려내고 있다. 

 

 

도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도시가 된다!

 

신석기 시대에도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현대의 도시처럼 인구 몇 천만명의 도시는 아니더라도 당시 수준으로 보았을 때 꽤 많은 인구가 밀집해서 살았던 도시가 있었고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여 도시의 면면을 그려내고 있다.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남았던 재의 흔적이라든지 동물과 사람의 뼈, 켜켜이 쌓여 있는 흙의 층 등을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한 뒤 도시의 모습을 설명하고 특징을 밝혀내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상상력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흔적만으로도 오래 전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들을 설명해 내니 놀라울 따름이다.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의 첫 번째 도시는 인류 최초로 모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던 신석기 혁명 당시의 도시다. 도시의 이름은 약간 생소하다. 지금의 터키 내륙의 '차탈회윅'이라는 도시다. 

 

신석기 시대의 도시 '차탈회윅'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하에 살았고, 지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옥상과도 같았다. 왜 그들의 집 형태가 지하에 조성되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자연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불을 피우고 연기를 옥상으로 배출하기 위한 시설들이 발굴되었고 연기가 지하에 머물다보니 사람에게도 건강상 좋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회반죽으로 벽을 칠하고 동물이나 각종 사람들을 벽화로 남기기도 했다. 장례 풍습으로 죽은 사람의 유골을 방바닥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도 발굴 현장에는 유골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고 한다. 차탈회윅은 신석기 혁명의 문화를 누리며 오랫동안 존속했지만 결국 사람들이 떠나고 빈터로 남게 되었다. 도시가 사라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기후의 변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고 강물의 흐름이 변경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여러 가지 의견 중에 특이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계층 형성' 의 이유다. 잘 살고 못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힘이 있고 약한 사람들이 구분되면서 저절로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힘의 불균형은 그동안 평등한 구조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떠나게 되는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의견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전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낙농 식품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에 순응하기 보다 자연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신석기 도시 차탈회윅에 있어 두 번째 도시의 생성과 소멸에 다룬 곳은 폼페이다. 폼페이는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화산 폭발에 의해 하루 아침에 사라진 도시다. 6미터 화산재로 덮혀 버린 도시인 폼페이는 현재까지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특히 데이터고고학을 통해 폼페이에 살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분석하고 재현해 내고 있다.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 폼페이는 상당히 활발히 상경기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고고학자들은 폼페이의 소매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폼페이도 차탈회윅처럼 시민들 간 계층 구분이 있었다. 소수의 로마 귀족들과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 노예들 다양한 신분이 도시의 구성원으로 함께 어울려 지내는 곳이었다. 화산 폭발 전에도 지진을 통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은 화산 폭발이었다. 화산재도 피해를 주었지만 더 큰 피해는 뜨거운 기체였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순식간에 녹일 정도였다. 로마 당국에서는 화산재가 덮힌 폼페이를 재건할만한도 할텐데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서는 황제는 없었다. 결국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발굴팀들이 재정적 지원을 받아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라진 폼페이는 영원히 역사 속에서 잊혀진 듯 했으나 화산재 덕분에(?) 폼페이 도시 모습을 최대한 재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석회를 떠서 생생하게 살려낼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폼페이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감춰진 것 뿐이다!

 

인위개변지형학을 통해 캄보디아 앙코르를 바라보다!

 

인위개변지형학이란 땅의 모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동남아시아 지형 자체가 늪 지대가 많다보니 늪지대의 물을 빼고 인간이 스스로 사용하기 이해 땅의 모습을 변화시킨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캄보디아 앙코르에는 엄청 큰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의 활용 여부에 따라 도시의 흥망성쇄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수로를 정비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저수지가 범람했을 때 앙코르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반면에 관개 수로가 잘 정비되어 농사가 잘 진행되었을 때 왕조가 튼튼하게 버티어 갈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앙코르 도시를 좀 더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 '라이다' 라는 광파 탐지 거리 측정 영상기술을 사용해 다양한 지도를 만들었다. 라이다라는 영상기술법은 인위개변지형학 연구에 최적화된 방법이다. 노동은 앙코르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었다. 노동력을 잘 관리한 왕들은 크메르 제국을 강하게 키워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도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앙코르와트는 커다란 저수지 안에 있는 사원 단지다. 수리야비르만 2세라는 왕이 앙코르 도시에 세운 기념물 가운데 하나다. 앙코르는 기후 변동에 취약했다. 특히 14세기 말부터 혹독한 가뭄과 이례적인 강수량으로 도시는 파멸에 가까울 정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수자원 시설이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물론 앙코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시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문화와 전통은 살아남는다!

 

모든 도시는 주민들에게 공적 정체성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카호키아는 대중들을 위한 광장이 발달되어 있었다. 정치적 성격보다는 종교적 특징이 광장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정치적 과정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기도 했지만 이것은 도시를 잠시 버린 것 뿐이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확장과 폐기의 패턴'으로 보고 있다. 정치적 불안정과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시기는 도시의 움직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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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세계 - 관찰과 실험으로 엿보는 식물의 사생활
제임스 B. 나르디 지음, 오경아 옮김, 주은정 감수 / 돌배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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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세계>를 읽으며 정원 안에 다양한 생물들의 상호작용을 엿볼 수 있었다. 세밀화로 그려진 식물의 구조들을 보면서 다시 고등학교 생물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던 이론들이 아직까지 기억 안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는지 <정원의 세계>에 나온 각종 식물의 구조와 관련된 이름, 세포, 내부 구조를 통칭하는 말들이 귀에 익숙하게 들려왔다.

 

"식물은 우리를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그 사생활의 관찰을 허락하고, 우리가 맘대로 배치한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를 쓴다. 환경에 적응하는 식물에 대해서는 존중이 필요하다"

 

관찰과 실험으로 엿보는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부제처럼 식물은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인간들에게 공여하고 있다. 식물의 살이를 통해 인간의 생활적인 면에 많은 이로움을 얻는다. 가령 예를 들면 이렇다. 고구마는 따뜻한 곳에 저장해야 되고 양파는 최소한 4도 이하로 떨어지는 기온은 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감자와 양파는 함께 보관해서는 안 되며 다 익은 사과는 고구마와 함께 있으면 고구마의 싹을 제어한다는 생활 속 지혜를 얻는다. 호르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정 호르몬으로 당근의 쓴 맛이 생성된다.

 

생물에 관련된 책은 늘 읽던 책과는 궤를 달리하는 책이라 약간의 부담감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새로운 용어와 분야는 굳어진 뇌를 다시 소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집중해서 읽게 되고 그림과 설명을 번갈아 가면서 대조하게 된다. 그림이 워낙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설명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그림을 자세히 보게 되면 어려운 설명 부분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태주 시인이 말한 시구가 생각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식물도 자세히 보니 정말 다채로운 곤충들이 함께 서식한다. 쥐, 두꺼비, 쥐며느리, 지렁이는 수많은 뿌리와 식물들 사이에서 통로를 만들어 땅속 세계를 공유한다. 호박의 꽃과 줄기를 두고 쥐와 두꺼비, 수분매개곤충, 포식곤충, 해충, 잡충들이 공생한다. 식물이 생태계에 선사해 주는 선물과도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학교 교실 안에서도 유용하게 실험 참고 자료로 <정원의 세계>를 활용할 수 있겠다 싶다. 식물이 빛에너지를 사용하여 성장하는 방법과 같이 서로 다른 화분 속 식물들을 일정한 기간을 두고 빛의 노출 시간을 달리하거나 토양의 조건을 달리했을 때 식물의 생장 정도를 비교하는 실험에서부터 시작하여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보관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사고를 위한 실험들을 따라하며 과학적 소양을 기를 수 있을 것 같다. 직장인들도 한 번 자신의 분야와 전혀 다른 편에 놓인 책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읽어볼 것을 권해 본다.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비슷한 분야의 책들을 자주 접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꽤 익숙하게 여겨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정원의 세계>는 나에게 식물에 대해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달리하게끔 만들었다. 이제 지나가는 길목에 피어있는 잡초조차도 우습게 그냥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해 보게 된다. 내부의 복잡한 식물 구조를 알게 된다면 말이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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