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1 -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1
정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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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나는 박제화된 성인 다산을 만들 생각이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숨 쉬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청춘이었다" (8)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은 정조 임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다산의 목숨을 노리는 정객의 칼 날을 온 몸으로 바위처럼 막아 준 사람이 정조 임금이다. 정조의 심복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다산은 총애를 받았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 많은 이들이 다산의 정치적 위치를 끌어 내리기 위해 그를 조준을 했고, 정조준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 천주교였다. 천주교 말고는 다산을 위협할 수 있는 공격거리가 없었다. 임금이 든든한 배후로 받쳐 주고 있었기에 흠 잡을 것이 없었다. 젊은 시절(18년) 다산 정약용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천주교도 빼 놓을 수 없다.

 

정민의 다산독본 1권 『파란 1』은 청년 정약용을 다룬다. 그동안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문헌 속 행간의 정약용을 연구한 정민 교수의 정약용 파헤치기를 볼 수 있다. 사실 지금껏 알려온 정약용은 '다산학'을 이룰 정도로 평범한 사람 치고는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민 교수는 다산 정약용도 우리와 똑같은 심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다산과 관련된 문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통해 인간 정약용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다만, 18세기 조선의 정치적 배경과 관련된 이야기이기에 관련 사전 지식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지루한 읽기, 고단한 읽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정약용과 관련된 책 치고는 상당히수준 높은 책이라고 봐야 한다. 정약용에 대해 의욕을 가지고 읽기를 처음 시도하고자 하는 초보자분들은 약간 숨고르기를 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먼저, 정조 임금이 다산을 총애했던 이유를 보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야당 계열인 '남인'을 키울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심에 청년 '정약용'이 눈에 들어왔다. 학술 군주로 유명한 정조 임금과 토론을 심도 있게 할 정도로 청년 '정약용'은 학문적 깊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공부법을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 세상이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여도 마음으로 승복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질문의 포인트를 명확하게 갈라 논거를 들어 핵심을 찌른다. 선입견 없이 문제에 집중한다. 이것이 평생을 일관한 다산의 공부 방식이었다. 다산은 눈치 보지 않았다. 문로에 따라 정해진 공부를 해 왔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61)

 

"메모는 다산 학술의 출발점이자, 거의 모든 것이었다. 다산과 그의 제자들은 메모하는 것으로 그들의 공부를 시작했다"(133)

 

"한 가지 주제를 들고 여러 날 한곳에 머물며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다산이 속해 있던 성호학파의 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다. 이들은 공부 도중에 문제에 막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모여서 상의하고 함께 토론했다" (136)

 

정민 교수가 분석한 청년 '정약용'의 공부법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부에 있어서도 혁신을 추구했던 청년 '정약용'은 관습에 따라 공부해 온 다른 이들과 구별되었고 그것이 학술 군주였던 정조의 마음에 쏙 들어왔던 것이다. 정조의 씽크탱크 격인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당당하게 입학시킨 정조는 청년 '정약용'에게 과로가 될 만큼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연구과제를 던져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정약용'은 완벽하게 과제물을 보고서로 올렸다. 인내와 끈기까지 겸비한 그는 정조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정약용 일가가 포함된 남인을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포석을 많이 단행했다. 그 예로 '문체반정'이라는 정책이 있다. 격에 맞지 않은 글을 쓰지 말라는 임금으로서는 속 좁은 정책 제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행시킬 '남인' 세력을 전면에 세우기 위한 정치적 속임수라는 사실임을 정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노론 자제들을 중심으로 당대 유행했던 청대 소품 문체의 수용과 겉멋이 든 삐딱한 글씨체를 함께 거론함으로써, 고의로 논점을 흐려 상쇄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121)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포함한 '남인'계열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사태를 자신의 비호 세력을 깍아내리기 위한 한낱 정치적 음해로 여기도록 애를 썼다. 윤지충의 제사 거부로 시작된 '진산 사건'은 충분히 정국의 태풍이 될 수 있었다. 정약용은 1784년 9월경 자청하여 이승훈에게 영세했고 그의 세례명은 약망, 즉 사도 요한이었다. 이승훈, 이가환 등 정약용 일가들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남인 중에서도 공서파측은 집요하게 천주교의 제사 거부를 들고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 임금은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하여 논쟁의 화살을 벗어나도록 노력했다.

 

참고로, 천주교의 제사 거부가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계기를 정민 교수는 아래와 같이 조사했다.

 

"동아시아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칙서는 가톨릭의 해묵은 논쟁과 문제 제기, 그리고 이에 대한 오랜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 결정은 이전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보유론적 관점과 적응주의 원칙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관점과 스페인의 원조를 받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의 교조주의적 관점이 충돌하면서 야기된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필 이때 북경에서 프랑스 예수회 교단이 해체 축출되면서 프란치스코회 교단이 새로 자리 잡은 시점인 것이 화근이었다."(308)

 

다시 요점을 정리해보면, 윤지충의 제사 거부는 중국에 들어와 있는 천주교로부터 제사에 관한 답을 받기 위한 간 윤유일이 만난 신부가 바로 교조주의적 관점을 지닌 프란치스코회 신부였다는 점이다. 결국 윤유일은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행하고 있는 제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답서를 천주교인들에게 내 놓았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겠지만 만약 윤유일이 만난 신부가 적응주의적 관점의 예수회였다면 병인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했다고들 알고 있지만, 정민 교수는 문헌 또는 서로 오고간 서신 속에서 직접적으로 밝힐 수 없었던 정약용의 마음을 행간에서 발견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정약용은 겉으로는 배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천주교를 옹호하며 정치술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윤유일이 (중국으로 들고 간) 편지는 이승훈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중간생략) 이승훈은 처형당하기 전에 의금부 공초에서 북경에 보편 편지는 정약용이 허락 없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 쓴 것이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309)

 

 정민 교수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최초로(?) 밝혀 내고 있다.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한 얘기다. 사도세자가 특별히 읽었던 소설책 목록 중에 북경에서 들여온『성경직해』, 『칠극』이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훗날 천주교 교리서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 이 두 책이 당시에 이미 사도세자의 거처에 놓여 읽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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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와 혁명가 - 영성의 두 갈래 길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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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 봉담마을에 위치한 더숲어숲동산교회 이도영 목사는 남다른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전작 『페어처치 』에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다. 이번 『성자와 혁명가 』에서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두 갈래 영성을 말하고 있다. 왜 기독교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는가? 그 이유를 이도영 목사는 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이 통합되지 못한 결과로 본다. 어느 한 쪽이라도 결여된다면 기형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이기주의에 도취된 기복만 바라는 교회(혁명가적 영성의 결여)되거나 자기 의만 드러내려는 과격한 교회(성자적 영성의 결여)가 될 수 밖에 없다.

 

저자 이도영 목사는 의도적으로 책을 구성할 때 성자적 영성을 전면에 배치한 뒤 나중에 혁명가적 영성을 소개한 듯 싶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도 성자적 영성이 우선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혁명가적 영성을 지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존재'보다는 '소유'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위대함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믿음의 위대함만 의지하려는 영성은 사실 없는 것만 못한 신앙이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교인을 불쌍히 생각하는 이유도 제대로 된 '성자의 영성'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자와 혁명가 』앞부분 성자적 영성의 기초와 적용을 다룬 1,2부에서는 저자의 어렸을 적 힘들게 살았던 자기 고백(불우한 가정, 열등감 등)과 신학을 한 뒤 공군 군목으로, 안산동산교회에서 부목사, 더불어숲동산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동안 경험하고 실천한 신앙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가 있는데 병든 자를 치료하고 성령이 역사하는 순간들이 필요할 때마다 일어났다는 점이다.

 

지면의 3분의 2를 할애하면서 성자적 영성을 이야기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겠지만 3분의 1에 해당하는 '혁명가적 영성'을 왜 지녀야 하는지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개신교에서 개혁하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독교강요'는 프랑수아왕에게 보내는 편지임을 서론에 담겨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쓴 책임을 알 수 있다. 개신교에서 중요시하는 인물 중에 한 명인 바울의 교회론도 세상과 분리된 종교적 목적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도시국가의 대내외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하는 사회적이고 참여적인 도시 전체의 민회에 가까웠다고 한다. 왈도파 개신교인 마리 뒤랑은 38년 프랑스 콩스탕스 감옥에 갇혀 지내지면서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혁명가적 영성'을 불온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간절히 담아 놓았다.

 

교회의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깨어나야 한다, 시민사회 안에서 시민의 덕목을 소유해야 한다,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하며 소회된 자의 편에 서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여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변혁시킬 개혁가 또는 혁명가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혁명가적 영성으로 실제로 실천하고 있는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월호, 미투, 장애, 난민, 공정 무역, 대안 건축(헤테로토피아) 6개 부분을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봉담 마을에서 실천하며 지역을 넘어 시 전체로, 도 단위에서 의제로 삼을 정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구원론과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분리 된 점" (242) 이라고 강조한다. 신분만 변하고 사람은 변화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는 용서되지만 죄인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롭다 여김을 받았지만 성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의 사사화"(247) 라고 말한다. 복음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결코 내용은 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은 공공의 장에서 선포되며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복음은 공공의 진리라는 것이다. 개인 윤리만 있고 사회 윤리가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자선과 시혜 안에 정의의 문제가 생략되어 있다"(248)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없다고 지적한다. 구조적인 악을 해결해야 하는 정의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오직 개인적인 자선과 호의로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공의와 정의는 사회적 차원의 윤리이다. 성경은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집단의 자유를 말한다.

 

성경은 시선의 문제가 곧 권력의 문제라고 본다.(280) 지배와 억압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문제라는 점이다. 공동체는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공동체는 연약한 자를 돕는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연약한 자임을 아는 곳이고, 우리 모두에게 장애가 있음을 아는 곳이며, 서로 연약함을 보듬어주는 곳이다.(284) 손상은 생물학적인 것이고 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다 .

 

"교회가 그 지역만의 필요를 알아내고 그 지역을 섬기는 것이 없으니 지역이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역 교회는 반드시 지역의 공공재 또는 공유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기에 지역이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교회라면 지역이 교회를 붙들게 만들어야 한다" (326)

 

이도영 목사의 『페어처치』와 더불어 『성자와 혁명가』가 기존 교인들에게는 불편한게 사실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폭넓은 관점으로 보게 해 주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분명한 것은 저자가 말한대로 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의 두 갈래에서 균형을 이뤄간다면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빛과 소금'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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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콘서트 - 통합교과수업을 위한 행복한 멘토링 교과서, 2014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행복한 교과서 시리즈 7
이경원 지음 / 행복한미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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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키다리 선생님인 이경원 선생님이 그동안 아이들과 지내온 학급 이야기를 일지 쓰듯 적어내려간 책이다. 학급운영이 중심이 아니라 교육과정 속에 학급운영과 생활교육을 통합 시킨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행사 따로 수업 따로가 아닌 전체적인 교육과정 안에 주제를 중심으로 행사까지 수업 안에 엮어냈다.

 

『교육과정 콘서트 』는 이론서가 아니다. 실제 혁신학교에서 담임으로써 아이들과 좌충우돌하며 직접 경험한 내용을 담아낸 실천서다. 각 교과를 주제별로 통합시킨 선생님의 관점이 녹아 있다. 교과별로 주제를 중심으로 통합한 수업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교과서에만 의존했던 교사들에게 큰 도전이 될 수 있겠다. 초임 교사들에게는 교육과정을 어떻게 짜는지 롤모델이 될 수 있겠다. 혼자 애쓰기보다 함께 교육과정을 짜야 할 이유도 알 수 있겠다. 저자가 경기도 서정초등학교 6학년 부장으로 있을 때 동학년 교사들과 함께 세계 음식 만들기, 대륙별 육상 대회, 공연이 있는 졸업식 행사 등을 기획할 때 학년이 함께 움직였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주제 중심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다섯가지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배워야 할 내용들을 확장시켜 나간다. 지식, 경험, 예술, 신체, 마음. 혹자는 이 다섯가지 카테고리를 어떤 철학적 기반으로 정했냐고 물어본다고 한다. 특별히 학문적 연구에 의해 정한 것이 아니라 '현장교사'로써 학생들의 배움을 고민하다 저절로 얻게 된 '감'이었다고 말한다.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다보면 지켜보는 학부모들로부터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바로 '학력', '평가', '상급학교 진학'에 대한 불안감이 포함된 질문이다. 저자는 교육의 주체를 학생, 학부모, 교사로 보고 학부모들이 가지는 불안감을 해소 하기 위해 다섯가지 카테고리 중에 '지식'을 포함시켰고 실제로 통합적인 시각을 키우는 평가 문항을 자체 계발하여 학생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 큰 신뢰를 얻었다.

 

현장학습을 가더라도 철저히 교육과정 안에서 실천된다. 매년마다 학생들과 독도를 다녀오는 프로그램 속에서도 허투루 다녀오지 않는다. 어렵게 입도하게 되는 독도에서의 20분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플래시몹을 미리 준비한다. 이것 또한 교과 안에서 준비한다. 경복궁을 다녀오더라도 '나의문화답사기' 경복궁 편을 어렵더라도 읽고 학생 스스로 철학과 의문을 지닌 상태에서 다녀온다. 교과 안에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다. 배움이 저절로 일어나게 하기 위해 교사의 철저한 노력과 준비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경원 선생님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졸업여행도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다녀오는 것을 보면서 조금만 생각을 전환시키면 아주 좋은 방법으로 다녀올 수 있겠다 싶은 아이디어가 생긴다. 학기 중 교육과정 안에서 시간상 제약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교육 주체의 동의를 받아 여유 있는 기간인 겨울방학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이경원 선생님이 학급 아이들에게 요청하는 여름방학계획도 남다르다. 학생들 개개인별로 배움이 있는 여름방학을 위한 다섯가지 카테고리(지식, 경험, 예술, 신체, 마음)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설계하고 개학하는 날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교육과정 안에서 주제를 통합시키기 위해 매일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TV 속 프로그램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고, 그림책을 보다가도 교과 주제를 연결시킬 수 있다. 생태 교육을 위해 학교 근처 하천에 나가 조사하고 관찰하고 캠페인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이경원 선생님의 놀라운 교육과정 운영을 읽다보니 새학기가 왠지 기다려진다. 당장이라도 스케치북을 사다가 주제망을 그리고 각 교과별 주제를 연결시켜 보고자 하는 욕구가 든다. 학교 혁신은 따로 있지 않다. 교육과정 안에서 교사의 변화된 노력이 있을 때 그게 바로 학교 혁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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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행복교육 - 학생을 살리고 시민을 깨우는 교육의 힘
정석원 지음 / 뜨인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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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덴마크식 교육 뿐만 아니라 덴마크 사회 저변에 깔린 문화, 정치 등 전 분야를 소개하고 있다. 최근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핀란드를 넘어 세계에서 행복한 국가 2위로 평가되고 있는 덴마크를 집중하여 들여다 보고 있다. 특히 교육 분야 벤치마킹(무상교육, 놀이, 협동조합, 집단지성 등)은 압도적이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덴마크 따라잡기를 하고 있다. 척박했던 덴마크가 세계가 주목하는 교육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저자는 덴마크와 우리를 비교하며 덴마크 교육을 '행복 교육'으로 명명하고 있다.

 

교육 개혁만으로 교육이 바뀌지는 않는다. 교육 문제는 교육 차원을 넘어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아니 교육은 사회 문화 위에 자리잡고 있다. 교육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딛고 있는 사회와 정치가 변화되어야 가능하다. 덴마크식 교육이 세계가 부러워하는 교육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교육 변화에 앞서 사회와 정치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덴마크 역사를 훑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까지 덴마크는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던 패전 국가 중의 한 나라였다. 풀 한포기도 자라기 어려웠던 북쪽 황무지 땅과 400여개의 섬만으로 구성된 국토, 긴 겨울과 짧은 해로 칙칙한 분위기의 덴마크가 변화를 모색할 수 있었던 그 중심에는 덴마크의 국부로 불리우는 교육개혁가 그룬트비가 있었다. 

 

그룬트비의 교육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질문하지 않는 수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평가로 서열을 매기기보다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찾게 끔 하는 곳이 학교다, 학교는 누구든지 원하는대로 만들 수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선의 교육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는 최고의 교육을 지원할 책임이 있고 재정을 부담해야 한다. 등등

 

그룬트비의 교육 사상의 영향력을 받은 덴마크 교육은 모든 사람이 부모의 능력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평등하고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무상교육을 하며 적절한 보조금을 지원해 준다. 수업에서 찾아야 할 것은 정확한 답이 아니라 호기심과 궁금이며 엉뚱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더 이상 사회적 성공이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다. 직업의 귀천이 있을 수 없고, 부모는 교육비 때문에 등골 휠 이유가 없다. 재정적으로 독립이 가능하기에 자녀들은 부모 눈치 안 보고 진로를 결정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공부를 계속해 가거나 직장을 잡는다.

 

그룬트비의 교육 사상은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끼쳤다. 덴마크 사회에서는 침묵이 금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자신의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른 의견을 듣는 인내와 포용성을 학교에서 배우고 이것을 바탕으로 공동체 안에서 소통을 이뤄낸다. 불편한 것을 말하고,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용기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 사회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퍼져 있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공동체 의식과 갈등해결능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덴마크식 교육이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덴마크 학교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점이 몇 가지 있다.

 

교장과 교사는 역할이 다를 뿐, 교육에 대해 서로 의논하고 협력하는 대등한 관계다, 3년동안 고정 담임제로 학생들을 면밀히 관찰하며 관찰한 것을 평가하여 부모에게 전달한다, 학교운영의 주체는 교장이 아니다, 학교 운영위원회가 학교를 운영하는 실제적인 주체이며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회에서 선출한 학부모대표, 학생회에서 뽑힌 학생대표, 교사대표로 구성되며 위원장은 학부모 학부모 대표가 맡는다, 교장과 교감은 발언권은 갖지만 의결권이 없으며 운영위원회에서 주로 간사로 봉사한다. 헉!

 

학교 수업은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으로 진행된다. 자전거수업, 요리수업, 목공예수업 등등. 참고로 덴마크에서는 자동차 수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으며 유명 정치인들도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다고 한다. 그러니 자전거 안전교육부터 기초적인 수리까지 학교에서 수업으로 배우는 것이 당연한거다. 시험이 없다. 자신의 몸무게보다 책가방 무게가 더 무거운 우리나라 학생들의 모습을 덴마크 사람들이 보면 '아동학대' 수준으로 보지 않을까 싶다.

 

분명 우리나라와 덴마크는 다르다. 좋다고 무작정 따라할 수는 없다. 조급한 마음으로 무작정 따라 잡기 위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정책을 도용하기보다 구성원들의 합의 절차를 통해 우리 실정에 맞게 완급 조절을 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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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시작하라 - 변화하는 학교 ESBZ의 부추김
마르그레트 라스펠트.슈테판 브라이덴바흐 지음, 류동수 옮김 / 에듀니티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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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변화하는 학교> 'ESBZ' 베를린 학교의 미래학교를 향한 과감한 도전 사례를 안내한 책이다. 독일도 우리만큼 경쟁을 강조하는 시스템을 갖춘 나라다. 초등학교 4학년 쯤되면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부모와 학생 모두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로 말하면 실업계로 갈 것인지 인문계로 갈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초등학교 4학년 시기에.... 그러다보니 성적에 목을 맬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메르켈 독일 총리까지 나서면서 독일 교육의 개혁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은 연방국가다. 국가주도의 교육이 일어날 수 없는 구조다. 각 연방 주마다 교육 시스템이 천차만별이다. 단점이 장점이 될 수 있다. 그 사례가 바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베를린 학교의 미래학교 도전 사례다.

 

유럽연합(EU)는 인권, 민주주의, 사회통합 및 지속가능성을 교육 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다. 앞으로 맞닥뜨릴 미래 사회는 부족한 것이 지식이 아니라 함께 한다는 의식, 우리라는 느낌, 커다란 전체에 대한 책임이다. 다시말하면 성숙한 시민을 키워내는 일을 교육이 감당해야 된다는 말이다. 시민성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새로운 일을 전개해 내는 능력이다. 시민성은 변화의 엔진이 되어 새로운 사고를 활성화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한다. 시민성은 거대한 자원이기도 하다. 미래사회에서는 시민성이 국가 권력이 되기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민성은 다양한 시각을 갖게 한다. 할 수 있는 것, 만들 수 있는 것에 미친 듯이 몰입하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것, 경쟁심을 버리고 공존의 힘을 통해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초보자도 전문가가 될 수 있고 당연시 되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독일의 새로운 학교 혁신 사례인 '베를린 학교'는 집단지성을 강조한다. 집단지성이란, 많은 개인의 지식이 모두가 동참하는 공동의 네트워크로 흘러들어가 합쳐진 것이다. 각 교실 안에는 수많은 보물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아직도 개인으로서의 전문가, 교사에 의한 교육 내용의 일방적 전수가 지배적이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만 풀 수 있는 까다로운 도전과제를 제공하지 않는다. 반면, '베를린 학교'는 파격적이다. 프로젝트 수업으로 학생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학교를 방문하는 교장, 장학관, 외국 사람들에게 학교사례를 발표한다. 주변 인근 대학교로 파견되어 학교 혁신을 소개하는 강사가 된다.

 

20세기 학교 시스템으로는 미래 사회를 견뎌낼 수 없다. 아직도 학교의 일과표를 보면 상호 맥락이 상실된 과목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성표처럼 죽 이어져 있다. 창의성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평가 잣대가 없어야 하고 실수를 용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두려움은 창의성을 말살시킨다. 다음 세대가 '다양성', '이질성'이라는 자양분을 경험하며 인간 중심의 사회를 실현해 갈 수 있도록 학교는 잠재력을 펼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베를린 학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며 남다른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기존의 학교와 확연히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치감치 10년 전부터 혁신 학교의 바람이 지방자치단체에서 실험되거나 정착되고 있다. 교육 혁신가들의 노력으로 서열화 되고 지식 전수 중심의 교육이 미래사회의 핵심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통합과 지속가능성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임의식이 희박하다는 점이다. 책임은 권리를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의무이기도 하다. 자발적인 책임의식이 내재화 되지 않은 혁신 학교의 바람은 소멸되거나 역풍으로 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혁신의 주체는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가 되어야 한다. 교사는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지역 사회와 상생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확대시켜 나가야 할 것이고, 학부모는 자녀에 대한 이기주의 벽을 넘어 학교의 가치관에 활력을 불어 넣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학생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여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시민 의식을 발휘해 가야 한다. 우리와 비슷한 여건에 있는 독일의 혁신 학교 사례가 우리 교육에도 신선한 도전이 되길 바란다.

 

미래 사회의 변화, 학교가 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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