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와 혁명가 - 영성의 두 갈래 길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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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기도 화성 봉담마을에 위치한 더숲어숲동산교회 이도영 목사는 남다른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전작 『페어처치 』에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다. 이번 『성자와 혁명가 』에서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두 갈래 영성을 말하고 있다. 왜 기독교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는가? 그 이유를 이도영 목사는 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이 통합되지 못한 결과로 본다. 어느 한 쪽이라도 결여된다면 기형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이기주의에 도취된 기복만 바라는 교회(혁명가적 영성의 결여)되거나 자기 의만 드러내려는 과격한 교회(성자적 영성의 결여)가 될 수 밖에 없다.

 

저자 이도영 목사는 의도적으로 책을 구성할 때 성자적 영성을 전면에 배치한 뒤 나중에 혁명가적 영성을 소개한 듯 싶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도 성자적 영성이 우선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혁명가적 영성을 지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존재'보다는 '소유'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위대함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믿음의 위대함만 의지하려는 영성은 사실 없는 것만 못한 신앙이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교인을 불쌍히 생각하는 이유도 제대로 된 '성자의 영성'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자와 혁명가 』앞부분 성자적 영성의 기초와 적용을 다룬 1,2부에서는 저자의 어렸을 적 힘들게 살았던 자기 고백(불우한 가정, 열등감 등)과 신학을 한 뒤 공군 군목으로, 안산동산교회에서 부목사, 더불어숲동산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동안 경험하고 실천한 신앙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가 있는데 병든 자를 치료하고 성령이 역사하는 순간들이 필요할 때마다 일어났다는 점이다.

 

지면의 3분의 2를 할애하면서 성자적 영성을 이야기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겠지만 3분의 1에 해당하는 '혁명가적 영성'을 왜 지녀야 하는지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개신교에서 개혁하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독교강요'는 프랑수아왕에게 보내는 편지임을 서론에 담겨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쓴 책임을 알 수 있다. 개신교에서 중요시하는 인물 중에 한 명인 바울의 교회론도 세상과 분리된 종교적 목적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도시국가의 대내외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하는 사회적이고 참여적인 도시 전체의 민회에 가까웠다고 한다. 왈도파 개신교인 마리 뒤랑은 38년 프랑스 콩스탕스 감옥에 갇혀 지내지면서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혁명가적 영성'을 불온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간절히 담아 놓았다.

 

교회의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깨어나야 한다, 시민사회 안에서 시민의 덕목을 소유해야 한다,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하며 소회된 자의 편에 서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여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변혁시킬 개혁가 또는 혁명가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혁명가적 영성으로 실제로 실천하고 있는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월호, 미투, 장애, 난민, 공정 무역, 대안 건축(헤테로토피아) 6개 부분을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봉담 마을에서 실천하며 지역을 넘어 시 전체로, 도 단위에서 의제로 삼을 정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구원론과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분리 된 점" (242) 이라고 강조한다. 신분만 변하고 사람은 변화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는 용서되지만 죄인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롭다 여김을 받았지만 성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의 사사화"(247) 라고 말한다. 복음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결코 내용은 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은 공공의 장에서 선포되며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복음은 공공의 진리라는 것이다. 개인 윤리만 있고 사회 윤리가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자선과 시혜 안에 정의의 문제가 생략되어 있다"(248)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없다고 지적한다. 구조적인 악을 해결해야 하는 정의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오직 개인적인 자선과 호의로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공의와 정의는 사회적 차원의 윤리이다. 성경은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집단의 자유를 말한다.

 

성경은 시선의 문제가 곧 권력의 문제라고 본다.(280) 지배와 억압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문제라는 점이다. 공동체는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공동체는 연약한 자를 돕는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연약한 자임을 아는 곳이고, 우리 모두에게 장애가 있음을 아는 곳이며, 서로 연약함을 보듬어주는 곳이다.(284) 손상은 생물학적인 것이고 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다 .

 

"교회가 그 지역만의 필요를 알아내고 그 지역을 섬기는 것이 없으니 지역이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역 교회는 반드시 지역의 공공재 또는 공유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기에 지역이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교회라면 지역이 교회를 붙들게 만들어야 한다" (326)

 

이도영 목사의 『페어처치』와 더불어 『성자와 혁명가』가 기존 교인들에게는 불편한게 사실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폭넓은 관점으로 보게 해 주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분명한 것은 저자가 말한대로 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의 두 갈래에서 균형을 이뤄간다면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빛과 소금'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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