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 스트레스 없이, 생산성 있게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매뉴얼
졸리 젠슨 지음, 임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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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학교 내의 교수들의 학술적 글쓰기에 대한 조언이지만 글쓰기에 거부감을 갖고 있거나 주저하고 있는 분들에게도 작은 용기와 도전을 시도할 수 있는 좋은 지침들이 담겨져 있어 가볍게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저자가 말하는 (학술적) 글쓰기는 아주 단순하다. 

 

첫째, 매일 15분씩 꾸준히 글을 쓰라는 얘기다. 왜 15분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대학 교수이기에 오랜 시간 여유 있는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15분이라는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시간을 할애하여 매일 꾸준히 쓰는 시간을 갖는다면 전문적인 영역에서 꾸준히 일취월장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에 그렇게 시간을 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매일 일기를 쓴다. 얘들 키울 때 육아일기를 썼다. 아참, 군 복무를 할 때 병영일기도 썼다. 초임 교사 때에는 교단 일기를 썼다. 그러다가 잠깐 중단했다가 작년부터 다시 일기를 쓰고 있다. 매일 중간 크기의 업무 수첩 한 쪽 분량을 쓴다. 피곤해서 눈이 잠기더라도 기어코 일기를 쓰고 만다. 때로는 일기를 빼 먹었을 때는 다음 날 기억을 되살려 몰아 쓰기도 한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말을 내 스스로에게 한다!

 

둘째, 겁내지 말고 무작정 쓰라! 

 

처음부터 잘 써야지라고 생각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글쓰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 말은 전적으로 동의가 간다.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먼저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을 위한 글이라면 굳히 잘 쓸라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쓰고 싶은 대로 막 쓰면 된다. 일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일기를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 쓰는 사람은 없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쓰다보면 막힘없이 글을 쓰게 된다. 이렇게 겁내지 말고 글을 쓰다보면 글쓰는 습관이 생기고 힘이 생겨 조금씩 길게 호흡을 가지고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도 '겁내지 말고 무작정 쓴' 결과 책 한 권을 낸 적이 있다. 2021년 12월에. 말그대로 겁 대가리 없이 책 쓴다고 선포하고 도전했다. 출판계 진입이 어렵건 말건 기획서를 제출하고 기적과 같이 뽑혀 글을 쓰게 되었다. 만약 잘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책 쓰기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겁없이 매일 매일 쓴 글들, 책 읽고 정리한 글들을 블로그에 업로드하고 만인이 볼 수 있도록 페이스북에도 공유하고 누가 비평하건 말건 무작정 글을 썼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왔다. 겁내지 말고 무작정 쓴 결과다. 『교사여서 다행이다』

 

셋째, 글을 정말 쓰고 싶다면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맞추어 효율적으로 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글 쓰기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은 언제일까?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평생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정말 글 쓰고 싶다면 그냥 현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 속에서 꾸역꾸역 글을 써 내려가는 방법 밖에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조용하고 정돈된 환경이 조성된 곳에서 글을 쓰고 싶지만 아마 나에게 그런 황금 조건은 앞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 가운데 짬짬히 글을 쓰는 방법 밖에 없다. 인터넷 들어가는 것 적게 하고 딴 짓하고 싶은 시간 그 시간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글을 쓰는거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애들 어렸을 때에는 육아도 가사도 함께 해야 되고, 애들 컸더라도 손이 가는 일이 많다. 한가한 저녁 시간은 좀처럼 누리기 어렵다. 최대한 현실을 인정하고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집중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노트북을 펼쳐 놓고 꾸역꾸역 키보드를 쳐 내려가는 방법 밖에 없다. 멋진 문장을 쓸 수 없지만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단어들을 겨우겨우 조합해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 어차피 잘 쓰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글 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는 직장인들의 위한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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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에 마음을 볶았다 - 귀농하고픈 아들과 말리는 농부 엄마의 사계절 서간 에세이
조금숙.선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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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지망생이 귀농을 하겠다고 선언하다!

 

귀하디 귀한 아들 놈이. 그렇게 공부시키고 이제 세상이 알아주는 벼슬을 목 전에 두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귀농을 하겠다는 아들이 있다면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영혼을 갈아 변호사 되겠다며 노력은 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막상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그래도 한 번 변호사 시험에 도전해 봐야겠다며 토할 때까지 책을 펼치고 노력했었는데 결국은 낙방하고 이제서야 가슴 한 켠에 숨겨 놓았던 귀농의 꿈을 살며시 풀어 놓는 아들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보면 엄마나 아들이나 모두 착찹하고 고요 속에 뭔가 불안함이 맴돌지 않을까 싶다. 

 

하던 공부 때려치우고 이제 부모가 계시는 시골에 가서 농사 지으면 살겠다고 자신의 생각을 편지지에 꾹꾹 눌려 보낸 아들과 처음에는 놀라는 가슴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아들과 속 마음을 터 놓고 편지를 왕래하면서 그간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안쓰러움과 함께 힘든 길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당차게 설계하며 포부를 말하는 아들이 믿음직스러워지고 이제는 귀농한 선배의 마음으로 궁금한 점을 물어오는 아들에게 누구보다도 더 차근하게 좋은 팁들을 알려주는 엄마의 서신 왕래가 읽는 내내 마음을 뜨겁게 하고 정겨운 모자간의 관계를 느낄 수 있어 시골에 혼자 계신 어머니를 더욱 생각나게 한다. 

 

귀농이 인생의 실패의 흔적이 아님을 청년 아들은 일치감치 깨닫는다. 겉으로 보이는 외양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혹독한 로스쿨 공부와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느꼈다. 남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삶도 깊숙히 드려다보면 불행이며 자신의 주체적인 삶이 아닌 쫓기는 삶임을 누구보다도 청년 아들은 더 잘 안다. 자신을 숨기기보다 남들에게 있어 보이려고 하기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농부의 길을 걸어가고자 엄마와 아빠를 설득한다. 아니 호소하며 먼저 귀농의 길에 접어둔 부모를 이제는 자신이 팔을 걷어 도와드리겠다고 요청한다. 

 

즉흥적인 결단이 아닌 것은 신혼 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와도 오랫동안 귀농에 대해, 앞으로 미래에 펼쳐질 자신의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결국 찾아던 종착지는 시골임을 서로가 재차 확인하며 시골에 있는 부모에게, 시부모에게 정중히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모습 속에 일찍 철이 든 청년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잠시 잠깐 머무는 농촌의 풍경과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농촌은 분명 다르다는 인식을 하고 있기에 고생이라는 단어를 마음팎에 새기고 청춘이라는 무기로 한 번 도전해 보겠다는 의기양양한 모습에 일흔에 가까운 노부모도 고생길 훤한 귀농의 길이지만 힘차게 응원하며 편지를 갈음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이들이 살아갈 시골 농촌의 풍경이 아름답게 보여진다. 내 손에 흙 묻힐 상황이 아니니 그저 바라보는 입장에서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지만 고생과 위험 부담을 안고 그렇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창의성과 도전 의식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농촌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노력이 더욱 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여진다. 앞으로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 차원에서도 농촌은 6차 산업이라고 하지 않았나! 세상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되고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일에 황무한 농토가 있는 시골에 뜻있는 젊은 청년 부부가 맨 몸으로 뛰어 들어간다고 하니 편지의 내용이 마냥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이왕 새로운 삶을 살기를 각오한 청년의 마음 속 다짐이 담긴 글에는 뭔가 투박하지만 당찬 느낌이 담겨져 있고 오랜 세월 어미로 지금은 10년 넘게 귀농하여 농부로 살아가는 엄마의 편지 글에는 노련함과 인생의 묵직한 의미가 담겨져 있어 고개를 저절로 끄덕여짐을 느낀다. 청년의 엄마는 젊었을 때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환경에 대한 필요성을 알고 소박하게 환경 운동을 해왔던 실천가이기도 하다. 환경에 관해 다양한 부분에서 고민한 흔적들이 편지글에 보여진다. 틈틈히 깊은 독서의 흔적도 보인다. 유배지에서 마련한 초라한 방을 사유재로 이름지으며 언행과 삶을 정돈했던 다산 정약용의 예를 빗대어 비록 귀농의 삶이라할지라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아들에게 우회적으로 조언해 주고 있다.

 

그 엄마의 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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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맛 도깨비 식당 2 신기한 맛 도깨비 식당 2
김용세.김병섭 지음, 센개 그림 / 꿈터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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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모여 쓴 판타지 동화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요한 인물도 초등학생들이고 사건의 장소도 주로 학교에서 일어난다. 사건의 소재도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정했다. 아마도 초등학생들과 주로 생활하는 선생님들이기에 아이들의 고민, 학교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을 이야기 소재로 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서로 간의 갈등도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경우가 많다. 특히 여자 아이들 사이의 묘한 심리 갈등은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서야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남자 담임 선생님일 경우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여자 아이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을 처음부터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이 책에서도 세 번째 등장하는 이야기인 '기억이 사라지는 맛'에서 다섯 명의 여자 아이들이 패가 갈려져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등장한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소심한 여자 아이일 경우 누구에게도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거리는 경우가 많다. 부모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친구들에게 혹시나 팽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저자가 이러한 교실 속 갈등 상황을 잘 포착해서 이야기 소재로 잡은 것 같다. 

 

환타지 소설이기에 읽어가는 내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혹시 도깨비 식당 주인이 음식 맛을 낼 때 마지막으로 황금비녀를 쓰다듬는 이유가 무엇일지, 왜 음식 값 대신에 머리카락 한 올씩 수집하는지 등등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간에도 궁금증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이 눈에서 책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도록 저자는 보물찾기 하듯이 책 끝부분에 무언가를 숨겨 놓는다. 

 

먹방 유튜브가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다. 다양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는 출연자들의 모습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지 아뭏튼 먹는 프로그램을 넋을 잃고 보는 경우가 많다. 저자도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여 신기한 맛을 내는 도깨비 식당을 가져 왔지 않을까 싶다. 음식 맛도 기상천외한 맛을 가지고 왔다. 원하는 것을 복제하는 맛, 꼬리가 생기는 맛, 기억이 사라지는 맛,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맛... 시리즈로 구성된 책이라고 하니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서라도 어린 독자들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저자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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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 -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사회사적 성경 읽기
박영호 지음 / IVP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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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었고, 믿는대로 예배했다. 그것이 초대 교회의 힘이었고, 그들 예배의 매력이었다!" (218쪽)

 

현재 우리의 예배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 왜 예배하려고 오는지,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교회로 오는지 등등 이 책을 통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성경은 덮어놓고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라 펼쳐 놓고 꼼꼼히 읽어보고 되새김하며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며 깊게 살펴봐야 하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다양한 저자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고자 우리에게 보낸 선물과도 같다. 성경이 없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깊게 알아갈 수가 없다. 성경이 없다면 과연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죄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분명한 근거 자료가 된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씌여진 시기가 2천년 전이라는 사실이다. 100년 전의 자료도 읽기가 부담스러운 판에 2천년 전의 기록물을 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대학을 다니고 있던 시절 신문 인쇄가 세로로 되어 있었고, 중간 중간 국한문 혼용으로 씌여져 있어 읽기가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것 사실이다. 하물며 성경 기록은 다른 나라말로 씌어져 있던 것은 번역하고 개정하여 우리 손에 들려져 있으니 읽기가 쉬울 턱이 없다. 더구나 2천년 전의 이스라엘, 터키, 그리스, 로마 지역의 문화와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문맥을 이해하고 알아가기가 정확하지 않는게 당연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해석을 잘못하거나 자기 중심적인 뜻으로 이해하여 다른 뜻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 

 

저자 박영호는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를 당시 1세기 사회사적인 측면에서 신약 성경을 바라보았다. 1세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어땠는지, 1세기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 문화적 상황, 계급적 상황이 오늘날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문헌을 통해 정확히 밝히고자 노력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나온 사회적 측면을 보여 주는 공간, 인구, 경제 등의 문제에 관한 자료들을 역사적 연구의 일부로서 다루는 것이다" 라고 책의 말미(부록 249쪽)에 저자의 연구한 분야에 대해 독자들에게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총 12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장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을 실어 놓았다. 이 질문들만 잘 보아도 저자가 성경을 사회사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219쪽 

1. 초대 교회의 예배가 어떤 형식도 없이 중산층의 저택에서 모이는 소그룹 모임처럼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은 어떤 면에서 교정되어야 하는가? 왜 로마 교회보다 고린도 교회가 예배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가?

 

저자가 사회사적으로 바라본 1세기 예배의 모습은 기존 우리가 생각했던 예배의 모습을 뒤집고 있다. 고린도 교회만 하더라도 40~50명 규모의 인원이 모인 교회였다고 한다. 그나마 부유한 사람들이 있었던 고린도 교회라 할지라도 40~50명을 모두 수용할 만한 공간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한다. 성경에 나온 유두고라는 인물이 난간에 졸다가 떨어진 사건만 보더라도 모임 공간은 협소했을 것이고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노동과 같은 육체적인 일들을 하고 밤 늦게 모인 시각에 자발적으로 모임을 가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위험한 난간에 걸쳐서도 졸았을까 싶다. 고린도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교회들은 모이는 구성원들의 특성상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십시일반 나눔의 정신으로 이스라엘 교회를 돕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 모습을 보며 교회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1세기 당시 교회가 처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사회사적으로 깊게 바라본다면 바울서신을 비롯한 복음서를 읽어갈 때 좀 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깊이 있는 성경 읽기가 될 것 같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춰 성경을 읽다보면 자칫 잘못 성경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저자가 그동안 잘못 오해하고 있었던 상황 개념을 바로 잡았던 것 중에 하나가 카타콤의 역할이다. 지금까지는 박해를 피해 지하교회로 알고 있었던 카타콤이 실상 그리스도인들의 장례 문화에서 사용되었던 무덤이었던 사실을 사회사적으로 정정하고 있다. 기독교 박해 또한 오랜 시간을 걸쳐 진행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인 전까지 위로부터의 박해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박해(저자는 옆으로부터의 박해라는 표현을 씀)가 먼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분명한 것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위치에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각종 소외받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예배했던 그 모습은 당시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분명했고 이것이 오히려 큰 매력으로 비춰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떤가?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 1세기 교회의 모습을 읽으면서 참 많이 달랐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2천년 동안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예배의 모양이 달라졌지만 그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변하지 않고 굳건히 지켜져 왔구나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저자가 쓴 다른 책 <쾌청 신약>

https://blog.naver.com/bookwoods/222841869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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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청 신약 - 들음에서 앎으로, 앎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성경 공부
박영호 지음 / 두란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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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출세하면 지난 시절의 가난과 설움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오만하게 행세하곤 한다. 조금만 높아져도 아랫사람을 무시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는 분이다" (207쪽)

 

신약 성경 모두를 통틀어 핵심 주제를 말하라고 한다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신약 성경의 모든 저자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삶을 기록했지만 공통된 특징은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서술하고 있다.

 

『쾌청 신약』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성서 신학자로 남다른 관점으로 성경을 연구해 온 학자이며 목회자인 저자는 신약의 각 성경들마다 기록한 저자들의 특징에 따라 어떻게 읽을 것인지? (저자마다 기록하는 특징이 달랐다) 성경의 저자들이 염두한 당시 청중들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에게, 교인들에게)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가령 이렇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사로 활동했다. 곳곳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다. 헬라어에 능숙한 마가는 베드로의 입이 되어 베드로가 전하는 말을 헬라어로 통역했다. 베드로를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해 두어 낱낱히 기록할 수 있었다. 베드로를 통한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가 마가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누가복음은 역사가인 누가가 예수님 당시의 정치적으로 역사적 상황을 꼼꼼하게 기록했기에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했던 인물임을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되었다. 이처럼 성경의 저자들마다 예수님을 다양하게 바라보고 쓴 기록들이 성경을 좀 더 풍요롭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의 상당 부분의 양을 차지할 정도로 기록을 많이 남겼던 바울에 대해 저자(박영호)는 흔히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바울의 모습과 성경 구석 구석에 비춰진 바울의 모습을 비교 대조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신학의 대가이자 오늘날 바울을 빼 놓고는 도저히 설교를 할 수 없을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바울도 사역 당시 상당히 많은 곤욕과 위협, 불편한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다녔던 제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바울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은 사역 내내 꼬리표처럼 쫓아다녔을 것이다. 더구나 유대인을 대표하는 베드로, 야고보와는 신학 노선이 달라 불필요한 오해가 그의 생애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고수했던 바울의 진가는 그가 죽은 뒤에야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얘기다. 바울이 살아 생전에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체 믿음으로만 버텨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내는 외로운 길을 걸어갔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늘날에도 세속 사회를 살아가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신자들의 삶이 목회자나 선교사들 못지않게 힘들 수 있다" (199쪽)

 

"기도와 말씀을 비롯해 경건 생활을 잘하고 매주 주일 예배도 열심히 드리지만, 일차적인 관심은 돈을 벌고 세속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있다면, 그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그는 어디에 충성하고 있는가? " (201쪽)

 

예수 그리스도 당시 예수를 쫓아던 사람들도 그랬었지만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녹록치 못했다고 한다. 경제적인 손실 뿐만 아니라 목숨의 위협, 핍박과 박해를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가장 연약한 존재였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왠만한 것을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럼에도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어려움에 직면한 그리스도인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곳곳에 교회를 세우며 그곳의 신자들에게 편지로 위로하고 믿음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경주하라고 힘을 보탠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약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오히려 힘을 얻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이 벌기 위해 신앙까지 타협하며 적당히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출세하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십자가 밑에서 나를 드러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낮은 자의 위치에 있었던 그리스도 예수, 섬기는 본을 보이셨던 그리스도 예수,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섰던 그리스도 예수처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 곧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의 삶이다!

 

쾌청, 속히 즐거이 듣는다! 다양한 저자들이 들려주는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승리주의에 물들지 않는다! 예수님은 죽임당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양, 약한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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