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 신경학자가 쓴 불가사의한 질병들에 관한 이야기
수잰 오설리번 지음, 서진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평점 :
질병에는 병명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병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는 질병으로 구분된다. 신경학자인 저자 수잰 오설리번은 중남미 니카라과, 스웨덴, 카자흐스탄, 쿠바 등 전 세계에서 불가사의한 병으로 소개된 지역을 찾아 원인 규명을 하며 적어낸 책을 냈다.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은 8개 지역에서 드러난 원인 불명의 사례들을 담아냈고 그 중 스웨덴에서 난민 자격을 박탈당한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을 책 제목으로 실어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질병이 있나? 할 정도로 처음 들어보는 병들이 많았다. 특히 원인 규명이 안 된 불가사의한 병으로 최소 1년부터 길게는 5~6년 동안 꼼짝도하지 않고 침대에서 누워 보내야 하는 소녀들의 증상을 읽으면서 과연 이 사례가 사실일까라는 의심마저 들 정도로 기상천외한 병 증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체념증후군이나 정신 이상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지시크니스 병의 특징은 국적을 박탈당한 난민들의 자녀들에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국경 분쟁이나 소수 민족의 설움으로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이들은 어린 자녀를 품고 도망치다시피 난민을 신청해 안전한 도피처로 들어오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난민이라는 국제적 자격 조건에서 미달되어 결국 원래 살던 곳으로 쫓겨나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어른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난민 심사를 받으며 머물며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익혀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게 된 어린 자녀들이 쫓겨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후부터 나타나는 '체념증후군'은 읽은 모든 독자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중남미 니카라과 해변에서 살고 있는 부족에게 나타나는 정신 이상 증세는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들로 종교적 현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니카라과 해변에서 살고 있었던 부족들은 이러한 현상을 개인적인 문제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해결점으로 생각하며 끈끈한 공동체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서구 국가의 의학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병명으로 구 소련에서 독힙한 카자흐스탄 우랴늄 탄광 도시인 크라스노고르스크의 수면병은 행복했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가 겉으로 드러난 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정 문화나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심인성 장애로 분류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 수잰 오설리번은 심리적 원인으로 생기는 질병과 기능적인 증상으로 드러난 의료 문제를 다음과 같은 사례 설명으로 요약하고 있다.
"체념증후군은 스웨덴에 망명하려는 아이들에 국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아주 특정한 집단에서만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모든 망명 신청자가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구소련과 발칸 반도 출신의 아이들이 더 많이 병에 걸린다. 최근에 많은 박해를 받은 야지디와 위구르 민족 또한 지나칠 만큼 많은 아이가 이 병에 걸렸다" (47쪽)
우리나라에는 예전에 '한(恨)' 이라는 특정 문화에서 나타나는 현대 서구 의학에서는 원인 규명을 할 수 없었던 병이 있었다. 한 많은 인생을 살아간 우리 네 어머니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울분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심인성 질병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만약 정치와 대중매체, 전통문화, 사회적 환경, 의료 복지 그리고 삶의 경험이 체념증후군을 일으키는 요소라면, 그것들이 정확히 어떻게 내 환자들의 장애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 (53쪽)
신경학자인 저자 수잰 오설리번은 질병을 밝혀낼 때 현대 의학이 도외시하는 정치, 문화, 사회, 복지 등 전반적인 사회적 환경 안에서 얽혀 있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가 곧 질병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비유와 언어로서의 질병, 고통과 갈등에 대한 신호로서의 질병은 너무나 전문화된 의사들이 모든 증상에 들어맞는 모든 가능한 질병 목록을 갖고 일하는 시스템에서는 쉽게 왜곡될 수 있다" (143쪽) 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