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을유세계문학전집 105
알베르 카뮈 지음, 김진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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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뫼르소는 끝내 사형 선고를 받는다. 끔찍한 단두대를 연상할 정도로 죽음의 목전에 이른 그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최후를 머릿속에 그린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습관은 감옥 생활에서 기인한다.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하다. 활동 반경도 제한적이다. 자유가 엄격히 제한된 곳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로운 일은 없다. 엎어지면 코 닿은 비좁은 감옥이지만 생각의 나래를 펴면 반나절을 움직일 수 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사소한 사물도 감옥 생활 안에서는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아주 촘촘히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래야만 감옥 생활을 버틸 수 있다. 

 

뫼르소의 사형 선고는 억울한 면이 많다.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기에 법정에서의 판정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가 어울렸던 이들 모두 이방인이다. 실질적인 외국인이다. 프랑스 국적으로 살아가지만 옛 식민지 알제리가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파리지앵이 될 수 없었다. 피부색으로 억양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차별을 받아야 하는 이방인들은 결국 자신의 생사를 결정지을 법정에서도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그는 알았다. 결국 항소를 포기하고 만다. 

 

저자 알베르 카뮈도 알제리 출신의 이방인이었다. 그도 프랑스에서 살면서 뫼르소와 같은 소외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정에서 검사는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뫼르소의 살인을 극악무도한 범죄로 몰아세운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의 죽음까지도 그의 성품과 행동에서 기인했다고 둘러댄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이라는 등식으로 연결 지어 그들의 행동마저도 불순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 이방인이라고 모두 범죄 유발자가 아닐진대 본토 프랑스의 가진 자들은 그들을 악의 축이라는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나 싶다.

 

출신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나의 행동을 보고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오늘날 이방인은 소외받는 자들이 아닐까. 가난한 자, 병든 자, 실직자, 외국인 노동자, 독거노인, 힘 약한 어린이와 여자들. 이방인을 품는 사회적 분위기, 법 앞에는 누구나 소명 기회를 평등하게 가질 수 있는 법 체계가 정의가 구현된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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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을유세계문학전집 64
샬럿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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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나이로 해봤자 열아홉 아가씨임에도 그녀의 생각과 행동은 참 사려 깊다. 본인도 부모를 잃고 고아와 다름없이 자라 눈칫밥 먹으며 친척집에 전전긍긍하다가 쫓겨나다시피 한 기숙학교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수료 후 다시 기숙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시기를 보낸다. 그뿐인가. 조금 더 대우가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가정집 교사로 자청해서 들어간 뒤 성실성과 선함을 인정받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자진해서 포기한다. 그리고 다시 거지와 다를 바 없는 행인으로 돌아다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만난 먼 친척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이어간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삶은 기구한 운명일 수밖에 없구나라고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겠다. 반전의 장면이 등장하는 곳은 이야기의 중반 이후부터다. 제인 에어의 먼 친척이 2만 파운드가 되는 거금을 그녀 이름으로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자 그녀는 졸지에 거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그것마저도 자신이 걸인이었을 때 목숨을 구해 준 사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자신은 5천 파운드만 받게 된다. 순탄하게 인생이 진행되겠거니 하지만 사촌 오빠의 끈질긴 구애로 잠시 마음이 흔들리긴 하지만 십 대 후반의 제인 에어는 나이에 맞지 않는 명확한 판단력으로 이 또한 거절하고 정처 없는 곳으로 다시 발길을 옮긴다.  

 

이야기의 결론은 다행스럽게도 해피 엔딩으로 마쳐지기에 한숨을 돌린다. 한때 가정집 교사로 들어간 곳에서 그 집주인과 열애를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수소문 끝에 사랑했던 이의 거처를 알게 되고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장애를 입은 옛 정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700여 쪽의 상당한 분량의 스토리에다가 영국을 배경으로 한 19세기의 정서가 묻어 있는 소설임을 감안하고 읽더라도 오늘날 독자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는 지점은 아마도 자본주의와 외모 지상주의를 최고의 우선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제인 에어의 삶이 양심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지 않나 싶다. 십 대 후반의 아가씨가 냉철하게 시대의 흐름을 좇지 않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이를 떠나 그녀가 고생한 삶의 흔적에서 얻어낸 결과의 반응이라고 본다.  

 

상황에 손바닥 뒤집히듯이 자신의 가치관을 내팽개치는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오랜 시간 동안 숙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한 뒤 시험과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단하는 의지를 제인 에어를 통해 보게 된다.  

 

고전은 한 인물을 통해 변하지 않아야 할 가치를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준다. 

고전은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에 대해서도 실날하게 비판하며 종교 본연의 기능을 되돌아보게 해 준다.

고전은 사람 내면의 다양한 감정과 갈등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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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인간 선언 - 기후위기를 넘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
김한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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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급진적 기후운동가라고 불러야 할까. 그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탈인간화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인간성을 말살한 동물과 같은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탈인간 선언은 기후와 생태계를 망치는 인간의 노력들을 멈추자는 의미다.  

 

자본과 성장에 집중되어 있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기후 위기만큼 급박한 위기가 없는데 국가와 사람들은 말 뿐인 선언에 그치고 그 선언마저도 휴지 조각처럼 내어 던져버리는 지경까지 돼버린 현실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그렇다면 왜 기후 위기를 위기로 체감하지 못할까? 

 

당장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가 보이지 않게 서서히 죽어가는 지구 환경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다. 북극에 얼음이 녹는 일이 심각한 상태임에도 피부로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이다. 과학자들 대부분이 앞으로 기후를 더 위기에 빠뜨리지 않기 위한 데드라인으로 10년을 말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동안 지구의 생태계 시계를 멈추지 않는다면 기후 위기를 넘어 기후 재앙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나 보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된 기후 정책도 위기를 실감 나게 하지 못하는 요인 중 하나다. 녹색 성장이라는 말도 친환경 정책처럼 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다. 녹색 성장도 성장에 방점을 두고 있는 정책이다. 말이 녹색이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친기업적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해양 생태계는 망가질 대로 망가 친 상태라고 한다. 어종의 다양성은 둘째 치고라도 어종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플라스틱 쓰레기로 몸살을 겪고 있다. 탄소 배출권은 허울만 있는 정책이다. 자국의 탄소 배출권을 줄이기 위해 저개발국가에 석탄발전소와 같은 다량의 탄소 배출이 일어나는 시설을 짓는다면 어떻게 탄소를 저감하고 줄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 정치인들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당장 이익이 눈앞에 있는데 미래에 다가올 지구 위기는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있다. 단지 소수의 젊은 환경 운동가들만이 전면에 나서서 기후를 걱정하고 환경을 지켜내기 위한 행동을 몸소 실천에 옮기고 있다.  

 

<탈인간 선언>은 다소 불편하게 살더라도 후손들에게 살아갈 터전을 더 이상 파괴하지 말자는 선언이기도 하다. 사실 성장을 멈춘다고 해서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아마존의 소수 부족들은 나눔의 미학으로 유명한 삶을 실천하며 살았다고 한다. 생선 10명 마리를 잡으면 세 마리를 이웃에게 건네는 것이 곧 열세 마리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구성원들이 이렇게 나눔의 미학으로 살아간다면 성장이 멈추더라도 모두가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경제는 성장만 한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성장을 멈추는 것이 곧 우리가 사는 길이다. 생태계와 공존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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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습관 - 글쓰기가 어려운 너에게
이시카와 유키 지음, 이현욱 옮김 / 뜨인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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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쓸려고 하기보다 매일 쓰려고 하는 실천이 중요하다. 

잘 썼나 고민하기보다 내가 쓴 글의 평가는 독자가 내린다.

자꾸 쓰다 보면 글의 제목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뽑게 된다.

일단 매일 쓰는 게 중요하다.

 

 

저자는 평소에 말하기보다 쓰기로 의사 표현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다고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을 때 무심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누군가로부터 격려와 응원의 댓글을 받고부터 신이 나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매일의 습관이 되어 지금은 책을 쓰는 작가가 되었고 취재하는 기자가 되었다고 한다. 타고난 글쓰기 능력은 없다고 말한다. 글쓰기 능력은 글 쓰는 훈련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생활 속의 소재를 가지고 매일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감이 떠오르고 같은 글이라도 좀 더 친근감 있게 풀어내는 글을 쓰게 된다고 한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말로는 쉽게 표현하지만 막상 글로 옮기려고 하면 주저하게 된다. 그 이유는 완벽주의 때문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으로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는 글 쓰는 삶을 방해 하는 주적이다. 글 쓴 당사자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내가 만족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무작정 덮어두고 글을 쓰고 공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쓰기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자 만의 글쓰기만으로는 안 된다. 지치게 되고 결국 글쓰기를 중단하게 된다. 블로그나 SNS를 통해 지속적인 피드백을 받아야 하고 관심을 받아야 한다. 글쓰기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글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내 안에 가둬 두어서는 안 된다. 평범한 일상이라도 글을 쓰다 보면 특별한 글이 될 수 있다. 감동이 있는 글이 될 수 있다. 영감이 묻어 나는 글이 될 수 있다. 매일 글을 쓰는 훈련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다. 

 

 

쓰는 습관이 중요하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글을 쓰고 글을 공개하면 언젠가는 독자들이 붙게 된다. 쓰는 습관이 독자들을 모으게 하는 힘이다. 쓰는 습관이 글을 더욱 힘 있게 만든다. 그러니까 무조건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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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무게 -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말의 모든 것
뤼시 미셸 지음, 미리옹 말 그림, 장한라 옮김 / 초록서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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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  

 

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세상에 다양한 차별이 존재한다. 성 차별도 있고 인종 차별, 지역 차별도 있다. 그중에 쉽게 간과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언어 차별이다. 언어 차별은 사회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행동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별명으로 부를 때 대부분 낮게 비하하는 경우가 많다.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교양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비슷한 경우다. 말하는 행위는 구분을 짓기도 하고 위계질서를 만들기도 하며 차별을 조장한다.  

 

말하는 방식에 따라 공동체의 소속감을 가진다.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그들만이 사용하는 특유의 화법이 있고 언어가 있다. 어른들이 금지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들은 말하는 방법을 통해서 집단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자기들만의 공동체성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말은 집단을 이루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말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말투를 보며 상류층인지 하류층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류층이 쓰는 말을 듣고 즉각 대응을 하지 않아 생명을 잃은 사례도 있다고 할 정도로 말의 무게가 생명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감사한 것은 우리나라 말이다. 표의문자인 한자와 달리 표음문자인 한글은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우리도 아는 바와 같이 한글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도 상류층의 사람들은 저급한 언어라고 해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일하기 바빠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한글은 그야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가장 적절한 언어였다. 신분 사회에서는 말이 곧 신분 그 자체였다. 

 

말은 고정적이 아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물 흐르듯이 변한다. 누구도 막을 사람이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말의 무게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가벼운 말보다는 무거운 말, 상처가 되는 말보다는 위로가 되는 말을 사용할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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