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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동안 책을 많이 보지 못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지나치면, 해야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심지어는 하고 싶은 것도 잘 못 한다. 내게 요 몇 달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쁠수록 책을 많이 읽게 된다.
그러던 중에 알라딘으로부터 배송 예정 문자를 받았다. 예전에 산 책 중에, 무슨 이벤트에 당첨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이벤트에도 당첨되지 않았다. 몇 시간 후 알라딘에서 배송된 물건의 정체를 알게 됐다. 짧지만 깊숙한 메모와 함께 응가가 보내준 책과 CD.
정말 오랜만에, 단숨에 책을 읽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책을 단숨에 읽은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책이 정말 그렇게 재미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마음으로 내게 책을 보냈을지 너무 잘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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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은 서사적인 기억을 담고 있었지만, 깃대를 휴식용 발판으로 선택한 참새들에겐 그런 기억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p.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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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구름은 뜀박질하던 여자 아이의 머리 리본이 풀리듯 갑자기 흩어져 버렸다. (p.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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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책 읽을 때 줄을 많이 긋는 편이다. 연필이건, 볼펜이건, 흔들리는 버스에서건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부분은 꼭 줄을 그어둔다. 그런데 <그날 밤의 거짓말>에서는 줄을 그어둔 부분이 많지 않았다. 그만큼 문장 하나하나가 빛나는 소설은 아니었다. 이야기의 구성과 추리소설처럼 반전을 위해 숨겨둔 치밀한 계산들이 이 소설을 빛나게 한다.
<그날 밤의 거짓말>은 역적으로 몰려 사형선도를 받은 4명의 사형집행 전날밤부터 동이 트기까지가 배경이다. 사형집행 전날, 감옥의 사령관이 한 가지를 제안한다. 네 명 중 한 명이라도 그들의 우두머리인 '불멸의 신'의 이름을 대면 네 사람을 모두 사면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대신, 누가 배신을 했는지는 절대 비밀로 지켜주겠다고도 한다. 사령관은 이 제안 자체가 이미 자신의 승리라고 믿는다. 네 사람이 인간인 이상, 배신을 하고 목숨을 부지할 것인지를 한 순간이라도 고민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아무도 배신을 하지 않고 죽더라도 이미 마음 속에서는 배신을 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명예롭지 않게 되는 셈이라는 '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이다. 이를 통해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두 번의 반전이 더 빛난다.
남작 가문 출신인 '콜라도 인가푸', 자칭 시인인 '살림베니', 군인인 '아제실라오', 학생인 '나르시스'는 사형집행 전의 시간을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로 보내기로 한다. <그날 밤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을 인지하고 소설을 읽는다면, 과연 누가 어떤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가끔 떠올리게 되긴 하지만, 대부분은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라는 의심조차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묘하게 거짓말을 했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속였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정말로 속인 사람이 뒤바뀌면서 이 소설의 진가가 발휘된다. 그래서 <그날 밤의 거짓말>은 다시 읽어보면, 많은 단서를 숨겨놓거나 디테일이 훌륭한 영화를 다시 보는 기분이 들 것 같다.
다만, 중간중간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전적으로 내 무지의 탓이긴 하지만. 이야기가 1850년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시대상황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기도 하다는 점 때문에 수시로 등장하는 각주가 종종 방해가 되었다. 당시 유럽역사에 밝다면 책을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그날 밤의 거짓말>이 이탈리아 스트레가 상 후보에 올랐을 때, 함께 후보에 오른 모든 후보자는 "이렇게 훌륭한 작품과 경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며 전원 자진사퇴를 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번역, 혹은 나의 모자란 읽기가 좀 아쉽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