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작이 좋아서 기대하며 읽었는데 대체로 실망스러웠다. 더 솔직히 말하면 게이남성이 주인공이자 화자인 작품을 제외하면 다 별로였다. 대부분이 여성이 주요인물이거나 화자인 작품들이었는데, 그가 묘사한 여성들은 굉장히 전형적으로 멍청하거나 폭력적인 인물들이었고,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이기호 작가가 읽고 반했다는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에서 애정 없이 만나는 여자친구가 당할 온갖 끔찍한 일들을 상상하면서 실소하는 장면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판단을 보류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무언가에 실망을 느낄 것 같은데 그러고 싶지 않으면, 아니야 아닐 거야 내가 오해한 걸 거야 실수한 걸 거야 생각하며 그 실망을 최대한 지연시키는데, 지나보면 대부분 그 최초의 감이 맞아떨어진다는 걸 새삼 느낀다.
같은 말을 요렇게 조렇게 바꿔가며 반복하는 책이라 어쩔 수 없지만 약간은 동어반복의 인상을 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완벽한 이념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방식과 이유와 과정을 통해 고통의 총량을 줄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포인트는 충분히 새겨들을 수 있었다. 한 70퍼센트쯤 비건인 나도, 스스로에게 실망하여 그만두거나 포기하기보다는 계속 조금씩 비건촌에 다다르기 위한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완벽하진 못하지만 대신 꾸준히, 잊지 않고 가야 할 길.
나는 아직도 그 말을 하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가 잔인한을 잔인함이라고 말하고, 저항을 저항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내 마음도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날것 그대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편으로는 덜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그러지 않았던 내 비겁함을 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다들 너무 격양된 것 같은데, 발표자 글이 그 사건을 다루는 글도 아니잖아요. 발표자는 그래도 편향되지 않고 균형감 있게 잘 쓴 것 같은데요."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스러웠다. 내가 그 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지금 이 발표지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인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내 글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75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토록 조급하게 사람들을 몰아내고 건물을 부수었던 자리는 공터로 남아 있었다. 내가 늦깎이 대학생에서 대학원생으로, 시간강사로 나아가는 동안, 빛나던 젊은 강사였던 그녀가 더이상 내가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동안에도 그곳은 여전히 빈터였다./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87
어느 날 퇴근하던 길, 나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