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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1disc)
짐 자무쉬 감독, 빌 머레이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자네 여기 웬일인가?(Strange To Meet You)

자기 전에 커피를 먹으면 꿈꾸는 속도가 빨라진단다. '인생은 아름다워'로 나를 엄청 울렸던 그 남자 로베르토 베니니는 혼자, 마시지도 않은 커피 대여섯잔과 앉아있다. 잔이 달달달달 소리를 낼 정도로 달달달달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홀짝(많이도 아니고 정말 홀짝) 마시고는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그러다 우연히 스티븐을 만나는데, (스티븐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암튼 둘이서 얘기나누는 태도를 봐서도 별로 친한 사이 같진 않다) 시작부터 함께 커피를 예찬하면서, 엉뚱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무언가 뜻이 담겨있을 것 같은 대화를 나눈다.

커피 예찬이 끝나고 더이상 나눌 얘기가 없어지니까, 베니니는 슬슬 스티븐이 알아서 눈치껏 일어나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스티븐은 치과엘 가야한다고 말하면서도 귀찮아서 못 가겠다며 버티고 앉았다. 그래서 결국! 베니니가 대신 간다. 스티븐은 고마워하고.

 

쌍둥이(Good Twin)

커피와 담배를 즐기려면 최소한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조이와 쌩께는 여유를 넘어서 극도의 지루함을 느끼면서 티격태격대고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담배 한 모금 빨고를 반복한다. 그런데, 갑자기 웨이터 스티브 부세미가 나타난다. 커피를 따르면서는 잔에 찰랑대도록 흘리고도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그의 쌍둥이 형에 관한 갖가지 음모론. 하지만 두 쌍둥이는 그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스티브 부세미가 흘려놓은 커피에 짜증이 날 뿐이다. 1986년 Saturday Night Live 방영

 

캘리포니아 어딘가(Somewhere In California)

 

이기와 톰! 이기 팝의 바로 그 이기와 톰 웨이츠의 그 톰이다. 둘은 만나자마자 은근히 서로의 신경을 살살 건든다. 이기는 주크박스에 톰의 노래가 없더라며 은근히 신경전을 시작하고, 톰은 괜히 이기가 먼저 시켜놔서 식어버린 커피에도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래서 이기가 'X(생각 안 난다)'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끝까지, 세게 '이기'라고 힘주어서 부른다. 둘이 사이가 원만할 때는 커피와 담배 얘기를 할 때. 특히 담배 못 끊는 사람들의 박약한 의지를 비난하며, 담배 끊었으니까 한 대 정도는 괜찮다고 하면서 담배를 나눠 필 때 둘 사이는 최고조로 다정하다. 하지만, 담배마저 다 피고 나자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지고 이기는 먼저 일어선다.

톰은 이기가 가자마자 얼른 담배 한 대를 더 물고, 주크박스를 확인한다.  199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단편부문) 수상

 

담배는 해로워(Those Things'll Kill Ya)

나에게 담배 좀 끊으라고 수차례 강요당했던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비니,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또다시 담배 좀 끊으라고 강변하는 조. 겨우 끊었는데, 비니가 자꾸 피는 걸 보니까 자기도 피고 싶어져서 그러는 게 아닐까. 어쨌든 역시나 현실에서의 나처럼 조의 얘기도 애연가 비니에게 먹히지 않는다. 단 하나, 두려운 건 딸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 조의 눈에는 불량식품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일본과자를 들고 왔다갔다하는 손자와 조 덕분에 비니는 결국 10분 정도의 러닝타임 동안 비니는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르네(Renee)

르네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담배를 물고 커피를 앞에 두고 권총이 가득한 잡지를 보고 있다. 웨이터는 아직 비지도 않은 잔에 커피를 더 드릴까 묻고 르네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따른다. 르네는 화를 낸다. 겨우 적당한 온도와 당도를 맞춰놓은건데! 하면서. 웨이터는 쫀다. 그리고 몇 번이나 더 오지만, 그 때마다 르네는 말도 하지 않고, 커피잔을 손으로 가린다. 웨이터는 번번히 르네의 크지도 않은 손에 가로 막혀서 결국 말 한 번 걸지 못한다. 물론 르네는 그것조차 전혀 신경쓰지 않고.

 

별일 없어(No Problem)

전화를 걸어서 내가 누구인지 밝혔을 때 '니가 웬일이야?'라는 말이 맨 처음으로 튀어나올 때 같은 기분이 드는 에피소드였다. 아이작은 알렉스가 아무런 일도 없으면서 자기를 보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알렉스는 오랜만에 만나서 결국은 모든 게 다 좋아. 별 일 없어. 라는 말만 수없이 반복하고, 아이작은 결국 그것 외에 다른 말은 듣지 못하고, 그 말 외에 다른 얘기는 듣지 못하고 그 자리를 뜬다.

 

사촌(Cousins)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여배우가 1인 2역을 했다는 사실은 이 글을 쓰기 직전에 알았다. 음- 인기 여배우 케이트와 히피 쉘리는 사촌이란다.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만나고, 협찬 받은 향수를 선물한다. 그리고 역시나 커피를 마신다. 적어도 커피를 홀짝이는 그 짧은 순간, 서먹함이 유예된다. 단정하게 앉아있는 케이트와 달리, 쉘리는 소파에 거이 누워있다. 둘 다 담배도 피운다. 하지만, 케이트가 바쁘다며 가고 나서 쉘리가 담배를 피울 때는 웨이터가 와서 제지한다. 여기는 금연구역입니다. 2005년 Central Ohio Film Critics 올해의 배우상 수상

 

잭이 멕에게 테슬라 코일을 선보이다(Jack Shows Meg His Tesla Coil)

니콜라 테슬라를 영화 소개란에서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할 뻔한 발명가'라고 소개했다. 암튼 잭은 멕에게 자신이 만든 '테슬라 코일'을 선보인다. 커다란 기계를 카페까지 끌고 왔지만, 멕이 한 번 보자고 하기까지 잭은 꽤 지루하게 기다린다. 살짝 삐치기도 하고. 하지만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고 삐치는 사람 중에 끝까지 하려던 말을 안하는 고집 센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잭도 결국 멕에게 코일에 전류가 흐르는 걸 보여주지만 빛나는 순간은 짧다. 원인이 뭘까 또다시 심각한 고민에 빠진 잭에게, 멕은 의외로 쉽게 해법을 알려준다.

 

사촌 맞아?(Cousins?)

자신도 배우인 알프레드 몰리나는 자신보다 훨씬 유명한 배우 스티브 쿠건과 만난다. 만나서 하는 중요한 얘기라는 건, 자신이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족보를 추적해봤더니, 자신과 쿠건의 증, 증, 증, 증, 증, 증 조부쯤 되는 사람이 같기 때문에 둘이 사촌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징그럽게 자신이 원하는 건 단지 쿠건이 자기를 사랑해달라는 거다. 뜨악안 쿠건은 집전화번호, 핸드폰번호를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자신의 철칙이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순간, 몰리나에게 스파이크 존스에게 전화가 오고 전세가 역전된다.

 

흥분(Delirium)

아- 귀여운 빌 머레이. 대체 의학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몸에 해로운 카페인 대신 차를 마시는 우탱클랜 형제 앞에 빌 머레이가 나타난다. 빌 머레이인지 뻔히 알겠는데, 자신을 보았다는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연신 당부하면서. 주전자째 커피를 마시면서. 그런 빌 머레이에게 우탱클랜은 커피가 얼마나 해로운지 설명하고, 빌 머레이는 또 금방 그 말에 빠져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 우탱클랜은 희한한 해법을 알려주고 빌 머레이는 정말 그 방법을 따라한 모양이다. 우탱클랜은 비웃으며 팁까지 얻어서 차 값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간다.

 

샴페인(Champagne)

점심 먹고난 후의 휴식시간 같은데, 흑백 필름이라서 깜깜한 밤 같았다. 빌과 테일러는 역시나 커피를 마시면서 쉰다.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예찬하던 커피도 테일러에게는 쓰기만 하고 맛도 없었나보다. 그래서 커피를 샴페인이라고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휴식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2분도 채 남지 않았다. 테일러는 몹시 아쉬워한다. 그리고 정말 2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테일러는 머리를 떨군채 불러도 대답할 수 없게 되고, 화면에는 자막이 올라간다.

 

 

커피와 담배가 일상의 징표이듯이, 영화도 그렇다. 무의미하고 무각기한 대화가 줄담배처럼 이어진다. 등장인물은 끊임없이 커피를 들이킨다.

커피와 담배에 나오는 에피소드가 한꺼번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참 신기한게 있다. 격자무늬 테이블. 모든 에피소드에는 물론 빠지지 않고 커피와 담배가 등장한다. 근데 커피와 담배는 늘 격자무늬 테이블에 놓여있다. 흑백영화이기 때문에 실제 테이블보가 어떤 색이었든, 우리 눈에는 흑과 백이 끊임없이 나열돼있는 것만 보인다. 영화 속에서 검은 커피와 흰 담배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처럼.  

등장인물은 꼭 둘에서 셋 정도가 짝을 지어서 나온다. 그리고 사촌 관계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마치 커피와 담배는 사촌 지간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어떤 관계도 친밀하지 않다. 잠시라도 담배를 물고, 잠시라도 커피를 들이키면서 그 어색한 대화나 침묵의 시간에서 유예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둘 사이의 대화는 마치 공중에 퍼지는 담배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고, 남는 건 식은 커피와 담배꽁초 뿐이다.

그리고 어쨌든, 커피를 많이 마시고 담배를 많이 피든, 아니면 커피 대신 카페인이 적은 차를 마시고 금연을 하든, 결론은 죽는다는 것이다. 커피가 쓰고 맛없게 느껴질 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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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09-2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읽고 갑니다. 재미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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