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외세 침략과 약탈로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화재나 도굴, 강탈로 소실 되었다.

1782년 정조가 강화도 행궁(行宮·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창덕궁 규장각의 부속시설로 설치했던 왕실 자료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866년 철종 재임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귀중 도서 340여 권과 지도 갑옷 등을 약탈해갔다.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을 약탈 했을 당시  외규장각에는 당시 조선 역대 왕의 글과 글씨, 의궤와 주요 서적, 왕실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도서는 대략  6000여 권 정도 보관 하고 있었지만 귀중한 보물의 상당수가 파괴되어 사라졌다.

1991년 서울대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청하면서 한국과 프랑스 간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프랑스 측에서 지속적인 반환 거부로 협상이 결렬 되었지만 경제적 실무 협약을 맺으면서 협상을 이어가다가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의궤 대여’(5년마다 다시 계약하는 대여 방식)에 합의해서 현재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관람 할 수 있게 되었다.19세기 말 무렵 부터 20세기 전반기 일제강점기와 근현대 수난기를 거치는 동안 한반도에서 사라진 문화재와 유물들이 국외로 반출되어 현재까지 해외에 남아있는 한국 문화유산은 공식 확인된 것만 약 25만 6천여 점에 달한다.

이 중 전체의 43.2%인 11만 6백여 점이 일본에 집중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당시 가장 압도적인 규모의 문화재 유출이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암암리에  자행 되었던 약탈과 도굴로 찾아낸 문화재들이  밀반출되어 개인이 은닉한 유물까지 합치면 실제 유출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조사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29개국 박물관·미술관 등에 분산된 한국 문화유산은 총 256,190점으로  일본이  110,611점에 달하는 한국의 문화재를 자국의 박물관과 사찰, 기타 개인 소장품으로 등록 시켜 놓았다.

반도체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이었던 도자기는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목적이 조선의 도공을 납치 할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한반도 전역을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해갔다.

이토 히로부미도 고려청자를 손에 넣자 마자 자신의 방에 모셔 두었을 만큼 일본의 한국 청자 사랑은 유별나다 못해 병적이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넘어간 유물은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의 도자기류와 고문헌(서적류), 고분 출토 장신구 및 불상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일본 지배층 사이에서 고려청자 수집 열풍이 불면서 무덤을 파헤치는 잔인한 도굴이 성행했다.

도굴에서 파낸 청자는 중간 상인들을 거쳐서 비싼 가격에 해외 컬렉터에게 넘겨 졌다.

1883년 조영통상조약 체결 이후 한국에 들어온 영국의 외교관, 의사, 선교사들은 조선 왕실 및 고위층과 교류하며 엄청난 양의 미술품과 민속품을 합법·비합법적으로 사들였는데 영국인들은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에 탐복해서 외교관·자산가·박물관이 삼각편대를 이루어 고려청자를 필두로 한 예술품과 민속품을 종합적이고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한국과 해외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애국적 수집가와 후원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구입한 한국의  청자를 국가에 조건 없이 기증 해서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과 호암 미술관 기타 지방 국립과 사립 미술관에서 청자를 볼 수 있다.

일본 다음으로 한국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 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으로  68,961점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과 영국은 선교나 목회 활동으로 한국에 체류 했던 종교인들과 외교 사절단으로 방문해서 장기 체류 했던 해외 관료들과 대사관 근무를 했던 외교관들 그리고 방대한 자금으로 컬렉션을 갖고 있던 수집가들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한국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손에 넣었다.

1909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독일 가톨릭 순교 수도회인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한국의 문화와 풍속을 깊이 연구했는데 이들 중에서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원장은 일제에 의해 한국 전통문화가 말살되고 헐값에 팔려 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조선의 일상 유물, 민속품, 양반가의 가구 등을 대거 수집하여 독일로 가져가 보존했는데 베버 총원장의 수집품 중에 조선 최고의 천재 화가 중 한 명인 겸재 정선 화첩이 있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겸재 정선 화첩(보물)'은 수도원 측에서  이 유물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난 2005년 한국(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 조건 없이 영구 기탁 형식으로 반환해 주었지만 여전히 독일 수도원에 한국의  많은 민속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절 전 세계의 문화재를 끌어 모은 영국은  서울 인사동으로 흘러들어 온 한국 유물과  일본, 중국의 골동품 시장에 유출된 문화재를 대영 박물관 예산으로 직접 대량 매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보급 유물인 고려시대 '나전칠기 경함'이나 '화엄경변상도', 삼국시대 금귀걸이 등이 영국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편입되었다.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초정밀 공예품인 고려 나전칠기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단 20여 점밖에 남아있지 않은 초희귀 유물품이 되었다. 20여점 중에 7점이 현재 일본 도교 국립 박물관에 국보로 소장 되어 있다.

고려 시대의 정교한 기법을 이어받으면서도 조선 공예가들의 독창성이 꽃피기 시작한 조선 전·중기(15~16세기) 나전함은 임진왜란 당시 약탈 당하거나 화재로 소실 되어서 현재  전 세계에 단 4점만 남아 있는 초희귀 유물이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전함 (1점)은 조선 중기에 제작되었고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나전함 (1점)은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2023년 일본에서 환수된 나전함 (1점)은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일본의 한 개인 수집가에게 사들인  16세기 경에 제작된  나전함이다.


 8~10년 정도 자라야 옻액을 채취할 수 있는 옻나무에서 채취하고 걸러 내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옻칠로 가공한 상자에 4만 5천여 자개조각을 길고 가느다란 모양으로 오린 후, 아교를 바른 바탕 위에 칼로 끊어가며 붙여 장식하는 끊음질 기법과 타찰법으로 무늬의 균열을 내어 다양한 형태의 연꽃과 넝쿨 줄기 밤하늘을 수 놓은 별빛 처럼 새겨져 있다.

유럽과 이슬람권 등 다른 문화권에도 조개껍데기를 가구나 목재 상자 표면에 박아 넣는 장식(Inlay) 기법은  존재했다.

하지만 조개껍데기를  실처럼 가늘게 자르고(끊음질) 의도적으로 깨뜨려(타찰법) 보석처럼 수놓는 기법은 한국(조선)이 세계에서 유일한 독보적인 기술이었다.연꽃 봉오리, 잎받침이 있는 연꽃, 활짝 핀 연꽃들이  뒤얽힌 넝쿨 줄기와 이파리, 칠보무늬의 장식이 언뜻 보면 별 것이 아닌 듯한 상자로 보이는 나전 칠 연꽃넝쿨무늬 상자는 나라를 잃은 우리 조상들 처럼  400년 동안 해외를 유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옻나무 껍질에 칼·긁기낫 등으로 홈을 내면 옻나무가 상처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하얀 수액을 내보내는데 이 수액을 주걱칼로 긁어내 채취한 것을 옻 또는 옻액이라 한다. 옻액을 가공하여 만든 도료가 바로 옻칠로 전복·조개 등 어패류의 껍데기를 얇고 판판하게 갈아 자개로 가공한 뒤, 이를 옻칠한 바탕에 붙여서 꾸민 기물을 나전칠기(螺鈿漆器)라 합니다.

옻칠을 수십 번에서 수백 번까지 겹겹이 두껍게 바른 뒤, 그 층을 조각칼로 파내어 입체적인 무늬를 표현하는 조칠(彫漆) 기법을 사용했던 중국은 붉은색이나 검은색 옻칠의 단단하고 두터운 질감을 바탕으로, 꽃, 용, 인물 등 웅장하고 화려한 문양을 깊이 있게 조각하여 압도적인 입체감과 묵직한 나전칠 공예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통일신라 시기부터 각종 생활 용품에 나전칠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한반도 장인들은  자개를 길고 가느다란 모양으로 오린 후, 아교를 바른 바탕 위에 칼로 끊어가며 붙여 장식하는 끊음질 기법으로 장식해서  특유의 광택과 색감에서 느껴지는 영롱한 아름다움을 새겨 넣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옻칠로 기물 표면에 그림을 그린 후, 굳기 전에 금속 가루의 굵기와 농도를 조절하여 그라데이션을 주거나, 옻칠을 두껍게 올려 입체감을 더하는  마키에 기법으로 화려함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0년 생 옻나무에서만 옻액을 체취 할 수 있고 나무마다 하루에 체취 할 수 있는 양이 한정 되어 있고 수액 추출 후 불순물을 걸러 내어야 하기 때문에 옻액은 국가에서 전적으로 관리 했습니다.

​​인류가 기원전 3000여 년 전부터 사용해 온 공예 재료이자 기술인 옻칠은 천연 페인트 역할 뿐만 아니라 습기와 화염에도 견뎌 낼 수 있는 방부제 성분을 함유 했기 때문에 각종 무기류나 철이 녹스는 걸 방지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물과 가구 그리고 생활 소품까지 널리 사용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옻칠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던 일본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군수용품과 무기 제조에 옻칠을 사용하기 위해 한반도 전역에 자생 하고 있던 옻나무들의 수액을 추출해서 옻액을 추출하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한반도의 문화 유산을 마구잡이로 도굴 했고 귀중한 문화재를 수집하는데 광적으로 달려 들어서 한국의 조선 자기 보다 쉽게 손에 넣기 힘들었던 나전칠 공예품은 일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수십 점이 전해지는 고려나 조선 후기 나전 유물과 달리, 현재 확인된 조선 중기 나전칠 공예품은 세계적으로 4점 정도만 남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세계를 떠돌고 있는 한국의 문화 유산을 적극적으로 환수 하는데 앞장선 민간 후원자(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친구들/YFM)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3점은 현재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있고 나머지 한 점은 일본 도쿄 국립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데 현재 일본은 조선의 나전칠 공예품을 국가 보물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에도 시대 다이묘(유력 영주)들의 수집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조선 장인들이 혼으로 조각한 나전칠기

1551년 불타버린 오우치 궁궐의 불길을 견디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매료시킨 후 마침내 고국의 품(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조선 나전 칠 연꽃넝쿨무늬 상자'의 파란만장한 대 서사시  5분 13초 영상에서 만나 보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397년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에서 시작해, 1551년 불타버린 오우치 궁궐의 불길을 견디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매료 시킨 후 마침내 고국의 품(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조선 나전 칠 연꽃넝쿨무늬 상자'의 파란만장한 5분 13초의 대서사시를 @Scott-MoveableFeast 채널에서 만나보세요. 

4만 5천 개의 미세한 자개 조각과 장인의 집념이 빚어낸, 시공간을 초월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세상의  하루는 24시간으로, 1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눠진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들처럼 본능적으로 시간을 알지 못하기에  24시간 시계를 보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통상  24시간 시계는 밤 12시(자정)에 시작해서 낮 12시(정오)까지가 오전(am)이고 정오가 지나면 오후(pm)가 시작된다.

1년의 시간 동안 겨울 동면을 취하는 동물이 아닌 인간은 자정에서 잠자리에 든 시간을 빼고, 자정부터 잔 시간을 더하면 잠을 몇 시간 동안 잤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오후 8시에 잠들었다면  자정 4시간 전으로  오전 7시 30분에 일어났을 경우  자정 시간이 7.5시간 지난 후이니 이 둘을 더하면 4+7.5=11.5시간 동안 숙면을 취한 것이다

시간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초 단위, 분 단위, 시 단위로 쪼개서  감각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숫자로 환산 시켜 보면 어딘가로 이동한 거리에 걸린 시간을  분 당 몇 걸음, 시간 당 몇 마일, 몇 킬로미터로 측정해 볼 수 있다.

오늘 일어난 각종 사건이나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미리 예측하거나 예상 해 볼 수 없지만 연간, 월간 스케줄러에 일지를 기록 하듯 시간을 기록해 본다면  하루 중 먹고 자고 씻고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24시간 중에서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3-4시간 정도 뿐이다.

 이 시간 조차도 부득이하게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출퇴근 이동 시간까지 포함하면 2시간이 채 되지 못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휴일 조차도 24시간 온 종일 멍 때리지 못하는 것처럼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려 있는 인간의 삶의 방향이나 지향점 모두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적 선형선 위를 걸어가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다.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유명한 사람도 유명하지 않은 사람도, 어린이도 어른도, 선인도 악인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이 할당 된다.

7월의 첫 주말 24시간을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공평하게 자른  버터 조각을 갓 구워낸 빵에  발라 먹듯이  시작해 보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비종 2026-07-0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평하게 자른 버터 조각을 갓 구워낸 빵에 발라 먹듯‘ 하루를 시작하는 건 어떤 걸까요?
스마트한 개가 보여준 9초 덕분에 오후의 시간에 잠시 미소가 더해졌습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빅맥 값을 비교한 빅맥지수(Big Mac Index)는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1986년 처음 만들어서 매년 1월과 7월에 발표되어왔다.

지금까지 빅맥지수는 각 나라의 물가 수준과 화폐 가치를 평가하는 경제 지표로 자리 잡으면서 스타벅스 커피값을 비교하는 '라테 지수', 이케아 가구 제품 가격을 비교하는 '이케아 지수' 등과 같이 전 세계 다양한 도시에 수 천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의 대표 상품들의 가격 책정 변동에 따라 나라별 체감 물가 지수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명 커피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는 맥도날드 매장 보다 모퉁이만 돌아가면 간판이 보이는 별다방 가격 지수에 더 민감하다.

 하지만 점심 단골 메뉴 한 끼를 만 원으로 해결 하기 힘들 정도로 물가가 치솟으니 가성비 좋은 커피를 찾아 마시거나 인스턴트 스틱 커피로 휴대 하는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커피 가격 지출을 줄일 수는 있다해도  물가가 급등할 때 마다 가성비 반찬으로 식탁을 지키던 김 가격이 치솟아서 즐겨 사 먹던 김밥이 가격이 두 배로 급등하거나 조미김 한통에 김이 10장에서 8장으로 줄어 들게 되면  이보다 더 속상할 수가 없다.

기후 이상으로 바다 온도가 상승해서 발생하는 적조현상으로 인해 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한국의 김은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 잡아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싹 쓸어가는 대표적인 상품이고 K푸드 열풍에 냉동 김밥 수출양이 대폭 늘어나서 수출로 물량이 빠져나가게 되어  국내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김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김 생산량이 많은 일본은  그동안 반 세기 넘게  세계 김 수출의 60퍼센트를 장악했던 시절도 있었다.

일본은 7세기 무렵 부터  미역보다 얇은 바다말을 얇게 펼쳐 말려 먹었다. 이 바다말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던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에 입성하고 나서 부터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안정된 식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에도성 앞에 어장을 조성했다.

 그 시절에 생겨난 어장은 가니스기, 혼시바. 시나가와로 점차 이 어장이 번성하면서 주변에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어장과 상권이 번성하기 시작하자 시나가와가 주변 포구를 총괄 하는 중심 어장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김 양식을 재배 했다.

17세기 에도에 시나가와에서 생산한 김은 색은 붉고 형태는 닭 벼슬처럼 작고 비린내가 난다 해서 노리(海苔)라 불렀다.

 이 시절에 김을 가공하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사찰에 종이를 대량 공급했던 아사쿠사 제조자로 당시 아사쿠사는 헌 종이를 수거 해서 재생종이를 생산했던 수공업체였다. 종이를 가공했던 수공업자가 미역보다 가는 김을 종이처럼 건조 시키는 방법을 고안했다.

바다에서 수거한 바다말을 담수에 섞어 대나무 판지에 얇게 펴서 바람에 건조 시키고 나서 숯불에 살짝 구우니 비린 냄새가 사라졌고 태운 종이처럼 입 속에서 바삭거리다 스르르 녹아 내리자 일본인들은 밥에 싸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공한 김을 조미한 간장에 찍어 먹으면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은 김을  바다 채소라 불렀다.

 일본이 김을 종이처럼 얇게 가공 하기 훨씬 전부터 한국은 13세기 말인 신라 시대 부터 바다에서 김을 건져서 건조 시켜 먹었다. 

삼국 시대 때 김은 혼인을 앞둔 왕의 폐백 품목 중 하나였고  조선 시대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검은 바다풀이였다.

이 검은 바다풀이 김이라 불리게 된 건  조선시대 인조 임금이 자신의 수라상에 오른 검은 바다풀을 맛있게 먹고 무슨 음식인지 묻자 한 신하가 음식 이름은 모르고 전남 광양에 사는 김여익이란 자가 만든 음식이라 답했다.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김여익이 만든 바다풀이라 해서 그의 성을 따 ‘김(金)’이라 부르게 했다.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김밥의 기원은 일본 마키스시(巻き寿司)의 일종인 '노리마키(海苔巻き)'에서 왔다. 

에도 사람들은  식초와 설탕을 섞어 넣은 밥에 김을 싸서 먹기 시작했고 각종 속재료를 넣고 대나무발로 말아 원통형으로 만든 '후토마키(太巻き)'는 메이지 시대 들어서면서 부터 만들어 먹었다. 

메이지 시대때 '후토마키(太巻き)'의 속재료는 생선회였다.

1930년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들어 온 일본식 김밥은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 되어서 당근과 계란, 우엉, 햄, 깻잎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대체됐다.

일본은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노리마키의 기본이 되는 식초와 설탕으로 밥에 초절임을 하는 방식이 사라졌고 현재 일본 식당에서 파는 김밥은  미원과 소금, 참기름을 넣고 속재료도 한국 처럼 다양하지 않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김과  즐겨 먹는 김밥이 어느 나라에서 먼저 유래 되었는지 따지기도 전에 한국의 김밥은  일본의 라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한국의 식재료와 뛰어난 조리 기술로  다채롭게 발전 시켜 나간 음식이다.

햄버거 한 개 먹은 포만감 보다  김밥 몇 줄을 먹은 포만감은 세계 물가 지수 지표로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김밥은  한국인에게 무척 특별한 음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