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맞게 옷을 바꿔 입듯이  읽게 되는 책이 있다.

인간 영혼의 밑바닥을 잔혹하게 파헤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겨울을 앞둔 11월에 꺼내 읽고 삶의 의미와 진실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톨스토이 작품은 차가운 공기와 눈이 내리는 겨울에 꺼내 읽는다.

무덥고 습한 공기가 짓누르는 계절에는 따스한 시선으로  다양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체홉의 단편을 읽기 딱 좋다.

안톤 체홉이  1896년에 발표한 짧은 소설 <다락방이 있는 집>에서 화가인 주인공이 어느 날 지주 벨로쿠로프의 영지에 머물렀던 몇 년 전 일을 회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잘못하여 나는 낯선 어느 사람의 저택에 무심히 들어갔다. 해는 이미 기울어질 때였으므로 꽃이 핀 호밀 위에 황혼의 햇살이 길게 비치고 있었다. 좁아서 답답할 만큼 두 줄로 빽빽이 심어진 몹시 키가 큰 늙은 전나무가 빈틈없는 두 개의 벽처럼 줄 지어서 어둡고 아름다운 가로수 길을 이루고 있었다.

-안톤 체홉의 '다락방이 있는 집' 중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을 잘 못 들어 선 화가는  어느 저택에 우연히 들어 가게 된다.

저택의 주인이자 지주인 벨로쿠로프는 뜻밖의 손님이 자신의 집에 찾아 오자 가족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함께 먹자고 제안한다.

화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지주 벨로쿠로프의 두 딸을 만나게 된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고 활달한 성격에 언변이 뛰어난 큰딸 리자와 대화를 하던 화가는 길게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떤 대화든지 논쟁으로 이끄는 학창 시절 버릇이 불쑥 튀어나와 버린다.

화가는   혼자 흥분하며 지루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다가 그만 식탁 위에 있는 소스 통을 옷 소매로 쳐서 넘어뜨리는 실수를 하고 말지만 두 자매는 이를 못 본 척 넘어간다.

처음 만난 화가와 열띤 토론을 벌이는 언니 리자와 달리  동생 제냐는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들을 뿐 대화에 저녁 식사 내내 끼어들지 않았다.

두 자매의 서로 다른 모습을 유심히 살펴 보던 화가는 지적인 아름다움이 넘치고 활달한 성격의 언니 리자 보다 조용한 성품의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제냐의 매력에 끌리게 된다.

'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지 못했다. 그녀가 나를 좋아 하지 않는 이유는 내 그림이 풍경화이고 그림 속에 민중의 가난함이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깊이 믿는 것에 대해 내가 무관심 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주와 격이 없는 사이가 된 화가는 막내 딸 제냐와 우연이라도 마주치기 위해 집으로 가는 길에 일부러 벨라코프 영지를 지나간다.

화가는 언니 리자와 늘상 의견대립을 해서 논쟁에 휩싸이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동생 제냐와는 조금씩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는 제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제냐는  가족들이 허락하면 받아들이겠다 라는  말을 하고는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한 달의 시간이 흘러  화가는 제냐가 어머니와 함께 외국으로 가기 위해 숙모집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언니 리자에게 듣는다. 

'저는 제 고집으로 언니를 슬프게 하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행복하시기를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와 어머니가 얼마나 애처롭게 울고 있는지 알아주셨으면...' 

그 날 이후로 화가는 제냐의 소식은 듣지 못하고 언젠가 크리미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지주 벨로쿠로프를 만나 두 자매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리자는 여전히 셀코프카에서 생활하며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차 자기에게 공명해 주는 사람들의 서클을 만들어 그들 만의 강력한 당을 결성하여 지난번 선거와 같이 군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있던 발라긴을 밀어냈다고 했다. 제냐에 관해 벨로쿠로프가 알려 준 것은 그녀가 이미 집에 있지 않다는 것과 현재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화가는 차츰 두 자매가 살았던 그곳, 다락방이 있는 집을 잊고 살다 아주 가끔 그림을 그릴 때나 책을 읽고 있을 때 문득 그 시절 그 다락방 창문에 비친 녹색 빛 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있던 제냐(미슈스)를 떠올린다.

언제나 무위도식 하는데 대한 변명 거리를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 대 저택의 여름날 휴일 아침은 특히나 매력적이었다. 아직 이슬에 촉촉이 젖은 초록색 정원이 온통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 집 주변에 자라난 목서초와 서양협죽도의 향기가 풍길 때, 그리고 교회에서 방금 돌아온 젊은이들이 정원에서 차를 마실 때, 모두가 아름답게 옷을 차려 입고 흥겨워할 때, 이 건강하고 아름답고 배부른 사람들이 긴긴 여름 내내 빈둥 대리라는 사실을 실감할 때, 모든 인생이 그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지금도 나는 똑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정원을 거닐고 있다. 일도, 목적도 없이 온종일, 여름 내내 그러고 싶었다. 

-안톤 체홉의 <다락방이 있는 집> 중에서

사방에 꽃들이 만발한 5월의 마지막 주,  기차에 올라타서 체홉의 단편을 설렁 설렁 넘기기 딱 좋은 날씨다.

미세먼지가 없는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서 살랑 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5월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