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이 사용하는 snob에는 여러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로지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 쓰는데만 몰두 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와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모두가 좋다고 하는 걸 무조건 선망하는 인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인간을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쓰는 snob과는 의미가 상당히 멀고 이민자들이나 외국인들 그리고 십대들은 '저 인간 **없다'라는 의미로 아주 많이 쓰고 있지만 영국 본토인들이 쓰는 이런 은어적 의미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이 많다.
한국에서 속물俗物이라는 단어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영어 snob에 한자어를 조합해 속물俗物이라 명명했는데 속인(俗人)스러운 인간의 의미로 6세기에 일본에 전파된 불교에서 널리 통용되었던 단어였다.
박완서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의 주인공의 두 번째 남편은 지방신문사에서 유명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인물로 돈이나 명예 같은 건 초월하고 오로지 취재와 글쓰기에 몰두 해 보이는 남자였다.
두 번째 남편 역시 또 다른 종류의 <속물>이라는 걸 깨닫고 세 번 결혼하는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세 번째 남편은 어떤 부류의 남자였을까?
'과연 그는 그의 철저한 배금주의를 조금도 위장하러 들지 않았다. 한 밑천 잘살아보자 그의 동분 서주는 이 한마디에 요약 됐다.'
세 번의 결혼 모두 이혼 도장을 찍어버리는 주인공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자신이 선택한 세 명의 남자와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주인공은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고 동생들과 피난을 다니는 동안 굶주림과 가난에 허덕이게 되자 어머니의 등에 떠밀려서 미군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게 된다.
태생적으로 조그만 실수에도 부끄러워 하고 자잘한 칭찬에도 창피함을 느꼈던 주인공은 전쟁-가난 그리고 세 번의 이혼으로 어느 덧 부끄러움 같은 걸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성격이 된다.
세 번의 결혼에서 이혼 도장을 찍고 다시 혼자가 된 주인공은 어느 날 종로 한 복판에서 일본 관광객을 이끌고 다니던 한 가이드가 '소매치기를 조심하세요'라는 일본어를 듣게 되자 그녀의 가슴에 '부끄러움'이란 등불이 켜진다.
그녀의 속물스러운 세 명의 남편들 모두 태생부터 속물적인 인간은 아니였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부끄러움으로 무장 했지만 전쟁이 터지고 악착 같이 살아남아 잿더미와 폐허 속에서 삶을 일구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속물>적인 인간이 되었다.
살기 위해 부끄러움을 버린 남자들 그 남자들을 세상에서 독하게 살아남게 만든 어머니들의 모습이 세파에 시달리면서 서로 다른 인생의 갈림길에서 실타래처럼 엮여져 있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툭하면 '이 웬수 같은 놈의 새끼들' 하며 아이들을 불문곡직하고 흠뻑 두들겨 패주는 버릇이 생겼다. '이 웬수야 뒈져라 뒈져, 칵 뒈져' 하며 정말 전생의 원수라도 노려보듯이 아이들을 노려보며 삿대질을 하던 무서운 어머니와 아이들의 악머리 끓듯 하던 울음소리를 나는 지금도 끔찍스러운 지옥도의 한 폭으로 생생하게 기억한다.'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중에서
영미권 국가와 달린 한국의 뿌리 깊은 전통 문화와 관습에서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울타리 속에서 '부끄러움'에 대한 교육이 철저했다.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했고 역사 앞에서 후대인들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기도 했다.
'부끄러움'은 사회에서 나와 관계를 맺게 되는 모든 것들과 연결 되어 있다.
가족끼리 '부끄러움'을 모르면 드러나지 않게 상처를 입게 되고 학교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면 폭력, 왕따등의 험하고 위험한 행위로 이어지고 직장에서 자신이 저질러 놓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모르게 된다면 회사에 막대한 피해를 주거나 속해 있는 팀원 전체에게 큰 불이익을 주게 된다.
이 '부끄러움'이 가정과 학교, 사회로 확장해 나가게 되면 우리 사회 곳곳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얼마 만큼의 피해를 입고 있는지 각종 사건, 사고를 통해 훤히 드러나고 있다.
애초에 '부끄러움'이 뭔지 모르면 누구보다도 떳떳하게 살게 된다.
죄를 지어도 그 죗값에 맞는 형벌을 받지 않게 되니 피해자에 대한 사죄나 부끄러움 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상식보다는 음모, 이성보다는 분노,탐욕, 기회주의, 불안감이 얽히고 설켜서 ‘내편’과 ‘네편’을 가르고, 네편을 비판할 때는 합리적 잣대를 들이대지만 내편 비판에는 애써 눈을 감는다.
사회에 중심이 되어야 할 정치인과 지식인층은 자기편에게 불리한 사법 판단이 나오면 불복과 인신공격으로 대응하고, 반대편에게 불리한 사법 판단에는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낯 뜨거운 언행이 일상화 되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뻔뻔한 모습을 전 국민에게 자랑하듯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더해 유튜브를 기반으로 하는 사이비 언론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부 전통 미디어 매체가 이런 추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더 지피고 있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인간 답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다. 부끄러움을 알면 개과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면 금수와 다를 바 없다
앞으로 이 사회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만 살게 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부끄러움은 학습할 수 없다.
어디서 배워 얻는 것도 아니다.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혹은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이 나을꺼다.'
-박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