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른 새벽에 근처 공원 빗자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중년의 남자가 있다.

침대도 TV도 없는 좁은 다다미방에 이불을 개고 화분에 물을 준 이 남자의 이름은 히라야마

‘도쿄 토일렛(Tokyo Toilet)’이란 문구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매일 새벽마다 도쿄 시부야에 있는 공공 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는 청소 일이 끝나면 인근에 있는 대중 목욕탕에 들려서 깨끗하게 몸을 씻는다.

목욕을 마치고 나면 지하철을 타고 아사쿠사역에서 내려 단골 지하 선술집에서 하이볼 한잔을 마시며 조촐한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친 남자는 지하철을 타고 깔끔하게 정리된 집으로 돌아와 지난번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본을 읽고 하루를 마감한다.

홀로 살고 있는 도쿄의 어느 중년 남성의 완벽한 하루를 보여주는 영화<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 히라야마는 집과 직장을 오고 가며 카세트 테이프로 록 음악을 듣고 틈틈이 주변 공원을 산책하며 카메라로 나무를 찍으며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동안 평온한 일상을 깨는 일이 터지거나 어떤 불운한 운명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하루 하루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동안 연락이 뜸했던 여동생의 딸 니코가 찾아와 몇 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 이 남자의 얼굴에서 행복과 환희, 후회와 회한 그리고 슬픔의 그림자들이 간간히 드러난다.

도대체 이 남자는 왜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단골 헌책방에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공포와 불안의 차이>라는 책을 구입하는 이 남자는 단골 술집 주인이 '히라야마씨는 참 지적이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멋쩍어 하는 이 남자는 동년배들처럼 삶에 찌들리거나 가족에 둘러 싸여 왁작 지껄하지 않은 현실의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린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현인으로 보인다.

집을 나가버린 딸 니코를 데리러 온 남자의 여동생은 개인 운전사가 운전하는 멋진 자동차에서 세련된 모습으로 등장하며 오빠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손수 마련한 도구로 공중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는 남자에게 젊은 동료는 이렇게 묻는다.

'뭘 그렇게 까지 하세요? 어차피 더러워 질 텐데.'

화면에서 보여지는 이 남자의 하루의 시간은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 하다 보면 단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나 진솔하게 대하며 매사 성실한 자세로 살아가고 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처럼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면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예순 살의 혜숙은 매일 아침 출근이 시작 되기 전에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사람이다.

청소를 마치고 나면 혜숙은 친구가 사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친구는 혼자 되어 딸을 부양 해야 하는 혜숙을 자신의 집에 살게 했다. 친구의 배려에 고마웠던 혜숙은 친구 집 정원을 관리 해 주고 있다.

오피스텔에서 청소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다 잠든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 혜숙에게 소설가인 딸 미래는 상에 떠도는 말들, 유행하는 것들, 드라마, 영화, 연애, MBTI, 새벽 배송 같은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엄마인 혜숙의 단조로운 인생에 속도를 내게 만들기도 하고 급브레이크를 밞게 만들기도 한다.

[“난 살면서 몇 번이나 울었나 무엇이 나란 사람을 울리나 오늘 하루가 왜 끝나질 않지 해가 길구나 시간이 다르게 흐르네. 그런 생각을 했다. 깜깜한 밤에 좁은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을 땐 앞으로는 나란히 누울 일이 없겠다 그런 생각을.”]

-이주란의 〈겨울 정원>중에서

매일 단조로운 삶을 살던 혜숙의 삶에 모임에서 만난 어떤 남자가 마음 속에 파고 들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얼어 붙은 마음에 씨가 뿌려지고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때 난 오인환씨를 알게 된 후의 내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엔 누가 보지도 않는데 누가 보는 것처럼 너무 조심하며 살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 빨리 내 본모습을 보인 것도 후회되지 않았다. 후회는 할 때도 있지만 될 때도 있는데 둘 중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한데 또 너무 단순한가.]

그동안 그냥 살아야 해서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혜숙은 누군가를 사랑 하고 부터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예순의 나이에 사랑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였다.

엄마 혜숙의 사랑이 시들어 버려서 어느덧 저 멀리 떠나 버렸을 때 딸 미래는 오랫동안 짝사랑 했던 상대와 드디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사랑이 떠난 후에 혜숙은 친구의 집 정원을 가꾸는 동안 슬픔을 삭히며 잡초를 뽑고 흙을 다진다.

중년을 지나 노년의 시간으로 접어든 혜숙의 삶에 꽃을 피울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겨울 내내 얼어붙은 정원일지라도 봄이 되면 싹이 트고 줄기를 뻗어 무성한 잎사귀를 티워 꽃을 피우듯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텅 비어 있는 겨울 정원일지라도 피지 않은 꽃을 기다린다.

2025년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 ‘겨울 정원’에서 보여주는 일상은 그 어떤 수치와 모욕이 삶에 틈입해도 슬픔에 지지 않으려는 마음, 고통에 엄살 부리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 살아지는 일상에 최선을 다해 사는 동안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많은 사랑과 슬픔이 마음의 정원 속에서 피고 지는지 보여준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가 잠들기 전에 읽은 책 중에서 고다 아야의 <나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쓰러진 나무 위로 자란 높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아직 어리디어린 나무를 시험 삼아 살짝 흔들어보았다. 줄기는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뿌리는 의외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가느다란 뿌리는 쓰러져 죽은 나무의 안쪽을 파고들어 껍질과 속살 사이로 촘촘한 그물을 펼쳐놓았고, 다소 굵은 뿌리는 바깥쪽을 타고 내려가는 형태를 띠고 있어서 얼른 지면에 도달하고 싶은 듯 보이는 자세다.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용맹함을 숨기지 않았다. 죽은 나무 위에도 조심스레 손을 올려본다. 차갑고 축축하다. 전날부터 내린 비 때문인지 흠뻑 젖어 있다. 하지만 나무를 직접 만진 것은 아니다. 나무의 온몸을 이끼가 빈틈없이 뒤덮고 있다. 자연이 입혀준 수의 (壽衣) 같다.]

-고다 아야의 <나무> 중에서


비 바람에 노목이 쓰러질 경우 바깥쪽 부터 썩어 들어가지만 가장 마지막 뿌리까지 썩으려면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10년 동안 노목의 썩는 동안 그 노목에게 영양분을 주는 나무들은 주변에서 40년에서 50년의 세월을 버텨낸 중년의 나무들이다. 노목의 썩은 기둥과 중년의 나무들이 만들어 준 그늘 아래서 어린 나무들이 함께 성장 하면서 거대한 산을 이룬다.

숲속에서 자생하는 나무의 시간은 인간 세상의 시간과는 많이 다르다.

오래된 나무는 그냥 죽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자란 나무도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정원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색과 향을 가진 꽃도 100일 이상을 버텨 내지 못하고 눈부신 의학 기술로 인간의 수명이 아무리 늘어 났다 해도 100년 가까이 살기 힘들다.

계절의 시간 속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기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도 수많은 슬픔과 웃음, 후회와 그리움이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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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01 0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더러워질텐데‘란 말에서 많은 감정이 떠오릅니다. 등산을 싫어하던 한 직장후배는 팀 단체 산행에 항상 빠지면서 팀장인 나에게 ˝어차피 내려올 일이라 의미없어서‘라고 단정하길래 내가 이 후배에게 들려준 지적은 ‘어차피 죽을텐데 넌 왜 숨을 쉬냐?‘였었다.

2025-11-01 2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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