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멜론 슈거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 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냥 마음에 떠오른 대로 불러달라.]


일 년 열 두 달 달콤한 냄새가 감돌고 어떤 꿈이든 실현되는 완벽한 낙원 '워터멜론 슈가에 살고 있는 나는 이름이 없다. 원래부터 이름이 없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이름을 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가 살고 있는 곳은 아이디아뜨(Ideath)다.

이 아이디아뜨(Ideath)는 '나’를 지칭하는 ‘I’와 ‘죽음’을 지칭하는 ‘Death’를 합쳐서 아이디아뜨(Ideath)로 즉, ‘내’가 죽은 곳에서 ‘이름 없는 나’가 모호하게 살고 있는 곳으로 그저 불리우는 대로 혹은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대로의 그 모습이 바로 ‘나’이다.


'나는 아이디아뜨 근처의 통나무 오두막에 산다. 나는 창밖으로 아이디아뜨를 볼 수 있다. 내 오두막에는 침대 하나, 의자 하나, 테이블 하나, 그리고 내 물건을 간직할 수 있는 커다란 농이 하나 있다. 그리고 밤이면 워터멜론 송어 기름으로 타는 등도 하나 있다.'


아이디아뜨에 통나무 집에서 살고 있는 '나'는 창가로 가 창밖을 내다 본다.

아이디아뜨에서는 요일마다 다른 색깔의 태양이 뜬다.

그리고 요일마다 그 태양을 닮은 워터멜론이 자란다. 붉은 태양이 뜬 월요일에는 붉은 색의 워터멜론이 자라고 검은 태양이 뜬 목요일에는 검은 색의 워터멜론이 자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마거릿이 찾아 오고 다음 날엔 프레드가 찾아 오고 잊힌 작품과 물건들에 관한 모호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프레드가 떠난 후 나는 워터멜론 씨앗으로 만든 잉크에 펜을 적셔 아래 지붕널 공장에서 빌이라는 친구가 만든 목판지에 글을 쓰는 작업을 시작한다.

  1. 아이디아뜨(좋은 곳)

  2. 찰리(내친구)

  3. 호랑이들

  4. 거울동상

  5. 척 영감

  6. 밤에 하는 긴 산책

  7. 워터멜론공장

  8. 프레드(내 단짝)

  9. 야구장

  10. 수로

  11. 에드워즈 박사와 학교 선생

  12. 아이디아뜨의 아름아운 송어 부화장

  13. 무덤조, 수직 통로

  14. 어떤 웨이트리스

  15. 앨, 빌, 다른 사람들

  16. 시내

  17. 태양 그리고 태양이 어떻게 변하는지

  18. 인보일(inboil/작중 등장 인물의 이름)과 그 일당 그리고 그들이 파낸 곳 즉 잊힌 작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짓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그들이 죽어버린 지금, 이 근방이 얼마나 조용해지고 괜찮아졌는지

  19. 매일 이곳에서 생기는 대화와 사건

  20. 마거릿 그리고 밤에 등불을 들고 다니는 그러나 결코 가까이 오지는 않던 여인

  21. 우리의 모든 동상, 무덤에서 나오는 빛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죽은 이를 묻는 장소

  22.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아온 내 삶

  23. 폴린(내가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다.)

  24. 그리고 백칠십일 년에 걸쳐 스물네 번째로 쓰이는 이 책

여기 이렇게 목록을 적어 나간 '나'는 잊힌 작품을 쓰는 동안 아이디아뜨에서 누군가는 불륜을 저지르고 누군가 자살을 하고, 호랑이에게 부모가 먹히며 아름다움을 칭송 하고 슬퍼한다.

모든 것이 설탕처럼 달콤 할 것만 같은 아이디아뜨에는 날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고 매번 다른 빛의 태양을 받은 수박들이 각기 다른 색깔로 자라는 기이한 곳이다.

아이디아뜨 도처에는 숲과 강이 흐르고 심지어 거실에도 강이 흘러 그 강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다니는 송어가 있다.

반면 사람을 잡아 먹던 식인 호랑이들을 전부 불태워서 멸종 시켜 버린 자리에 세운 부화장이 있다.

이런 유토피아적 세상과 정 반대로 타락한 세상인 '잊힌 작품'이라는 곳은 악당'인보일'들이 위스키를 퍼 마시며 술에 취해 꿈을 망각한 채 타락한 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다.

초목은 자라지 않고 짐승 한 마리도 살고 있지 않는 '잊힌 작품' 세상에 호기심으로 넘어간 마거릿은 자살을 하고 '나'는 폴린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1967년 미국 문학계를 뒤흔들며 순식간에 200만부가 팔려나간 <미국의 송어 낚시>에 뒤이어 발표한 <워터 멜론 슈거에서>는 날마다 다른 빛깔의 태양이 뜨는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상반되는 잊혀진 작품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나눠져서 자연과 문명,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그리고 현실과 신화가 단절된 세상이 마치 한편의 우화처럼 그려져 있다.

매 챕터 마다 달려 있는 소제목 아래에 간결한 문장으로 채워진 이야기는 앞선 이야기의 과거-현재-미래가 뒤죽 박죽이여서 장면이 전환 될 때 마다 시점과 시제가 뒤섞여있어서 동 시대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개 된다.

1960년대 히피 운동의 문학적 상징이 된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기계 문명과 상업자본주의로 타락하고 퇴폐화 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너머 '인간 중심주의'를 꿈꾸었다.

그가 앞서 발표한 작품< 미국의 송어낚시>의 중심에는 송어라는 상징이 자리 잡고 있듯이 <워터멜론 슈가에서>에서도 송어들이 마음껏 뛰어 노는 세상을 천국이라 지칭했다.

미국 땅에서 흐르는 강에서 가장 많이 살고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송어로 미국 문학과 철학에서 이 송어가 상징하는 의미는 목가적 이상형을 꿈꾸는 청교도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 속에는 '박공나무의 숲'이 허먼 멜빌에게는 거대한 '바다'그리고 마크 트웨인에게는 미시시피 강이 있듯이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 속에는 '송어'가 있다.



1967년 <워터멜론 슈거에서> 작품이 발표 되었을 당시에 미국 땅에서 더 이상 송어가 뛰어노는 하천을 찾기란 점점 어려워졌고 산업자본주의의 거침없는 확장과 팽창으로 오지와 대자연은 사라져서 송어들이 헤엄치던 곳은 야영지와 리조트가 됐다.


[내가 오래전부터 알아온 송어 한 마리가 무덤을 넣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치어 였을 때 아이디아뜨의 부화장에서 자란 송어였다. 내가 그걸 아는 이유는 그의 턱에 자그마한 아이디아뜨 방울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가 무척 많고, 몸무게도 무척 많이 나갔는데, 지혜롭게 느릿느릿 움직였다.]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고 있고 발생하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실체는 모두 모호하다

도대체 아이디아뜨는 무엇이고? 마거릿은 왜 자살했고? 폴린은 어디서 불쑥 나타났는지...라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앞 뒤 페이지를 여러 번 들춰 봐도 명확한 의미도 찾지 못하고 어떤 인간관계나 인물들의 구체적인 특성조차 알지 못한다.

일곱 가지 태양이 뜨는 아이디아뜨에서 일곱 가지 워터멜론이 만들어 내는 일곱 가지 워터멜론 슈가로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지는 오직 ‘나’만의 선택이고 또 ‘나’의 몫이기 때문에 ‘나’ 또한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워터멜론 슈거에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다시, 또다시 행해졌다.'


1960년대 미국 비트 세대의 우상이였던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해가 갈 수록 독자 수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발표한 작품들의 거듭된 실패로 인해 극심한 좌절감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마흔아홉 살이 되던 해 1984년 창을 열면 태평양이 보이는 호텔 방에서 수렵용 44구경 매그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난다.


[연주자들이 각자 악기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시작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몇 초 남았을 뿐이다, 라고 나는 썼다.]

그가 남긴 천국은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는 잊힌 작품 입구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6-17 0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디아뜨(Ideath)라는 단어를 보면서 문득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연상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만이 완전하고 영원불멸한 실재라고 했는데 서두에 나온 ‘천국은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는 문장과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06-1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