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사찰에서 나던 향 냄새, 계곡의 이끼 냄새와 물 냄새, 숲 냄새, 항구를 걸어가며 맡았던 바다 냄새, 비가 내리던 날 공기 중에 퍼지던 먼지 냄새와 시장 골목에서 나던 과일이 썩어가는 냄새,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한의원에서 약을 달이던 냄새…… 내게 희령은 언제나 여름으로 기억되는 도시였다.]
서른 두살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 직장을 구한 바닷가 작은 도시 ‘희령’으로 떠난다.
지연은 서울 땅을 벗어 나면서 열 세살 무렵 할머니가 살고 계신 희령에서 열 흘 동안 보냈던 그해 여름을 떠올린다.
버스를 타고 산 속에 있는 사찰을 갔던 기억, 집 근처 바닷가를 거닐며 시장에서 갓 튀긴 팥 도넛과 꽈배기를 먹었던 기억, 열 세살 소녀 지연의 눈에 희령의 여름 하늘은 서울의 하늘 보다 더 높고 푸르렀다.
2017년 1월의 어느 날 20여 년 만에 희령으로 내려가는 지연, 이제부터 이곳 천문대 연구원에서 새 삶을 시작 할 것이다.
[흰 빛이 사람을 압도하고 두렵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한번은 폭설이 그친 무렵, 눈 덮인 논가 국도를 달리다가 가슴이 심하게 뛰고 숨쉬기가 어려워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워둔 적도 있었다. 마음의 보호대 같은 것이 부러진 기분이었다. 덜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가 사라진 것이다.]
지연은 천문대 첫 출근 한 날 부터 결혼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작년에 이혼 했다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편친 않았다.
친구 지우는 지연의 외도한 남편을 개새끼,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나쁜*,미친*,이라며 서울 땅을 떠난 지연을 대신해 마음껏 욕을 퍼붓는다.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밖으로 꺼내 보일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한 상처를 받은 사람은 내가 받은 상처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을까?
지연은 낯선 땅 희령에서 마음이 없는 사람, 상처 받지 않은 사람 처럼 살기로 마음 먹는다.
자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시시콜콜 캐묻는 사람들이 싫어서 이곳으로 왔지만 서울과 달리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희령에서 지연은 간절히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그리워 하게 된다.
지연이 희령에 내려 온지 두 달이 훌쩍 지나서야 엄마가 찾아 온다.
딸의 젊음을 아까워 하며 남자를 다시 만나 보라고 채근 하는 엄마, 하지만 이제 지연은 남자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다.
남자라는 울타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는 엄마 , 엄마의 삶은 평생 동안 남자와 그 가족으로 부터 착취 당하기만 했다.
도박 하지 않고 여자 때리지 않고 바람만 피우지 않는다면 그 남자와 평생 함께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엄마, 바람 한 번 피운 건 당연히 용서 해 줘야 하고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엄마
[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도리어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남편과 그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작 자신의 엄마를 20여년 동안 만나 보지 못한 지연의 엄마,이제 그녀의 딸 지연이 13 살때 만난 이후 보지 못했던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4월을 앞둔 토요일 저녁, 동네를 산책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어떤 할머니를 만나는데 가볍게 목례만 했던 지연에게 할머니는 쇼핑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건넨다.
자신의 손녀와 닮았다고 말하는 할머니, 그렇다. 지연의 엄마를 낳아 준 할머니,13살에 딱 열흘 동안만 함께 있었던 할머니와 다시 만나게 된 지연
할머니는 자신의 손녀 지연의 최근의 삶에 관해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
남편은? 아이는? 그리고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 등등에 관해서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이제 지연은 퇴근 후 자연스럽게 친구 집을 드나들듯 할머니 집으로 향한다.
할머니는 손녀 지연의 얼굴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한쪽 눈은 외꺼풀, 다른 한쪽은 쌍꺼풀이 진 눈매에 숱이 적은 눈썹, 둥근 이마와 짧은 턱 그리고 작은 귀까지 닮은 손녀 지연
지연은 할머니의 기억을 통해 자신과 닮은 증조 할머니의 삶과 마주 하게 된다.
[처음 천주를 믿은 조상은 마부 였다. 모시고 살던 양반이 이제 우리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천주님을 함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자 그는 주인이 정신이 나가버린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지연의 할머니의 아버지 집안은 천주를 믿다가 집안 사람들 중 대부분 귀에 화살이 꽂힌채로 죽거나 온 몸의 뼈 마디가 부러지도록 맞고 처형 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산 속으로 들어가 숯과 옹기를 구우며 겨우 삶을 연명해나가며 천주를 믿었다. 천주를 믿지 않는 이들은 조상을 모시지 않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옹기쟁이의 아들은 목수가 되었다.
지연의 시선을 사로 잡은 건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미소를 지은 두 여자였다. 그 중 한 명은 지연과 놀랄 정도로 닮은 얼굴이다. 황해도 삼천에서 백정의 딸로 태어나 이름 대신 ‘삼천이’라 불린, 지연의 증조 할머니
열 일곱 살의 삼천이는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고향 삼천을 떠나 옹기 쟁이 집안 개성으로 시집을 간다.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 ]
이제 부터 지연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백정의 딸 삼천이의 삶 속으로 들어 간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질흙 같은 밤보다 더 어두웠던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전쟁, 피란 등의 죽음의 고비 앞에서 남자들은 외도를 저지르고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과거를 속이고 아무렇지 않게 여자들의 삶을 짓밞는다.
고단한 삶의 굽이 굽이마다 여성들의 눈물을 대신 닦아주며 위로해 주고 기댈 수 있는 이들은 함께 고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다.
증조모 삼천에게 평생의 친구 새비가 있었고 지연의 할머니 영옥에게는 오래도록 그리워 하고 보고 싶어하는 희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연에게는 누가 있을까? 친구 남편의 외도와 뻔뻔한 태도에 맘껏 개새끼라고 욕해주는 친구
하지만 정작 지연의 엄마는 딸에게 이런 말을 내뱉는다.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넌 이보다 잘 살 수 있는 애였어. 똑똑하고 밝고, 너 같은 애가 내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
1930년대 증조모 삼천이의 삶, 1950년대 할머니 영옥의 삶,1980년대 엄마의 삶, 그리고 2017년 지연의 삶이 교차 하면서 '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떤 일을 당해도 전부 여자 탓이라는' 운명의 수레 바퀴처럼 연결되어 굴러간다.
딸을 가진 부모는 시댁에게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시대 , 남편에게 맞서다가 두대, 세대 얻어 맞고 분풀이 하듯 얻어 맞고 살아야 하는 딸,
남편에게 맞고 사는 딸에게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얼마나 발버둥 치며 살아야 할까. 어떤 식으로 저항해야 이런 굴욕적인 결혼 생활을 끝낼 수 있을까?
맞아도 참고 살라는 엄마, 그 엄마는 아버지에게 얼마 만큼 분노 하며 발버둥 치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나를 백정의 딸이라고 경멸하는 눈빛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화가 난다. 나는 외롭다. 나는 상황이 변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여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경멸받고 싶진 않다.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평생 동안 억울한 감정을 억누르고 울화가 치밀어도 밖으로 표출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인생의 주도권을 그렇게 빼앗긴 채로 살아가야 했던 증조 할머니,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지연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껍데기 처럼 입을 다문 채 결혼이라는 생활을 유지 하고 가족을 지켜내며 이해 받고 사랑 받고 싶어했던 우리 어머니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 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저 진심 어린 사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척이라도 해주길 바랬다.
설사 마음속에서 우러 나온 진심이 아니여도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헌신적으로 인내하는 아내의 삶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사과의 말이라도 내뱉기 바랬을 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 받거나, 상처만 받아온 어머니,누가 그녀들의 삶을 위로해주고 기억해 줄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증조모의 삶에서 시작 된 이야기는 현재의 '지연'의 삶으로 서서히 그 간격들이 좁혀져 나가면서 4세대에 걸쳐 질흙 같은 어둠의 세월을 견뎌낸 여자들의 삶은 은은한 빛깔 처럼 빛나고 빛바랜 사진 속에 미소처럼 주변을 환하게 밝혀 준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어했던 때로는 간절하고 절실하게 세상에 시달리고 가족들로 부터 모진 말을 들어도 견디고 버티고 인내 했던 우리 어머니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 했던 사람들, 이 책은 그렇게 우리 어머니들의 삶에 관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