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은행잎이 유난히 바스락거리던 저녁, 정호승 시인의 강연을 들었다. 주제는 '내
인생에 힘이 되어 주는 시', 부제는 '사랑과 고통의 본질과 이해'. 지금까지 들었던 다양한 강의 중 단연 최고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울린다.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찾는 긴 여정을 언제 해보았던가? 사랑과
고통은 함께 한다는 것.....도 오십을 바라보니 이해가 된다.
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탕자의 귀향'을 쓴 헨리 나우웬의 '관계가 힘이 들때 사랑을 선택하라' 는
단순한 진리가 울림을 준다. 그동안 사람이 싫으면 미움과 증오를 선택하며 살았는데 그냥 사랑을 선택하라는 말......도 신선한 자극이다.
상대방이 선택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내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

시인의 작품중 특히 마음에 드는 '풍경 달다'를 읽으며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슴 한구석이 애잔해진다. 20대에 읽었을땐 불륜으로 치부했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주인공의 심정이 이럴까? 1주일의 짧은 사랑...그리고 평생을 가슴에 묻어두었을 아련한 그리움이겠지만 그 추억만으로 행복했겠지?
바람과 풍경으로 표현한 사람의 관계, 사랑의 깊어짐 등 작품에
대한 해석을 해주니 더 와 닿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안치환이 부른 노래로도 들려주었다.

작가가 룸비니에 여행가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혹여 깨질까 매일 매일 걱정하였다. 어느 날 오지 않을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산산조각이 나면 어떠냐. 그런대로 살아가면 되지 하는 시가 탄생했단다. 시인의 생각을 담아 시를 읽으니 고통, 외로움도 충분히 이겨낼 힘이 생긴다.
산산조각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목이 긴 연노랑 수선화가 외로워 보여 제목을 달았다는 '수선화에게'는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말로 서두를 꺼낸다. 깜깜한 밤에 집에 들어와 불 꺼진 거실 등을 켜며 문득 외롭다는 생각을 할때 이 시를 읽으면 조금은 위안이 되겠다.

내 존재와 가치를 생각해보는 '홀로'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함을 말한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 이라는 박완서 작가님의 말도 인용한다. "자살은 희망을 잃었을때 발생하며, 신은 인간을 어지간하면 용서해 주시지만 절망에 빠지만 용서에 주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만의 십자가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의 본질은 무거움에 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 십자가는 크기는 다르지만 무게는 다 똑같다." 두 시간의 귀한 강의는 선물처럼 내 마음을 꽉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