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평점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다소 도발적인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의 저자 목수정은 일하던 공연장에 큰 손해를 끼치며 마지막 기획공연은 막을 내리고, 격렬한 행복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1년도 안돼 지옥바닥으로 끌어내리며 끝이 났던 사랑, 이 두 가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프랑스행을 결정한다. "나처럼 작정하고 백지 상태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그곳은 천국이었다. 내 오랜 여신 이사도라 던컨과 시인 랭보의 묘지 등을 걸어서 순례하며 이 믿기지 않는 거대한 전설 같은 도시를 탐험했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첫 달이 꿈결같이 흘러갔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 낀 둘째. 부모의 관심에서 적당히 배제된 둘째라는 타이틀이 그녀에게는 좀 더 자유롭게 살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고, 부모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으면서도 직장생활하면서 모은 천만원을 들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프랑스로 떠날 용기를 주었나 보다. 같은 둘째임에도 전혀 자유롭지 않았던 나. 직장생활하면서 모은 천만원을 당연히 결혼자금으로 써야 한다는 융통성 없던 내가 한심하다. 난 그때 왜 배낭여행 갈 정도의 도전정신도 없었을까?
파리 8대학에서 그녀는 문화정책을 공부한다. 학교에서 가장 멋진 공간인 도서관에서 책의 숲에 푹 빠져 공부하고, 공공서비스 영역에 포함되는 연극은 영화의 두배 정도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문화의 홍수에 빠져사는 그녀는 어느덧 뼛속까지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임신에서 출산까지의 모든 비용이 전액 무료인 나라, 연극배우만으로 살아가기에도 충분한 보장을 해주는 프랑스. 250년 후에나 완성될 희완의 작품인 어른들의 놀이터 '갸를롱'에 언젠가 가보고 싶다.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두려움을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딸 칼리의 아빠 희완은 그녀에게 반려자이기 이전에 든든한 후원자요 조력자다. 그녀의 선택을 믿어주고, 국경을 넘나들며 늘 함께 하는 그들의 관계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잠시 우리나라 민주노동당 연구원으로 생활하지만 진보적인 그곳에서조차 자행되는 편협함과 이기주의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다. 문득 그녀의 떠남으로 우리나라 문화정책은 조금은 주춤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노파심일까?
아이들 시험기간이라 성당 다녀오는 것 이외에는 집에서만 생활했던 일요일에 이 책 읽으면서 행복했다. 그녀와 희완과의 편안하면서 아름다운 사랑,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생각하는 육아, 가족에 대한 생각, 우리나라 문화정책에 대한 시각, 프랑스의 다양한 문화 등 에세이라고 하기엔 가볍지 않은 읽을거리와 생각거리가 많았던 책이다.
막연히 남성적이고, 전투적일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사도라 던컨을 닮았고, 여성스러우며 아름답다.
"결국 독서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들을 여러가지 방향으로 다시 환기하고 내 삶에 끌어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함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희완이 내가 독서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공유하기를 바랐다. 너는 도대체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육아교육 책을 얼마나 읽었냐 타박하며, 그러나 그럴수록 희완은 더욱 더 멀리 달아났다." p.238
오늘이 행복하면, 내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오늘 나의 삶의 태도가 진실하다면, 내일의 나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있다. p. 310
한 우물을 파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그리하여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전 인류가 주입시켜온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나의 욕구와 관심은 나와 함께 진화할 것이며, 열심히 그 새로운 호기심과 열정에 화답하며 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진실이다. 그래봤자 1세기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내게 주어져 있을 뿐이고 나의 관심사는 '문화'라는 거대한 대지 속에서 이리 저리 출렁거릴 뿐이다. p.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