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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물론’이 난무하는 곳이다. 수많은 금지의 규범과 그보다 더 많은 강제의 규범들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규범들의 공통점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규범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불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자꾸 이유를 물어보기 시작하면 대답은 점점 궁색해지고 규범은 힘을 잃기 때문이다.
왜 학생들은 화장을 하면 안 되고 항상 머리는 단정해야 할까? 왜 학생들은 꼭 교복을 입고 학교에 와야 할까? 나는 학교에 대해,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과 의심들을 동화로 풀어보고 싶었다. ‘세계 명작 동화’의 메시지와 학교의 메시지는 아주 비슷하다. 우리 사회가 미래 세대에게 바라는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거짓말을 하면 대가를 치르게 되니 항상 정직하라,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고 샛길로 빠지면 곤경에 처하니 항상 정해진 길을 가라, 쓸데없는 허영을 키우는 것은 몰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니 언제나 삼가는 마음으로 생활하라…….
이 책을 펼쳐 든 그대도 어쩌면 나처럼 불쑥불쑥 솟아나는 의문과 의심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쉬운 길을 늘 돌아가면서 남몰래 한숨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대에게 이 책의 이야기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대를 동화 속 멍청이들의 마을로 초대한다.(머리말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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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텍스트 삼아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등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보는 작업, 이미 단상을 넘어 연구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이기에 특별히 놀랍거나 신선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동화가 선과 악을 나누고 고정된 역할을 부여해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상상에 해가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그 동화가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읽히기 때문이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는 21세기 한국에서 사회과 교사로 일하는 저자가 규범으로 가득 찬 학교, 그럼에도 이 학교에 꼬박꼬박 나와 자리를 지키는 학생들 사이의 갈등과 조정의 장면들을 여우와 두루미, 피노키오, 신데렐라 등의 서양 명작 동화와 한데 엮어 풀어낸다. 텍스트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 속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동화 속 멍청이들을 반면교사 삼아 학교와 규범이라는 텍스트 바깥을 상상해보자는 저자의 제안을 반갑게 맞이하며, 개미와 베짱이를 다룬 한 꼭지를 전해드린다.
한철 노래하며 사는 인생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미와 베짱이
죽거나 뉘우치거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담장에는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라는 구호가 커다란 페인트 글씨로 써 있었다. 1970년대였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하는 것이 시대 정신이던 시절이었다. 게으름과 태만은 우리의 적이었으며, 근면과 성실은 최고의 선이었다. 그 시절 모든 학생들이 암송해야 했던 국민 교육 헌장도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며 근면, 노력을 강조하며 끝을 맺지 않았던가.
그 시절 상상을 초월한 장시간 노동이 사회 전체적으로 가능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군사 정권의 막강 파워 덕분이었지만, 그 체제가 무조건 힘으로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사회 구성원 다수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설득 논리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그 설득 논리의 연장선상에 <개미와 베짱이>가 있다.
개미는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무더운 여름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베짱이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덕분에 추운 겨울이 되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베짱이는 여름 내 노느라 겨울에 대비하지 못했다. 겨울이 되자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초라한 모습으로 개미네 집 문을 두드린다. 도와 달라고.
개미는 어떻게 했더라? 베짱이는 어떻게 되었지? 어떤 책에서는 개미가 문을 열고 베짱이를 따뜻하게 맞아주되 앞으로 ‘열심히 살라’는 충고를 했다고도 하고, 이에 대해 베짱이가 참회를 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책에서는 개미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베짱이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떤 식의 엔딩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개미는 좋은 편이고 베짱이는 나쁜 편이라는 것. 좋은 편 개미는 승리하고 나쁜 편 베짱이는 패배한다. 죽거나 뉘우치거나.
지금은 베짱이의 세상인가?
이제 세상에는 베짱이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우리에게는 밥도 필요하지만 노래도 필요하다. 베짱이는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술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짱이의 연주 덕분에 개미들은 일을 하며 시름을 잊지 않았던가. 베짱이의 연주로부터 즐거움을 얻었으니 개미들은 마땅히 베짱이에게 겨울을 날 보금자리와 양식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지를 얻게 되었다. 세상이 변한 듯하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하겠는가. 우리는 여전히 개미의 세상에 산다. 무언가를 증명한답시고 문제부터 들이대는 지나치게 선생스럽지만, 안심하시라. 이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게다가 찍기도 가능한 객관식이니 논술 시험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은 당신도 수월하게 답할 수 있다. 다음 물음에 답해보자.
만약 당신이 일을 안 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돈을 얻는다면 그래도 계속 일을 하고 싶은가?
① 예. 생활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
② 예. 일이 돈 이상의 의미가 있으므로
③ 아니오, 여가를 즐길 것.
강수돌의 <일중독 벗어나기>(메이데이, 2007)에 따르면 2003년~2005년에 이루어진 설문 조사에서 설문에 응답한 한국 노동자의 24.7퍼센트만이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머지는 생활수준 향상과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일을 계속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 질문을 미국, 일본, 독일 등 4개국 노동자를 대상으로 이 같은 질문을 했더니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고 답한 사람은 미국 59퍼센트, 일본 10.4퍼센트, 독일 43.1퍼센트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생활이 보장되어도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열에 일곱이 넘는 세상에서 생활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데 깽깽이나 연주하고 있는 베짱이를 정말 진심으로 옹호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개미의 세상이다.
베짱이의 삶을 지지하지만……
개미의 세상에서 베짱이 지지자들의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베짱이처럼 사는 삶도 가능하겠지만, 손가락질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몇 가지의 전제가 있다. 첫째,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렇다. 베짱이가 추운 겨울 도움을 구하기 위해 두드릴 문이 내 집 현관문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겨울을 위해 양식과 땔감을 모아 놓았지만, 그건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다. 내가 베짱이를 위한답시고 내 가족을 위한 양식을 탕진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둘째, 그 베짱이는 나와 무관해야 한다. 내 가족 중에 베짱이가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내 자식이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젊은 놈이 대책도 없이 취직할 생각도 안하고 깽깽이나 껴안고 살고 있다면 그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셋째, 베짱이도 베짱이 나름의 기여를 해야 한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감과 위안을 주는 예술 활동으로 기여를 해야 한다. 그런 기여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봐 줄 것이고, 문화 산업이 하나의 산업 분야로 정착해 있는 요즘 세상에서 그는 오히려 돈과 명예 모두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겨울날 개미네 집 문 앞에서 서성거릴 이유가 없다. 만약 그가 배고픈 예술가라면? 그건 그가 재능도 없는데 헛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빨리 정신 차리고 개미의 대열로 복귀해야 한다. 한마디로, 베짱이도 아닌 것이 베짱이인 줄 착각하지 말고 꿈 깨란 말이다.
다시 말해, 요즘의 세련된 개미 세상에서는 베짱이의 삶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미에게 피해를 주지 않거나, 개미와 무관하거나, 개미에게 기여하는 선에서만 그렇다.
그런데 이게 나쁜가? 개미의 삶이 뭐가 어떻다고? 열심히 일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살겠다는데 왜 시비를 거는가?
개미의 삶을 찬양하는 것에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
개미의 삶은 나쁘다. 첫째, 그의 삶이 불순한 목적으로 찬양되고 있기 때문에 나쁘다. 왜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우리 사회에 그토록 널리 퍼졌겠는가? 노동을 찬양하고 게으름을 죄악시하는 것은 산업화를 겪는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모습이다.
1834년 영국에서는 구빈법(救貧法)을 만들었다. 이름을 보면 빈민 구제를 위한 법 같지만 사실을 게으름 추방법이었다. 이 법은 떠돌아다니는 민요 가수 등 연예인들을 범죄자로 취급했다. 한군데 진득하게 정착해서 매일매일 정해진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은 이제 살 곳을 잃게 된 것이다. 이렇게 까지 한 이유가 뭘까? 당연히 사람들이 일하기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해야 했을까? 사회에는 진정 일 안하고 놀고 먹으면서도 당당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유한계급이라 한다. 유한계급들이 더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잉여가 생산되어야 하는데, 기껏 생산된 잉여가 노래나 부르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는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는 데 쓰인다면 분통터질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건달들이 마을에 오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할 생각은 안하고 놀자판이 벌어지니 그 또한 답답한 노릇이고. 그러니 게으름을 범죄로 취급하고 죽어라 일하는 것을 천국에 가까이 가는 미덕이라 설파할 밖에.
우리도 산업화 과정에서 유사한 일들이 있지 않았던가? 선량한 사회 풍속을 정착시키기 위해 성인들의 머리 길이며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도 하고, 집에서 술 담가 먹지 못하게 하고, 농한기에 푼돈 놓고 벌이는 화투판을 도박으로 처벌하기도 하면서, 반듯한 노동 생활을 찬양하지 않았던가. 개미의 삶에 대한 찬양은 이 시절에 유포된 것이다. 그러니, 개미들이여, 내 원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개미의 선량한 노동이 오직 개미의 선량함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노동의 의미가 더 많은 이들을 노동에 참여시키고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재해석되고 배치되었다면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개미의 부지런함은 욕심 때문이다
개미의 삶은 나쁜 이유는 두 번째로, 개미의 근면이 욕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원래 개미 우화에는 개미가 한때 이웃을 시샘한 나머지 그의 곡식을 훔친 농부였다는 이야기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난 제우스 신은 그 농부를 개미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솝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형체는 변했지만, 특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들판을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밀과 보리를 모아 자신을 위해 비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수렵 채취사회에 살고 있는데, 미래에 대비한답시고 당장 먹을 것도 아니면서 눈에 보이는 나무 열매란 열매는 죄다 따 모아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는 누군가가 생겨날 것이고, 따 모아 놓은 나무 열매도 다 먹지 못해 썩어 버릴 것이다. 미래에 대비하여 열심히 일한 누군가는 사실은 이웃이 먹을 과일을 모아 자신을 위해(사실은 자신도 쓰지 못하면서) 비축한 것일 뿐이다.
지금은 수렵 채취 사회가 아니니 해당되지 않는 얘기일까? 우리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비축할 수 있을까? 쌀? 김치? 우리가 비축할 수 있는 것은 돈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돈을 비축해야 안심이 될까? 1억? 10억? 100억? 오늘의 소비를 위해 필요한 돈은 한계가 있지만, 내일을 위한 돈에는 한계가 없다. 얼마를 모아 두어도 미래는 늘 불안하고, 그러니 모을 수 있는 한 계속 모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 안 좋은 것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충분히 모을 수 없는 현실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굶주림을 해결하기도 바쁜 이들이 더 많다.
개미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렸다
개미의 삶이 나쁜 이유 세 번째는, 개미가 미래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삶은 오늘의 행복을 갉아먹는다. 미래를 위해 사는 모습을 어떻기에 그러냐고?
2학년 학생들에게 「경제」를 가르치다가 학급에서 한두 명 정도는 1학년 겨울 방학에 미리 고등학교 경제를 끝내고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어와 수학 공부에 온 나라가 매진하고 있는 현 시국에서 경제처럼 보잘것없는 과목에도 그처럼 과분한 관심을 보여 주니 정말 황송하기 그지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미리 경제 공부를 챙겼다는 것은 이미 미리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놓았다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그러니 놀랄 밖에.
요즘 아이들은 뭐든지 미리 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하고, 초등 고학년이 되면 중학 대비를,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교 대비를 한다. 준비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다음 학기에 배울 것을 이번 방학에 미리 공부하는 것은 선행학습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이 선행 학습 열풍을 선도하는 것은 단연 영어이다. 뱃속에서부터 영어 태교를 시작하여 걸음마와 함께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 얘기처럼 영어 공부와 관련해서는 괴담도 정말 많다. 가장 최근에 접한 영어 괴담은 C학원 괴담이다.
‘쉬운 영어’ 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있던 한 엄마에게 다른 엄마가 충고해 주었다. 그런 학원 계속 보내면 애 영어 완전 망친다고. 그러면서 추천해 준 C학원. 일주일에 두 번 하는 C학원의 수업에 맞추어 숙제를 하려면 하루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제 아이는 초등 4학년, 고학년이니 마냥 어린애처럼 놀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직장을 다니는 ‘쉬운 영어’ 엄마가 “저는 하루에 네 시간씩 아이 숙제를 봐 줄 시간이 없어요.” 라고 걱정하자, 곧바로 되돌아오는 처방. “원래 집에 있는 엄마도 그런 거 못해. 애랑 사이만 나빠지거든. 숙제 봐 주는 새끼 선생님을 둬야지.” 헉! 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을 내고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단다.
왜 다들 미리 공부를 할까? 하나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야 아이가 상급 학교에 진학해서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내가 보기에 상급 학교인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은 조금도 편해 보이지 않는다. 상급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하기 위해서 미리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상급 학교에서도 고생스러울 과정을 더 어린 나이에 당겨서 공부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창 자라는 나이에는 한 해 한 해가 다르다. 공연히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라서 하면 수월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미리 하느라고 몇 배의 고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자꾸 앞당겨 살기를 권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바빠진다. 과정을 앞당겨 공부하려다 보니 아이들 앞에는 늘 가야 할 길이 멀다. 하루 네 시간씩 투자해야 따라갈 수 있는 학원의 교육과정을 따라가야 하는 아이들은 엄청나게 바쁜 일과를 보내야 한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공부를 잘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충분한 독서로 다져진 탄탄한 언어 능력(한국어 능력!)은 모든 공부의 기본이다. 빈곤한 언어 능력은 상급 학교에 진학할수록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된다. 영어 공부를 제 아무리 많이 해도 외국어로 영어를 학습하는 아이들의 영어 능력이 모국어인 한국어 능력을 앞서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독서를 즐기기에는 너무 바쁘다.
개미는 안전만을 추구한다
개미의 삶이 나쁜 네 번째 이유는 개미는 안전한 삶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선택을 하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안전한 삶의 대가는 도전 없는 삶이다. 베짱이가 도전으로 가득한 위험도 높은 일을 선택했다. 당연히 그의 미래는 불안하다. 하지만 베짱이는 삶의 한 시기를 온전히 자기가 원하는 일에 바쳐 충만함을 얻었다. 인류는 모두 이렇게 자기 삶의 한 시기를 온전히 자기가 원하는 일에 바친 사람들,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
모차르트가 노년의 안정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충실한 궁정 악사로 살았다면? 체 게바라가 다가올 겨울의 굶주림이 두려워 병원을 개업하고 소화불량이나 감기 환자에게 처방전이나 발급하면서 살았다면? 그 어떤 상상도 이보다 더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비극적이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 베짱이가 모차르트도 아니고 체 게바라도 아니라면? 그저 철모르는 게으름뱅이에 불과하고 개미들에게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재능도 없으면서 설치고 있을 수도 있고, 대열을 승리로 이끌 능력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들이 어떤 일을 할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치고 누군가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살아간다
가난한 화가가 있었다. 어찌 어찌 그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이웃의 농부가 약간의 돈을 융통해 주어 그는 끼니와 그림 재료를 장만할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그림 몇 점을 가지고 농부를 찾아가 지금은 별 볼 일 없지만 앞으로는 비싸게 팔릴 수도 있는 작품이니 받아달라고 했다. 자비심 많은 농부는 거절했다. 그냥 선의로 한 일이니 그림은 도로 가져가라고. 내게는 그 그림이 필요 없다고.
공짜로 주겠다는 그림마저도 거절당했던 이 ‘가난한 화가’는 누구일까?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는 한 번도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공장에서 일하지도 않았다. 동생에게 빌붙어서 겨우 겨우 살면서 오직 그림만 그렸다. 그 시절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어떤 개미가 고흐 베짱이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치고, 누군가에게는 은혜를 베풀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개미와 베짱이도 서로에게 폐도 끼치고 은혜도 입히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 사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려면 한철 노래하며 사는 인생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