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물론’이 난무하는 곳이다. 수많은 금지의 규범과 그보다 더 많은 강제의 규범들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규범들의 공통점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규범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불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자꾸 이유를 물어보기 시작하면 대답은 점점 궁색해지고 규범은 힘을 잃기 때문이다.
  왜 학생들은 화장을 하면 안 되고 항상 머리는 단정해야 할까? 왜 학생들은 꼭 교복을 입고 학교에 와야 할까? 나는 학교에 대해,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과 의심들을 동화로 풀어보고 싶었다. ‘세계 명작 동화’의 메시지와 학교의 메시지는 아주 비슷하다. 우리 사회가 미래 세대에게 바라는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거짓말을 하면 대가를 치르게 되니 항상 정직하라,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고 샛길로 빠지면 곤경에 처하니 항상 정해진 길을 가라, 쓸데없는 허영을 키우는 것은 몰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니 언제나 삼가는 마음으로 생활하라…….
  이 책을 펼쳐 든 그대도 어쩌면 나처럼 불쑥불쑥 솟아나는 의문과 의심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쉬운 길을 늘 돌아가면서 남몰래 한숨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대에게 이 책의 이야기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대를 동화 속 멍청이들의 마을로 초대한다.(머리말 가운데)

 
   


동화를 텍스트 삼아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등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보는 작업, 이미 단상을 넘어 연구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이기에 특별히 놀랍거나 신선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동화가 선과 악을 나누고 고정된 역할을 부여해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상상에 해가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그 동화가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읽히기 때문이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는 21세기 한국에서 사회과 교사로 일하는 저자가 규범으로 가득 찬 학교, 그럼에도 이 학교에 꼬박꼬박 나와 자리를 지키는 학생들 사이의 갈등과 조정의 장면들을 여우와 두루미, 피노키오, 신데렐라 등의 서양 명작 동화와 한데 엮어 풀어낸다. 텍스트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 속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동화 속 멍청이들을 반면교사 삼아 학교와 규범이라는 텍스트 바깥을 상상해보자는 저자의 제안을 반갑게 맞이하며, 개미와 베짱이를 다룬 한 꼭지를 전해드린다.

 

한철 노래하며 사는 인생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미와 베짱이

 

죽거나 뉘우치거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담장에는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라는 구호가 커다란 페인트 글씨로 써 있었다. 1970년대였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하는 것이 시대 정신이던 시절이었다. 게으름과 태만은 우리의 적이었으며, 근면과 성실은 최고의 선이었다. 그 시절  모든 학생들이 암송해야 했던 국민 교육 헌장도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며 근면, 노력을 강조하며 끝을 맺지 않았던가.
  그 시절 상상을 초월한 장시간 노동이 사회 전체적으로 가능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군사 정권의 막강 파워 덕분이었지만, 그 체제가 무조건 힘으로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사회 구성원 다수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설득 논리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그 설득 논리의 연장선상에 <개미와 베짱이>가 있다.
  개미는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무더운 여름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베짱이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덕분에 추운 겨울이 되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베짱이는 여름 내 노느라 겨울에 대비하지 못했다. 겨울이 되자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초라한 모습으로 개미네 집 문을 두드린다. 도와 달라고.
  개미는 어떻게 했더라? 베짱이는 어떻게 되었지? 어떤 책에서는 개미가 문을 열고 베짱이를 따뜻하게 맞아주되 앞으로 ‘열심히 살라’는 충고를 했다고도 하고, 이에 대해 베짱이가 참회를 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책에서는 개미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베짱이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떤 식의 엔딩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개미는 좋은 편이고 베짱이는 나쁜 편이라는 것. 좋은 편 개미는 승리하고 나쁜 편 베짱이는 패배한다. 죽거나 뉘우치거나.
 


지금은 베짱이의 세상인가? 


이제 세상에는 베짱이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우리에게는 밥도 필요하지만 노래도 필요하다. 베짱이는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술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짱이의 연주 덕분에 개미들은 일을 하며 시름을 잊지 않았던가. 베짱이의 연주로부터 즐거움을 얻었으니 개미들은 마땅히 베짱이에게 겨울을 날 보금자리와 양식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지를 얻게 되었다. 세상이 변한 듯하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하겠는가. 우리는 여전히 개미의 세상에 산다. 무언가를 증명한답시고 문제부터 들이대는 지나치게 선생스럽지만, 안심하시라. 이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게다가 찍기도 가능한 객관식이니 논술 시험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은 당신도 수월하게 답할 수 있다. 다음 물음에 답해보자.

만약 당신이 일을 안 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돈을 얻는다면 그래도 계속 일을 하고 싶은가?
① 예. 생활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
② 예. 일이 돈 이상의 의미가 있으므로
③ 아니오, 여가를 즐길 것.

강수돌의 <일중독 벗어나기>(메이데이, 2007)에 따르면 2003년~2005년에 이루어진 설문 조사에서 설문에 응답한 한국 노동자의 24.7퍼센트만이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머지는 생활수준 향상과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일을 계속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 질문을 미국, 일본, 독일 등 4개국 노동자를 대상으로 이 같은 질문을 했더니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고 답한 사람은  미국 59퍼센트, 일본 10.4퍼센트, 독일 43.1퍼센트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생활이 보장되어도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열에 일곱이 넘는 세상에서 생활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데 깽깽이나 연주하고 있는 베짱이를 정말 진심으로 옹호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개미의 세상이다. 
 


베짱이의 삶을 지지하지만……
 

개미의 세상에서 베짱이 지지자들의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베짱이처럼 사는 삶도 가능하겠지만, 손가락질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몇 가지의 전제가 있다. 첫째,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렇다. 베짱이가 추운 겨울 도움을 구하기 위해 두드릴 문이 내 집 현관문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겨울을 위해 양식과 땔감을 모아 놓았지만, 그건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다. 내가 베짱이를 위한답시고 내 가족을 위한 양식을 탕진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둘째, 그 베짱이는 나와 무관해야 한다. 내 가족 중에 베짱이가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내 자식이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젊은 놈이 대책도 없이 취직할 생각도 안하고 깽깽이나 껴안고 살고 있다면 그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셋째, 베짱이도 베짱이 나름의 기여를 해야 한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감과 위안을 주는 예술 활동으로 기여를 해야 한다. 그런 기여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봐 줄 것이고, 문화 산업이 하나의 산업 분야로 정착해 있는 요즘 세상에서 그는 오히려 돈과 명예 모두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겨울날 개미네 집 문 앞에서 서성거릴 이유가 없다. 만약 그가 배고픈 예술가라면? 그건 그가 재능도 없는데 헛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빨리 정신 차리고 개미의 대열로 복귀해야 한다. 한마디로, 베짱이도 아닌 것이 베짱이인 줄 착각하지 말고 꿈 깨란 말이다. 
  다시 말해, 요즘의 세련된 개미 세상에서는 베짱이의 삶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미에게 피해를 주지 않거나, 개미와 무관하거나, 개미에게 기여하는 선에서만 그렇다.
  그런데 이게 나쁜가? 개미의 삶이 뭐가 어떻다고? 열심히 일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살겠다는데 왜 시비를 거는가? 
 


개미의 삶을 찬양하는 것에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   

개미의 삶은 나쁘다. 첫째, 그의 삶이 불순한 목적으로 찬양되고 있기 때문에 나쁘다. 왜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우리 사회에 그토록 널리 퍼졌겠는가? 노동을 찬양하고 게으름을 죄악시하는 것은 산업화를 겪는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모습이다.
  1834년 영국에서는 구빈법(救貧法)을 만들었다. 이름을 보면 빈민 구제를 위한 법 같지만 사실을 게으름 추방법이었다. 이 법은 떠돌아다니는 민요 가수 등 연예인들을 범죄자로 취급했다. 한군데 진득하게 정착해서 매일매일 정해진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은 이제 살 곳을 잃게 된 것이다. 이렇게 까지 한 이유가 뭘까? 당연히 사람들이 일하기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해야 했을까? 사회에는 진정 일 안하고 놀고  먹으면서도 당당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유한계급이라 한다. 유한계급들이 더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잉여가 생산되어야 하는데, 기껏 생산된 잉여가 노래나 부르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는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는 데 쓰인다면 분통터질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건달들이 마을에 오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할 생각은 안하고 놀자판이 벌어지니 그 또한 답답한 노릇이고. 그러니 게으름을 범죄로 취급하고 죽어라 일하는 것을 천국에 가까이 가는 미덕이라 설파할 밖에.
  우리도 산업화 과정에서 유사한 일들이 있지 않았던가? 선량한 사회 풍속을 정착시키기 위해 성인들의 머리 길이며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도 하고, 집에서 술 담가 먹지 못하게 하고, 농한기에 푼돈 놓고 벌이는 화투판을 도박으로 처벌하기도 하면서, 반듯한 노동 생활을 찬양하지 않았던가. 개미의 삶에 대한 찬양은 이 시절에 유포된 것이다. 그러니, 개미들이여, 내 원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개미의 선량한 노동이 오직 개미의 선량함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노동의 의미가 더 많은 이들을 노동에 참여시키고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재해석되고 배치되었다면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개미의 부지런함은 욕심 때문이다  

개미의 삶은 나쁜 이유는 두 번째로, 개미의 근면이 욕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원래 개미 우화에는 개미가 한때 이웃을 시샘한 나머지 그의 곡식을 훔친 농부였다는 이야기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난 제우스 신은 그 농부를 개미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솝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형체는 변했지만, 특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들판을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밀과 보리를 모아 자신을 위해 비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수렵 채취사회에 살고 있는데, 미래에 대비한답시고 당장 먹을 것도 아니면서 눈에 보이는 나무 열매란 열매는 죄다 따 모아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는 누군가가 생겨날 것이고, 따 모아 놓은 나무 열매도 다 먹지 못해 썩어 버릴 것이다. 미래에 대비하여 열심히 일한 누군가는 사실은 이웃이 먹을 과일을 모아 자신을 위해(사실은 자신도 쓰지 못하면서) 비축한 것일 뿐이다.
  지금은 수렵 채취 사회가 아니니 해당되지 않는 얘기일까? 우리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비축할 수 있을까? 쌀? 김치? 우리가 비축할 수 있는 것은 돈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돈을 비축해야 안심이 될까? 1억? 10억? 100억? 오늘의 소비를 위해 필요한 돈은 한계가 있지만, 내일을 위한 돈에는 한계가 없다. 얼마를 모아 두어도 미래는 늘 불안하고, 그러니 모을 수 있는 한 계속 모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 안 좋은 것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충분히 모을 수 없는 현실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굶주림을 해결하기도 바쁜 이들이 더 많다.


 

 

개미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렸다 

개미의 삶이 나쁜 이유 세 번째는, 개미가 미래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삶은 오늘의 행복을 갉아먹는다. 미래를 위해 사는 모습을 어떻기에 그러냐고?
  2학년 학생들에게 「경제」를 가르치다가 학급에서 한두 명 정도는 1학년 겨울 방학에 미리 고등학교 경제를 끝내고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어와 수학 공부에 온 나라가 매진하고 있는 현 시국에서 경제처럼 보잘것없는 과목에도 그처럼 과분한 관심을 보여 주니 정말 황송하기 그지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미리 경제 공부를 챙겼다는 것은 이미 미리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놓았다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그러니 놀랄 밖에.
요즘 아이들은 뭐든지 미리 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하고, 초등 고학년이 되면 중학 대비를,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교 대비를 한다. 준비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다음 학기에 배울 것을 이번 방학에 미리 공부하는 것은 선행학습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이 선행 학습 열풍을 선도하는 것은 단연 영어이다. 뱃속에서부터 영어 태교를 시작하여 걸음마와 함께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 얘기처럼 영어 공부와 관련해서는 괴담도 정말 많다. 가장 최근에 접한 영어 괴담은 C학원 괴담이다.
‘쉬운 영어’ 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있던 한 엄마에게 다른 엄마가 충고해 주었다. 그런 학원 계속 보내면 애 영어 완전 망친다고. 그러면서 추천해 준 C학원. 일주일에 두 번 하는 C학원의 수업에 맞추어 숙제를 하려면 하루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제 아이는 초등 4학년, 고학년이니 마냥 어린애처럼 놀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직장을 다니는 ‘쉬운 영어’ 엄마가 “저는 하루에 네 시간씩 아이 숙제를 봐 줄 시간이 없어요.” 라고 걱정하자, 곧바로 되돌아오는 처방. “원래 집에 있는 엄마도 그런 거 못해. 애랑 사이만 나빠지거든. 숙제 봐 주는 새끼 선생님을 둬야지.” 헉! 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을 내고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단다.
  왜 다들 미리 공부를 할까? 하나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야 아이가 상급 학교에 진학해서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내가 보기에 상급 학교인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은 조금도 편해 보이지 않는다. 상급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하기 위해서 미리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상급 학교에서도 고생스러울 과정을 더 어린 나이에 당겨서 공부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창 자라는 나이에는 한 해 한 해가 다르다. 공연히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라서 하면 수월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미리 하느라고 몇 배의 고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자꾸 앞당겨 살기를 권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바빠진다. 과정을 앞당겨 공부하려다 보니 아이들 앞에는 늘 가야 할 길이 멀다. 하루 네 시간씩 투자해야 따라갈 수 있는 학원의 교육과정을 따라가야 하는 아이들은 엄청나게 바쁜 일과를 보내야 한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공부를 잘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충분한 독서로 다져진 탄탄한 언어 능력(한국어 능력!)은 모든 공부의 기본이다. 빈곤한 언어 능력은 상급 학교에 진학할수록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된다. 영어 공부를 제 아무리 많이 해도 외국어로 영어를 학습하는 아이들의 영어 능력이 모국어인 한국어 능력을 앞서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독서를 즐기기에는 너무 바쁘다.  

 
개미는 안전만을 추구한다 
 

개미의 삶이 나쁜 네 번째 이유는 개미는 안전한 삶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선택을 하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안전한 삶의 대가는 도전 없는 삶이다. 베짱이가 도전으로 가득한 위험도 높은 일을 선택했다. 당연히 그의 미래는 불안하다. 하지만 베짱이는 삶의 한 시기를 온전히 자기가 원하는 일에 바쳐 충만함을 얻었다. 인류는 모두 이렇게 자기 삶의 한 시기를 온전히 자기가 원하는 일에 바친 사람들,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
모차르트가 노년의 안정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충실한 궁정 악사로 살았다면? 체 게바라가 다가올 겨울의 굶주림이 두려워 병원을 개업하고 소화불량이나 감기 환자에게 처방전이나 발급하면서 살았다면? 그 어떤 상상도 이보다 더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비극적이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 베짱이가 모차르트도 아니고 체 게바라도 아니라면? 그저 철모르는 게으름뱅이에 불과하고 개미들에게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재능도 없으면서 설치고 있을 수도 있고, 대열을 승리로 이끌 능력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들이 어떤 일을 할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치고 누군가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살아간다 


가난한 화가가 있었다. 어찌 어찌 그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이웃의 농부가 약간의 돈을 융통해 주어 그는 끼니와 그림 재료를 장만할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그림 몇 점을 가지고 농부를 찾아가 지금은 별 볼 일 없지만 앞으로는 비싸게 팔릴 수도 있는 작품이니 받아달라고 했다. 자비심 많은 농부는 거절했다. 그냥 선의로 한 일이니 그림은 도로 가져가라고. 내게는 그 그림이 필요 없다고. 
  공짜로 주겠다는 그림마저도 거절당했던 이 ‘가난한 화가’는 누구일까?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는 한 번도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공장에서 일하지도 않았다. 동생에게 빌붙어서 겨우 겨우 살면서 오직 그림만 그렸다. 그 시절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어떤 개미가 고흐 베짱이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치고, 누군가에게는 은혜를 베풀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개미와 베짱이도 서로에게 폐도 끼치고 은혜도 입히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 사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려면 한철 노래하며 사는 인생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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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saurso 2011-06-2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 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자식 인성교육은 집에서만 시키는 것. 학교에서 괜히 인성교육 한다고 꼴깞 떨다가 사고 치는 거'라는 어떤 학부모의 글을 읽고 한숨이 나왔는데. 그러니까요. 원래 우리는 서로 폐를 끼치고 은혜를 입으면서 사는 거니까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4 12:02   좋아요 0 | URL
아, 오묘한 댓글에 장단을 맞추기에는 제 베짱이스러움이 부족하군요. 맞습니다, 서로 폐츷 끼치고 은혜를 입으면서 사는 거니까요, 정도로 맞장구를 치겠습니다. ^^

시시포쑤 2011-06-2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 같은 베짱이들은 어떻게 살라고 하는 세상인지...ㅎ
'개미'만 옳은 세상이 아님을 재밌게 이야기해주는 거 같습니다...
'죽지 머'에 완젼 공감하고 갑니다~~ㅎㅎ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4 12:02   좋아요 0 | URL
아, 역시 글보다 그림... ㅋㅋ

뚝님 2011-06-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적 동화속에서 보던 개미와 베짱이는 원래 이런 모습이었군요.. 사회학적인 관점이라고 하지만 이미 알고있었던 동화들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보는 것 같아 재밌습니다. 강추!하고 갑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4 16:42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추천 옆에 '강추' 버튼을 따로 만들어야겠습니다. ^^

러브러브 2011-06-2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베짱이스러움이 모자란 것 같아요.
얼마전 학교 다닐때는 친하지 않았던 동창을 만났습니다.
베짱이의 선두 그룹에 있던 그 친구가 외국물 먹고 돌아와 잘 나가는 모습 보니깐
뭔가 맘속에서 옳지않은 기운이 스멀 스멀 ㅋㅋ
공부 밖에는 몰랐던 (하하! --;)제가 참 짜증스럽더군요!
뒤집어 보는 동화책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조금은 베짱 튕기며 살았을텐데요!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세상이어야 2011-06-2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긴,
만약에 우리 선조들께서 집안이나 자기 안위만을 생각해서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등을 전혀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나란 어떻게 돼있을까요?
역사는 의미있는(?) 일들만 기록하고, 인류사회는 그런 자들을 인정해줍니다.

역시, 모~든 걸 잘하는.. 착하고 일 잘하며 똑똑하고 효자인 사람은 나기 어렵단 현실! 인정해야겠네요~
 

천병희 선생님의 그리스어 원전 번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출간을 앞두고 여러 분들께서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어 선생님과 출판사에 큰 힘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지난주 전해드린 서문에 이어 '멜로스인들과의 대담' 일부를 맛보기로 보여드립니다. 이 부분은 본문에 나오는 40여 편의 연설문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부분이며, 중립을 지키려는 멜로스인들을 용인하지 않는 아테나이인들의 '힘의 논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입니다. 물론 저항하는 멜로스인들은 이후 처참하게 정복당하지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여러분들께 의미 있는 읽을거리가 될 거라 기대합니다. 지금도 아테나이인 사절단의 말은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요. 모쪼록 책이 나오는 때까지, 앞서 전해드린 서문과 이번 글이 여러분의 기대를 한껏 돋우길 기대해봅니다.

 

 

서문 보러 가기 http://blog.aladin.co.kr/bookeditor/4855670 
예약판매 이벤트 페이지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10615_sup

 

강대국의 정의와 약소국의 정의는 어떻게 다른가

아테나이인 사절단 :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멜로스인 의원들 : 여러분이 정의를 도외시하고 득실에 관해서만 논의하자고 하니 하는 말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보편적인 선(善)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정한 처우를 받아야 하며, 다소 타당성이 결여된 소명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이 여러분에게도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귀국이 넘어졌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심하게 보복하는 것인지 당신들이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줄 날이 올 테니 말입니다.

아테나이인 사절단 : (1) 설령 우리 제국이 종말을 고한다 해도 우리는 나중에 일어날 일 때문에 의기소침하지 않을 것이오. 라케다이몬인들처럼 남을 지배하는 자들에게 정복당하는 것은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오. (게다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것은 라케다이몬인들도 아니지 않소.) 두려운 것은 오히려 피지배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지배자들을 제압하는 것이오. (2) 하지만 그런 위험이라면 우리에게 맡겨두시오. 지금 우리가 원하는 바는,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우리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이며,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의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오.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여러분을 우리 제국에 편입시키고 싶소. 양쪽의 이익을 위해 여러분이 살아남기를 바라오.

멜로스인 의원들 : 여러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듯 우리가 여러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테나이인 사절단 : 여러분은 항복함으로써 무서운 재앙을 면하고, 우리는 여러분을 살육하지 않고 살려두는 것이 이익이니까요.

멜로스인 의원들 : 여러분은 우리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적대적이 아니라 호의적인 중립 국가로 남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단 말입니까?

아테나이인 사절단 : 용인할 수 없소. 여러분의 호의가 여러분의 적대감보다 우리에게 더 위험하오. 여러분의 호의는 우리가 무력하다는 징표로, 여러분의 증오심은 우리가 강력하다는 증거로 우리 속국들에게 받아들여질 테니까요.

멜로스인 의원들 : 귀국과 전혀 무관한 우리를 대부분 여러분의 이주민이거나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자들과 구별 없이 다스리는 것을 여러분 속국의 백성이 공정하다고 생각할까요?

아테나이인 사절단 :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보면 서로 피장파장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아직 독립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고,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있으면 우리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것이오. 우리는 여러분을 정복함으로써 제국의 영토를 확장할 뿐 아니라 제국의 안전을 확인하는 셈이 될 것이오. 우리는 해양 세력이고 여러분은 섬 주민, 그것도 다른 섬 주민보다 허약한 섬 주민이오. 따라서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오.

멜로스인 의원들 :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우리더러 정의는 말하지 말고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 말하라고 하시니, 우리는 다시 무엇이 우리에게 이익인지 말하고, 그것이 여러분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설득해야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지금 중립국이 몇 나라 있는데, 그들을 모두 적국으로 만들기를 원합니까? 그들이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나면 머지않아 여러분이 자신들에게도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여러분이 기존의 적국 수를 더 늘리고, 그럴 의도가 없던 나라들을 본의 아니게 여러분의 적국이 되게 강요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아테나이인 사절단 : 우리는 사실 내륙의 국가들은 그리 두렵지 않소. 자유를 누리는 그들이 우리를 경계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오.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여러분처럼 아직도 굴복하지 않은 섬 주민이나, 우리 제국의 억압에 이미 분개한 자들이오. 그런 자들이야말로 무모한 행동으로 그들 자신과 우리를 모두 명백한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가장 많은 자들이오.

멜로스인 의원들 : 그렇다면 여러분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분의 속국들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 극단적인 모험을 하는데, 아직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노예가 되기 전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야비하고 비겁한 짓이겠지요.

아테나이인 사절단 :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소. 여러분은 대등한 상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므로, 체면을 세운다든가 치욕을 면하는 따위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이 살아남느냐 하는 문제이며,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보다 압도적인 강자에게 저항해서는 안 되오.

멜로스인 의원들 : 하지만 때로 승패는 수의 많고 적음보다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리고 우리가 항복하면 우리의 희망은 모두 사라지지만, 우리가 행동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겠지요.

아테나이인 사절단 : 위기를 맞으면 희망이 위안이 되겠지요. 다른 재원을 충분히 갖고 희망에 기댄다면 희망 때문에 해를 입기는 해도 파멸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가진 것을 한판에 모두 거는 사람은 망한 뒤에야 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지요(희망은 본시 낭비벽이 심하다오). 그래서 희망이 무엇인지 알고 조심할 수 있을 때는 이미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여러분은 미약하고 백척간두에 서 있는 만큼 스스로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 밖에도 여러분은 다급해진 자들의 흉내를 내지 마시오. 그들은 인간적인 수단으로 아직 자신을 구할 수 있는데도 눈에 보이는 희망이 사라지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예언이나 신탁처럼 희망을 품게 하여 파멸로 인도하는 온갖 것들에 의지하지요.

멜로스인 의원들 :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귀국의 힘과 아마도 월등한 행운에 맞서 싸우기는 어렵다는 것을 물론 잘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의에 대항해 정의의 편에 서 있는 만큼, 신들께서 우리에게도 여러분 못지않은 행운을 내려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약한 힘은 라케다이몬과의 동맹이 보충해주리라 믿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다 해도 그들은 우리의 친족인 만큼 명예를 위해서라도 우리를 도울 수밖에 없겠지요. 따라서 우리의 자신감은 여러분이 생각하듯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테나이인 사절단 : (1) 신들의 호의를 말하자면, 우리도 여러분 못지않게 거기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오. 우리의 목표와 행위는 신들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인간 상호 간의 행동 원칙에 대한 신념에 전혀 배치되지 않기 때문이오. (2) 우리가 이해하기에, 신에게는 아마도, 인간에게는 확실히, 지배할 수 있는 곳에서는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오. 이 법칙은 우리가 제정한 것도 아니고, 이 법칙이 만들어지고 나서 우리가 처음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오. 우리는 이 법칙을 하나의 사실로 물려받았고, 후세 사람들 사이에 영원히 존속하도록 하나의 사실로 물려줄 것이오. 우리는 이 법칙에 따라 행동할 뿐이며, 우리가 알기에 여러분이나 다른 누구도 우리와 같은 권력을 잡게 되면 우리처럼 행동할 것이오. (3) 따라서 우리가 신들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듯하오. 라케다이몬인들이 명예심에서라도 여러분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여러분의 기대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여러분의 순진함에 감탄하면서도 여러분의 어리석음에 동정을 금할 수 없소. (4) 라케다이몬인들은 자신들에 관계되는 일이나 자신들의 정체(政體)에 관한 한,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전혀 딴판이오. 한마디로 알기 쉽게 요약해 말하면, 그들은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은 고상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가장 강한 편이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지금 근거 없이 구원을 기대하는 여러분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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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6-2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우연히 이 글을 발견하고 곧바로 예약주문했습니다. 천병희 선생님의 원전 번역본이 새로 나온다니 여간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일부만 읽어 보더라도 투키디데스의 빛나는 명문장들의 향기를 다시금 느낄 수 있군요.

'멜로스인들과의 대담' 중 아테나이인 사절단의 명문장 가운데 제게 인상깊었던 부분 하나를 덧붙여 봅니다.

* * *

멜로스의 파멸

"여러분의 결의를 보고 판단하건대, 여러분만이 미래를 눈앞의 사실보다 더 확실하게 생각하고 그 희망 때문에 미지의 것을 마치 기존의 사실로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라케다이몬인과 천우신조와 희망을 믿고 모든 것을 건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95쪽,범우사)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3 17:24   좋아요 0 | URL
현실의 한계에 부딪힐 때, 천우신조와 희망 말고 무엇으로 이겨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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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붙은 살이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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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최재천, 김용택, 박원순 등등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 열다섯 명의 서재를 살펴본 기획 <지식인의 서재>, 알라딘에서는 책 속에 갇힌 서재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아 직접 그들의 서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첫 만남은 헤이리 게스트하우스 모티프원 주인장 이안수. 가장 덜 알려졌기에 가장 궁금한 까닭에, 이분을 꼭 만나게 해달라고 출판사를 졸랐다. 자유로를 달려 도착한 모티프원은 지붕 아래 둥지를 튼 새들의 지저귐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런데 걸어나오시는 이분, 하얀 수염을 기른 모습이 <킬빌>의 파이메이 아닌가. 오랜 기자 생활로 단련된 능숙한 인터뷰 솜씨는 인터뷰어의 기를 살짝 누르며 시작하는데...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알라딘 인문MD 박태근)

[문화예술인 이안수 인터뷰] 

이안수(이하 이) : MD가 무슨 뜻인가요?

박태근(이하 박) : (앗, 첫 질문도 시작하기 전에 선수를 뺐겼다.) 아, 그게 머천다이저의 약자인데, 책을 고르고 알리는 일을 합니다.

이 : 그럼 알라딘 MD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네요. 책이란 알곡을 씹어 반소화시켜서 전해주는 일이잖아요.

박 : (아, 이런 칭찬으로 시작을, 분위기는 이미 넘어갔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라고 하셨는데 시작부터 짐을 안겨주시네요. (웃음) 이번 책 <지식인의 서재>에는 열다섯 분의 문화인이 나오는데 사실 제 세대에서는 선생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듯합니다. 오랜 기간 잡지기자로 일하셨고, 사진과 솟대 작업 등 예술가로서도 활동하고 계신데요. 그리고 이제는 이곳 헤이리에 게스트하우스 ‘모티프원’을 만들어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간 삶의 여정을 소략하게 전해주신다면요.

이 : 대학을 졸업하고 30여 년을 여행하는 삶으로 지냈어요. 제가 좋아하는, 욕망하는 일을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보통의 직장 생활을 할 것인가 고민을 했는데, 결론은 전자였어요. 그래서 택한 일이 여행 기자였어요. <월간 여행>이란 잡지에서 일을 시작했죠. 물론 한국의 잡지 시장이 불안정하고 부침이 심하기 때문에 저도 그 파고 속에서 <뮤직 라이프>, <디자인 저널> 등의 잡지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주로 여행을 비롯해 문화 분야에서 일을 해왔죠. 전 길 위에서 지내는 걸 너무 좋아했어요. <월간 여행>에서 취재할 때는 보름 정도를 바깥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간첩 신고를 받은 적도 있거든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그저 즐거움이었어요. 그래서 회사를 옮기고 나서도 늘 떠나는 삶을 이어왔죠. 한 마디로 정리하면 ‘길 위의 방랑자’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 과정에서 제 아내가 빈 자리를 많이 채워줬죠.

박 : 경제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듯한데요.

이 : 네, 그래서 애초에 결혼을 할 때 ‘나는 돈을 모을 자신이 없다’고 선언을 했죠. 저축을 하기 위해서 오늘을 산다면, 그건 굉장히 불안한 삶이에요. 언제든 사라져버릴 수 있거든요. 돈으로 미래를 담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내 몸 속에 저축을 하면 그건 영속적이죠. 그래서 문화적 경험, 연극을 본다거나 책을 사서 읽는다는 건 피 속에 흔적을 남기는 거예요. 제 삶의 궤적도 이런 맥락에서 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을 떠돌다 이곳에 와서 드디어 헤이리에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박 : 인터뷰를 진행하면 늘 우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요. 오늘의 첫 번째 우문은 이렇습니다. 아주 오랜 기간 많은 곳을 둘러보셨는데,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이 : 정말 우문인데요. (웃음) 인터뷰를 하면 99%는 그런 질문을 해요.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든지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을 꼭 묻거든요. 저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려고 여행을 떠나지는 않았어요. 그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으로 내일을 추구하며 사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나를 감동시킨 ‘사람’이 있는 곳이에요. 아름다운 기억, 장소,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곳 말이죠.

박 : 이곳 게스트하우스 모티프원과 선생님께서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연이 되고자 기다리는 거 아닐까 싶네요. 지금 선생님과 제가 마주앉은 이 공간의 이름이 ‘Library 0'인데요. 숫자 0인지 알파벳 O인지 모르겠지만, 1만 권이 넘는 책이 가득한 이곳에 이런 이름을 붙인 까닭은 무엇인가요.

이 : 그렇게 크지 않은 집이지만 공간마다 이름을 붙였어요. 말씀처럼 제로로 읽어도 되고 알파벳 O로 읽어도 돼요. 무엇이든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비우는 거 같아요. 책을 통해 다른 누군가의 삶을 감각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의 주관이나 껍질을 내려놓아야 하거든요. 단단한 껍질 속에 나를 가둬 두고는, 어떤 책을 읽어도 몸으로 깨달을 수 없어요. 자기를 비어 있음으로 만들어 놓지 않고서는 다른 이에게 귀 기울이기는 데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독서를 스펙을 위한 공부로 생각한다면 다르겠지만 말이죠. 사람을 만나는 일도 마찬가지죠. 결국 어떤 태도로 상대를 대하고 만나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정리하면 제로로 나를 비운 상태에서 책, 사람, 자연을 만나겠다는 결심인 거죠.  

 

 

박 : 그런 깨달음 역시 책과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얻은 건가요? 아니면 오래 전부터 품고 계신 삶의 지향 같은 걸까요.

이 :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죠. 저는 창고를 만들고부터 사람에게 재앙이 닥쳤다고 생각해요. 어떤 동물도 지금 먹을 것 외에는 음식을 쌓아두고 먹지 않거든요.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도 한 번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우고 나면 곁에 얼룩말이 와서 어슬렁거려도 절대 잡아먹지 않거든요. 잡아뒀다가 다음에 먹어야지, 이런 생각을 안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의 창고는 있음에도 무한정 쌓아놓기를 원한다는 거죠. 이게 불행의 씨앗이에요. 저는 여행을 하면서 비움의 철학을 몸으로 깨달았어요. 오랜 기간 여행을 하다 보면 종이 한 장도 무겁거든요. 그래서 선수들은 지도책도 지나온 곳은 찢어서 버립니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도 무거운 게 우리 인생이라는 거예요.

박 : 책 제목이 <지식인의 서재>입니다. 이런 책은 대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게 마련인데요. 아마 이 책의 주인공들은 서재를 어떻게 꾸미고 나누고 채우는지 궁금해 하실 듯합니다.

이 : 아마 분류는 서재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부담으로 느낄 문제일 겁니다. 저도 애초에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를 해보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어떤 책이 필요할 때 제자리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질서를 염두에 둔 거죠. 철학, 역사, 예술, 여행, 요리 등 큰 분류로 구상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서재는 저만의 공간이 아니고 가족과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모두의 공간이잖아요. 저는 책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읽을수록 부가가치가 높아진다고 봐요. 누군가의 흔적이 쌓일수록, 다음 사람은 앞선 사람의 생각을 함께 읽을 수 있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이 곳에 여행을 온 어떤 분이 10권의 책을 골라서 읽는다고 하면, 그분이 고른 책 자체가 저에게는 또 다른 독서가 되는 거예요. 그가 고른 책으로 그 사람의 지금 생각과 고민을 읽어낼 수 있으니까요. 결국 서재를 열어두면서 책이 두 배, 세 배로 늘고, 독서가 열 배, 스무 배로 쌓이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꽂아두는 그 자리가 제자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책을 찾을 때마다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에요. 어제 <즐거운 불편>을 찾을 때도 서재를 따라 저쪽에서 이쪽까지 여행을 하다 보니 하루가 꼬박 지났어요.

박 : 무분류의 분류라, 선생님께는 이거야말로 ‘즐거운 불편’이겠군요. (웃음)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아니시니 책을 읽는 시간은 따로 없을 듯한데요. 특별히 독서에 집중하는 때가 따로 있을까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왠지 선생님께서는 배를 깔고 누워 한 팔로 턱을 괸 채 책을 읽으실 듯한데요.

 

이 : 전에 누워서 읽어본 적도 있는데, 저에게는 잘 맞지 않았어요. 저는 책을 들어서 보는 게 좋더라고요. 물론 불편할 수는 있지만, 적당한 불편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곳에는 소파가 없어요. 지금 박 선생님께서 앉아계신 자리도 그다지 편하진 않을 거예요. 여기 있는 의자는 하나같이 팔걸이가 없거든요. 물론 제가 일부러 직접 만든 거지요. (웃음) 이 의자에 앉으면 손을 둘 때가 없어서 책상 위에 둬야 하거든요. 책 읽기에 적당한 수고로움과 불편함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이들에게 소파와 티브이 두 가지만 없애면 된다고 아주 강력하게 말해요. 책을 대했을 때는 편하게, 나머지는 불편하게. (웃음)

박 : 제가 책을 읽다가 놀란 부분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책들을 다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책을 읽는 것보다 사는 걸 즐기는 저로서는 차마 믿을 수가 없는 말인데요. (웃음)

이 : 모든 책을 정독했다는 말은 아닌데요. 중요한 건, 저는 책을 받으면 그 속에 담긴 내용이 궁금해서 거칠게라도 넘겨보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너무 궁금한 거예요. 받는 순간 일독을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정독을 했든 속독을 했든, 혹은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든 방치된 책은 없다는 말이지요. 게다가 책은 값을 치르고 사는 거잖아요. 저는 밥을 먹을 돈으로 책을 사거든요. 그걸 생각하면 어떻게 안 보고 내버려둘 수가 있겠어요.

박 :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책을 읽는 때는 따로 여쭤보지 않아도 되겠군요.

이 : 네, 언제든 읽는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거예요. 저는 명절 때 친지들이 모여도 책을 읽거든요. 그래서 늘 모임에서 열외지요. 이 앞집 사는 교수님하고 러시아에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이분이 열흘 정도 함께 지내면서 제가 새벽 4, 5시까지 책을 읽는 걸 보고는 ‘우리나라 교수들 반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제가 바이칼 호수에 갈 때 관련한 책을 가져갔는데, 바로 그곳에서 그 책을 읽는 데 내용이 속속들이 들어오지 않겠어요? 지금 그 책이 말하는 그 바위가 바로 여기 있는데 읽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저는 어떤 곳에 여행을 가서 며칠이 지나면 가이드처럼 다른 이들에게 설명을 하고 다닐 수가 있어요. 어딜 가나 원주민이 될 수 있어요. 오히려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외국인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웃음)

 

박 : 음, 질문의 수위를 조금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도대체 선생님께 책을 따로 모아두는 서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이 : 네, 이 책에서 서재 이야기를 했지만 저도 사실 서재는 불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책은 계속 여행을 해야 하고, 읽은 책을 쌓아둘 필요는 없지요. 그래서 한 번은 책을 싹 비운 적도 있어요. 어느 곳이든 서재가 될 수 있거든요. 가방 속에 두세 권의 책을 넣고 다니다 펴들면 그곳이 바로 서재인 거죠. 다른 책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거잖아요. 늘 순환하는 서재인 셈이죠. 공간을 점령하는 서재는 반대예요. 핑계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책이 있는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한 재료로서의 접근성 때문인 거예요, 필요에 의한. 책이야말로 여행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박 : <지식인의 서재>도 서재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전해주기 위해 만든 책인 듯합니다. 열다섯 분의 서재를 다루는데, 선생님께서 눈여겨보신 다른 분의 서재가 있을까요? 물론 이것 또한 우문입니다, 벌써 두 번째군요. (웃음)

이 : 물론 각각의 서재는 모두 주인의 생각에 따라 모양을 갖추는 거니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겠죠. 몇몇 서재는 이것이 서재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거나 장식적인 효과에 치중한 건 아닐까 싶은 서재도 있어요.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각자의 개성이라 생각해요. 반갑게도 제가 꿈꾸는 서재와 비슷한 장면도 만났어요. (아마도 김용택 선생님 서재일 듯) 저는 언젠가 다시 길 위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지금 이곳도 길이지만 조금 다른 맥락에서요. 저는 이곳이 항구라고 생각하는데요. 지금은 항구를 지키며 배를 맞이하는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집 뒤에 조그마한 트레일러가 있어요. 저는 언젠가는 그게 내 집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 :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의아했던 게, 오랜 기간 많은 글을 써오셨잖아요. 본문에서도 글쓰기야말로 책읽기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고요. 그런데 정작 책은 안 쓰셨단 말이죠.

이 : 물론 책을 엮을 만큼의 글을 써오긴 했죠. 잡지 생활을 마친 후에는 책을 써볼까 하는 고민도 있었고요. 블로그에도 꾸준히 글을 올렸고요. 이곳 헤이리에 출판인들이 많으니 출간 제안도 많이 받았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책이라는 게 결국 소통하기 위한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의 유통이라는 게 책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내 생각은 여러 통로를 통해서 이미 누군가의 독서 행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거죠. 물론 책이라는 꼴로 정리해내는 것의 의미는 있겠죠. 그런데 나무를 자르는 죄스러움을 면할 정도의 절실함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생각이 더욱 숙성되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낼 수도 있겠죠. 요즘 책을 보면 왜 이걸 책으로 엮었을까, 어떤 생각으로 만든 걸까 의문이 가는 책도 많거든요. 내 책도 그런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을 좀더 곰삭힐 필요가 있어요.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서두르지는 않고 있어요.

박 : 나무에 대한 죄스러움은 크게 공감합니다. 저도 편집자로 일을 했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종이로 사라지는 숲 이야기>를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 맞아요, 저는 캐나다 최대의 제지공장 근처를 지나다가 일주일을 머문 경험이 있어요. 그곳에서 종이가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전 과정을 지켜봤거든요. 통나무가 베어져 오면 쪄서 물렁하게 만들고 큰 드럼에 넣어 갈기갈기 찢거든요. 나무의 사망을 지켜본 거죠, 그것도 처참한 사망을. 그걸 통해 얻는 게 이 종이 한 장이거든요. 나무의 시체 위에 뭘 기술해야 그 죽음이 아깝지 않을지 고민해야 해요. 모든 저자와 편집자 들은 적어도 한 차례는 나무의 죽음을 견학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박 : 네, 그 말씀 잘 새겨 기억하고 전하겠습니다. 어느새 인터뷰를 정리할 시간이 되었는데요. 알라딘 인터뷰의 마지막 공식 질문입니다. 독자 분들께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몇 가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 우선 요즘 제가 독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걸 먼저 말씀드릴게요. 요즘 저는 책을 읽는 것만이 독서인가, 하는 물음을 자꾸 던지게 되는데요. 삶의 경험이 쌓이면 자기 나름의 보편 혹은 체계가 생기잖아요. 이게 주관이고 소신일 텐데요. 이게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독서가 많은 역할을 할 텐데, 여기에서의 독서는 책뿐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책만 읽는 독서는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행동으로 옮아가지 않고 지식만 습득하게 되는 경우가 그래요. 독서 행위로만 습득한 추상은 믿는 행위가 아니에요. 내 피부에 닿는 감각과 경험이 믿는 행위에요. 책을 읽는 독서뿐 아니라 사람을 읽는 대화, 자연을 읽는 소요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거죠. 이게 모두 독서라는 거예요. 한 가지 재료로 요리를 만들 수는 없는 거예요. 이런 다채로운 독서가 모여 독서 행위가 완성되는 거예요. 저도 예전에는 텍스트에 집착했어요. 만 권의 책은 읽어야겠다, 이런 목표, 아니 욕심 말이죠. 그런데 그걸 마치고 나니 자유롭고 차분해졌어요.

박 : 텍스트에서 자유로워졌는데 책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의미일까요.

이 : 네, 요즘에는 책에 담긴 글보다 그림이 더 재미있어지더군요. 또 가공되지 않은 원 데이터, 예를 들면 도감이나 사전 같은 책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자연을 곁에 두고 살다 보니 자연물에 대한 사실 자체와 실제 자연물을 감각하는 나 사이가 궁금해진 것 같아요. 자연만큼 흥미로운 독서 행위는 없는 것 같아요. 다시 질문을 돌아가서 한두 권의 책을 권한다면, 우선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에요. 늘 다른 이에게 선물하는 책이죠. 그리고 한 큐레이터가 기획한 <비밀엽서>를 권하고 싶어요. 사람의 다채로운 본성을 보여줘서 자기와 맞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읽는 데 부담도 없고요. 마지막으로는 <현산어보>와 <택리지>를 추천합니다. 각각 자연을 읽는 행위, 시간과 공간을 읽는 행위가 잘 구현된 책이에요. 이런 책을 통해 가르치지 않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영속 가능한 지구의 삶을 공감해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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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룡뇽 2011-06-1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책인데 인터뷰를 보니 더 좋네요.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52   좋아요 0 | URL
아, 이미 읽어보셨군요. 꼼꼼히 다시 읽어주시고 다음 인터뷰도 기대해주세요.

봄의로망 2011-06-16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홀.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헤이리에 이렇게 멋진 곳이 +_+ 나무의 처참한 사망. 명심해야겠어요. (사놓은 책부터 야금야금 읽어야 나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겠지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52   좋아요 0 | URL
앗, 사놓은 책들을 생각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건 거의 병인지라~~

갈매나무 2011-06-1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다로든, 책으로든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두 분의 대화가 초 여름의 신록처럼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시원하고 경쾌하군요. 텍스트에서는 벗어났는데 책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뭇 중생들은 어쩌라고... 흠!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53   좋아요 0 | URL
그저 열심히 읽을 밖에요...

룰루브이 2011-06-1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사진을 보고는 우리나라 분이 아닌줄 알았어요;;; (무식의 통통;) 종이 한 장도 무거운 게 우리 인생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인터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54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실제 뵙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무협 영화를 좋아해서, 여행 가셨을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하시더군요. ^^

cc 2011-06-1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알라딘 MD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네요. 책이란 알곡을 씹어 반소화시켜서 전해주는 일이잖아요."
마음이 덜컹, 하네요. 멋진 인터뷰. 짝짝짝.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15:31   좋아요 0 | URL
노력해야지요. 다른 거 없습니다. 은근과 끈기.

바람은사시 2011-06-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은 이로 하여금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영혼을 갖게 할 수 있는 책을 만들려 한다는 어느 출판사 대표님의 말씀이 떠오르네요...그분도 나무의 죽음을 목격하셨을가요?^^ 아무 생각없이 책을 대하던 마음이 죄스럽게 느껴지네요.
어른들이 책을 소중히 다루라는 말씀에 이런 뜻도 있겠구나 싶네요. 인터뷰 잼나게 읽었어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0 15:41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나무의 죽음' 하면 안타깝게도, 차윤정 선생이 떠오르네요.

여치 2011-06-17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 한장 책 한권이 정말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저도 여행도 떠나봐야겠네요. 보면서 자연에서 또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알라딘 속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 시간 가는줄 모르고 봅니다. 좋은 읽을 꺼리 주시는 md, 알라딘 감사해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0 15:42   좋아요 0 | URL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많은 알라디너께서 올려주시는 서재 글이 훨씬 풍성하고 재미난데요. 서재의 세계에 풍덩 빠져보시길.

미수가루아 2011-06-2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우자....내려놓자..다짐다짐해보는데 비우는 게...왜그리 어려운지 모르겠네요...말씀마다 어찌그리 쏙쏙 머리속에 콕콕 박히는지 모르겠네요..^^ 눈과 맘과 머리가 동시에 즐건운 인터뷰였습니다... ^^*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7 16:34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모티프 원에 찾아가시면 거의 언제든 만나뵐 수 있으니 한 번 연락드려보세요. 실제 목소리도 또랑또랑하셔서 귀에 쏙쏙 들어온답니다.

무한의삶 2011-06-3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를 자르는 죄스러움'이라는 부분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뜨뜻한 것이 가슴속에서 솟구쳐오르네요.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_^

인문MD 바갈라딘 2011-07-04 11:55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한 주, 7월, 하반기 모두 힘차게 시작하시길.

알비스 2011-07-1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MD가 무슨 약자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대략 마켓팅 디렉터(Marketing Director)의 약자 정도로 짐작을 했었는데 머천다이저의 약자였군요. 요즘 보면 프레젠테이션을 PT로 프로듀서를 PD로(이건 쓰기 시작한 것이 오래됐지만) 국적불명의 무분별한 축약형 단어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좀 씁쓸하더군요.
앞으로도 좋은 인터뷰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8-09 11:59   좋아요 0 | URL
사실 MD의 정확한 의미는 아무도 모르는 듯합니다. 저도 제가 아는 선에서 말씀드린 거라. 다음 인터뷰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내 청춘의 감옥> 이건범 선생님입니다. 고맙습니다.

지구의 오랜 꿈 2011-08-03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터뷰 감사합니다. 저도 뵙고 싶군요.
자연과 소통, 사람, 배움, 비움, 모두 아름다운 단어들입니다.
이런 분이 계셔 주셔서 참 고맙다는 생각입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8-09 12:00   좋아요 0 | URL
네, 헤이리에 가시면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직접 뵐 기회도 만들어보세요.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접근하든 투퀴디데스야말로 서양에서는 가장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역사가라는 평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라틴 고전을 꾸준히 번역해온 천병희 선생님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드디어 나옵니다. 그리스뿐 아니라 서양 문명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 서양 고대사 최대의 사건이자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더불어 역사 서술의 기원으로 불리는 작품이지요. 많은 분들이 꾸준히 찾는 텍스트인데 그간 중역본과 축약본만 소개되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어 원전 번역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게 된 지금, 조금 기뻐하고 많이 뿌듯해 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오늘은 천병희 선생님의 서문 가운데 도움이 될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다음에는 이 책에 실린 40여 편의 연설문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멜로스인들과의 대담'을 전해드리겠습니다. 

6월 30일 출간 예정이며 알라딘에서 단독 예약판매를 합니다. 해당 기간에 구매하신 분 가운데 10분을 추첨하여 5분께 <역사>를, 5분께 <일리아스+오뒷세이아 세트>를 드립니다. 여러모로 도움 주신 숲 출판사와 흔쾌히 본문 공개를 허락해주신 천병희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예약판매 이벤트 페이지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10615_sup  

 

[서문_아주 특별한 비극,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주도 세력은 아테나이(Athenai)와 스파르테(Sparte)였다. 그들은 호시탐탐 그리스를 노리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들이었다. 이 놀라운 승리 이후 진취적인 아테나이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강력한 해군력에 힘입어 에게 해에 제국을 건설했고, 보수적인 스파르테는 과두정체를 신봉하며 강력한 중무장보병에 힘입어 그리스 본토 남부의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반도를 지배했다.
  황금기의 아테나이는 정치·문화·예술 분야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유산들을 쏟아내는 한편 지속적인 팽창정책으로 제국을 넓혀나갔다. 아테나이의 독주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테는 일부 동맹국의 사주를 받아 기원전 431~404년 아테나이와의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27년 동안 지속된, 그리스 세계의 문명과 흐름을 뒤바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기원전 421년 양국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잠시 전쟁이 중단되지만, 아테나이가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로 국력이 약해진 데다 서아시아의 패자(覇者) 페르시아(Persia)와도 사이가 나빠지자, 전쟁을 재개한 스파르테가 페르시아의 지원 속에 아테나이에게 항복을 받아낸다. 유례 없이 잔혹했던 전쟁에서 패배하며 아테나이는 황혼기에 접어든다.
  당시 그리스의 산문문학은 역사가 짧아서 기원전 5세기 후반부 이전에 씌어진 것은 지금까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하는 산문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부에 작품 활동을 하던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 초에 일어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 초점을 맞춰 방대한 저술을 쓰며, 약간의 초기 역사와 여러 부족과 국가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헤로도토스가 소아시아 할리카르낫소스(Halikarnassos) 시 출신인 데 견주어 기원전 460년경 아테나이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기원전 400년경 세상을 떠난 투퀴디데스는 적어도 한 번 이상 장군(strategos)으로 선출되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나이군을 지휘했으며,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서 이 전쟁의 역사를 기술(記述)했다. 모두 8권으로 구성된 그의 저술 1권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그리스 역사와 환경에 관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고, 전쟁에 관한 본격적인 기술은 2권에서 시작된다. 현존하는 저술은 기원전 411년 가을에서 중단되지만 전쟁의 결말은 몇 군데에서 언급되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저술이 넓다면 투퀴디데스의 저술은 깊은 편이며, 헤로도토스가 신의 섭리를 믿는다면 투퀴디데스는 모든 것을 인간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설명한다. 헤로도토스는 일화를 소개할 때 흔히 이설(異說)도 함께 소개하지만 투퀴디데스는 거의 언제나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만 소개하며 그것을 믿어주기를 바란다. 투퀴디데스는 자신의 역사 기술 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각의 인물이 전쟁 직전이나 전쟁 중에 발언한 연설에 관해 말하자면, 직접 들었든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든 나로서는 정확히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실제 발언의 전체적인 의미를 되도록 훼손하지 않으면서 연설자로 하여금 그때그때 상황이 요구했음 직한 발언을 하게 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우연히 주워들은 대로 또는 내 의견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든 남에게 들은 것이든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내가 기술한 역사에는 설화가 없어서 듣기에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책은 대중의 취미에 영합하여 일회용 들을 거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영구 장서용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출판이 되자마자 고전이 되었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그가 중단한 곳에서 그리스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 특별한 비극 속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았다. 그의 영향을 받지 않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함축적인 문체와 날카로운 분석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가장 심오한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았고, 19세기 독일에서는 랑케(L. von Ranke) 등에 의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의 이상(理想)으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전반까지 이어졌지만, 그 뒤에는 그러한 주장에 회의를 품으며 그의 문체와 언어 분석에 치중하는 경향이 차츰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하려는 그의 열의와,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그의 노력과, 평이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기술과, 인간 본성을 파고드는 연설을 적절히 한데 엮는 능력은 여전히 경탄의 대상이다.(중략)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미완으로 끝났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 있었지만 전해오는 텍스트는 기원전 411년 가을에서 갑자기 중단된다. 크세노폰(Xenophon)의 <그리스 역사>(Hellenika) 등 이후의 역사서들이 기원전 411년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미루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투퀴디데스가 발표한 것의 전부라고 확신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기술하기 시작해 전쟁이 끝나고도 살아 있었으니, 우리는 이런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투퀴디데스는 사건을 1년 또는 반년 단위로 사건 직후 바로 기록해 그 부분을 종결한 것일까, 아니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메모만 해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했을까? 아니면 그 두 가지 방법을 다 쓴 것일까?
  이를테면 2권 65장의 페리클레스에 대한 평가에서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 등 페리클레스 사후 사건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사건을 1년 또는 반년 단위로 사건 직후 바로 기록해 그 부분을 종결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대부분(1권 1장~4권 51장, 5권 84장~8권 1장)은 연설과 여담을 곁들인 정교한 사건 기술로 짜여 있다. 그러나 두 부분(4권 52장~5권 83장, 8권 2~109장)에는 연설이 거의 나오지 않고 사건이 무미건조한 삽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어, 이는 투퀴디데스가 죽기 전에 마지막 손질을 하지 못한 예비 작업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6권 1장~8권 1장은 시칠리아 섬의 지리와 역사를 포함해 2년 동안 계속된 아테나이의 시칠리아 원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별도의 전공 논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에도 그의 기술에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듯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띈다. 이런 괴리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독일의 역사가 울리히(F. W. Ullrich)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기원전 421년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사이에 니키아스(Nikias)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투퀴디데스는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해 스팍테리아(Sphakteria) 섬의 함락을 포함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1권~4권 51장을 완성했으나, 시칠리아 대참사 후 계획을 수정하여 시칠리아 원정과 그 이전의 멜로스(Melos) 섬 사건에 관해 별도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또한 기원전 404년 아테나이가 최종적으로 패하자 그는 두 번째 서문(5권 26장)을 쓰고 전체를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전에 쓴 것을 조금씩 수정하기 시작했으나 죽기 전에 수정 작업을 끝마치지 못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어떤 편집자가 이것들을 한데 묶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상태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론’에 대해 그렇다면 투퀴디데스는 역사 기술과 정치철학과 관련해 아무 원칙도 신념도 없는 역사가가 되고 말 것이라며, 그가 이용한 여러 가지 방법은 그때그때 가장 적합한 것이라는 ‘통합론’이 요즘은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접근하든 투퀴디데스야말로 서양에서는 가장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역사가라는 평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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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 2011-06-15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으로 드디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나왔군요. 정말 기쁘고 반가운 소식입니다. 원전번역본이 없어 아쉬움이 컸는데 무더운여름 시원한 냉수 마신 기분입니다. 천병희 선생님은 잘 읽히고 가장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 주셔서 늘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당첨 됐으면 좋겠네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5 21:45   좋아요 0 | URL
네, 이번에는 최초로 저자와의 만남도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워낙 번역 작업에 몰두하셔서 짬이 날지 모르겠지만 꼭 한 번은 자리를 마련해볼 참입니다.

마산지킴이 2011-06-15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반가운 소식이네요. 이제야 나온것이 아쉽지만 정말 기쁜소식입니다. 2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니 조바심이 납니다. 빨리 멜로스인들의 대담 이라도 노출시켜주세요. 서로 팽팽한 주장들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더욱 궁금해 집니다.
역시 그리스 고전문학은 원전으로 읽어야 제맛...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5 21:47   좋아요 0 | URL
대신 2주 후에는 꽤 오랜 기간 곱씹으며 들여다볼 시원한 텍스트 하나를 만나게 되겠지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멜로스인들의 대담은 다음 주 초에 올릴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무개 2011-06-1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대단하네요.. 천병희선생님 안계셨으면 이 엄청난 일을 우리나라에서 누가 해냈을까 싶습니다. 부디 장수하시기만을 바랄뿐..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4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판매나 홍보를 떠나 뭔가 선생님께 힘을 전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아마 선생님께서도 아무개 님 응원을 전해들으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timeroad 2011-06-1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딩으로 리드하라, 이지성 씨의 책을 읽으면, 정말 이 책을 비롯한 원전번역서가 얼마나 타는 목마름이었나를 느끼게 합니다. 늦지 않았겠지요. 원전으로 읽기 위해서 희랍어를 지금 공부해볼까 고민하는 중입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를 제처두고 얘기할 수 없는 고전이지요. 아주 적절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서숣방법과 두 책을 비교하게 되는, 그런 책이 아닐까 합니다. 기대만빵입니다. 천선생님에게 늘 감사하고, 출판사와 알라딘의 열정에도 감사드립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41   좋아요 0 | URL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재미난 비교네요. 희랍어까지 공부하실 마음이라니, 부디 성공하시길~~

라라 2011-06-16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전쟁사. "오늘날 하찮은 일로 간주되는 사건도 훗날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기 때문에 사건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기술했다." 작고하신 김진경 선생이 이 책을 논한 글 가운데 일부인데요, 관점을 가진 집필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천병희 선생님의 주해가 기대됩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42   좋아요 0 | URL
"오늘날 하찮은 일로 간주되는 사건도 훗날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지금 우리에게도 울림이 큰 말이네요. 고맙습니다.

motoko3 2011-06-1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합니다. 1801년에 시작된 역경의 시간들, 18년 만에 혹은 되던 해에 목민심서를 완성합니다. 다산초당은 18번 국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네가 큰집, 다산의 외가는 작은집 계열), 다산의 외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일종의 연수소를 겸한 출판사가 강진 만덕리에 세워진 것이지요. 해남윤씨 집안과 이래저래 관련이 있었던 다산의 제자들, 연구원이면서 출판사 직원들이였던 이들의 숫자가 18명입니다. 역경을 딛고 역경의 세월이 있었기에 500권의 편저서가 나오게 되었다는 점, 투키디데스의 망명생활은 20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세월은 그의 역사서술에 도움이 주었다고 하는데요, 어쩌면 18년이나 20년이라는 상당한 세월은 세상을 너무 격정적이지 않게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거리'를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기대가 되는 책의 출간, 반갑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51   좋아요 0 | URL
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오게 되죠. 전쟁 안과 밖 양쪽에서 바라본 그의 기록이 기대됩니다.

새우 2011-06-16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를 어긴 초자연적인 존재, 티케.. 투키디데스는 티케를 거듭 강조한다는 부분을 인상깊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티메는 정의를 어긴 폴리스를 정벌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이지며 전투에서 힘이 정의에 대해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지만, 정의를 어긴 나라는 결국 티케라는 신의神意에 의해 정벌당한다는 것, 이해가 안 가서 기억하는 단어인데, 이번 책에서 그 맥락을 다시 짚어보고 싶다. 기대가 되고 읽은 후에 꼭 리뷰를 올리도록 할게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00:51   좋아요 0 | URL
네, 새우 님의 리뷰를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yess1985 2011-06-1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 소식이 반갑고요, 진작에 나왔던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다시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쉽지 않은 일인데..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그의 시선에서 얻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인터넷상에서 요동치는 여론과 그것을 고스란히 베끼는 언론이 생산한 기사들, 지금 진행되는 우리 주변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책이 될 듯..가장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역사가(평가)가 전해주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17 15:37   좋아요 0 | URL
옛것이 좋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요즘입니다. 고전이라 불리는 이유겠지요. 고맙습니다.

다섯손가락 2011-06-18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에서 저자의 역사기술방법에 대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라는 대목인 참 숙연하게 다가옵니다. 진인사 하였으니 대천명할 뿐이라고 해야할까, 발간 즉시 고전의 반열에 진입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런 원전번역 작업 또한 곧바로 독자들이 평가해주리라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계발서들의 범람에 신물이 나는 즈음, 단비와도 같은 소식입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0 17:53   좋아요 0 | URL
이 말도 덧붙여 둡니다. "이 책은 대중의 취미에 영합하여 일회용 들을 거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영구 장서용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목표로 책을 쓰고 그게 실제 실현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oren 2011-06-2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흐름을 지식으로 파악한 자와 그에 무지한 자 중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안전하게 이 위험스럽기 짝없는 세상 속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투키디데스가 이 책을 남겼으리라는 대목이 새삼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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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의 생각(세 가지 동기)

그에게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보다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행위의 원천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가 사실보다 사람의 심리를 중시한 이유가 있다.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체험을 통해 도달한 생각 중에서 사람의 심리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의 행동 동기란 부의 추구와 명예욕과 공포로부터 도피하려는 세 가지 동기로 집약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원망(願望)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은 힘을 얻으려 한다. 게다가 사람이 힘의 획득을 노리는 한 다툼은 끊이지 않고, 사람의 안전은 언제나 위협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사람은 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강한 힘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그는 체험했던 것이다. 이러한 끊기 어려운 악순환은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국가 사이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그는 심각한 비관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관한 그가 왜《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써서 후세에 남기려 했을까? 그것은 이러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역사의 흐름을 지식으로 파악한 자와 그에 무지한 자 중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안전하게 이 위험스럽기 짝없는 세상 속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후자를 자기 작품으로 계몽하고 그 수를 되도록이면 적게 만들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다 많은 사람이 보다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리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임에 틀립없다.
(404쪽, 범우사 편)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3 17:25   좋아요 0 | URL
꼼꼼한 댓글 고맙습니다. 이후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본과 범우사 판을 함께 두고 살펴보아도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