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사실상 방대한 규모의 인류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 속의 '지식'보다는 '지혜'를 밝히고자 한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거북살스런 오만함이 없다. 약삭빠른 속도감보다는 그 뒤에 감춰진 느린 움직임들의 미덕을 품어 안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단순히 당위와 규범이 아니라 인류 문명사 전반에서 발견되는 명백한 사실들을 놓고 희망의 근거를 삼고자 한다는 점에서 종말론적 위협으로 먹고사는 다른 환경 도서들과도 다르다. 그래서일까. 왠지 이 책을 읽고 나면 '잘 모르겠다'는 소리도 맘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첨단과학기술의 똑똑함 앞에서 피곤하게 경쟁적으로 똑똑한 척하려 애쓰지 않고, 차라리 잘 모르겠다는 (무책임이 아닌) 겸양의 태도를 내보이는 것이 오히려 생존에 도움이 되는 지혜로운 태도가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옮긴이의 말)

 
   

 

 

꽤 오래 전 책인데 <도둑 맞은 미래>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90년대 후반에 환경호르몬 문제를 제대로 알린 책이지요. 공저자 다이앤 듀마노스키가 오랜만에 신간으로 찾아왔습니다. <긴 여름의 끝>이란 멋진 제목은 지난 1만 1700년 동안 (고마운 줄 모르고) 누린 기후의 축복을 말합니다. 이 막간이 끝나면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그렇다고 인류가 하루 아침에 멸망하거나 지구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큰 어려움을 이겨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제 기존의 진보 서사는 잊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가올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문화 서사가 필요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무엇에 맞서야 하는지,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묻고 답합니다.

듀마노스키의 주장이 잘 정리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공개합니다. 

 

 

9.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_ 정직한 희망

 
이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길은 우회로보다 찾기 어렵다.
─월리스 스티븐스

 
위험의 시대에는 달콤한 거짓말보다 쓰디쓴 진실이 더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근대의 세기에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준 신화의 약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진보를 통한 구원의 믿음은 오존 구멍과 지구온난화 같은 사태가 나타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오늘날 가장 빠른 진보는 이 행성 을 우리 자신을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십 년 뒤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손실이 나타날 것이 확실하다. 가을철 뉴잉글랜드의 설탕단풍나무숲이나 열대 바다의 산호초들, 북극곰과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식물들과 저지대 섬들과 모래 해변, 그리고 일부 해안 도시들 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오늘 태어난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바꾸게 하려고 겁을 주는 환경종말론의 어두운 예언이 아니다. 이미 벌어진 변화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일 뿐이다. 지금 당장 모든 온실가스를 차단하더라도 온난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엔진을 끄더라도 질주하던 기차가 산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물론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재난의 강도가 약한 경로로 들어설 수도 있다). 앞으로의 100년은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 틀림없다.
  앞에 놓인 장애물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이제까지 세상의 변화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일어났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의 미래를 대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다. 앞으로의 몇 세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처럼 인식 가능한 형태로 펼쳐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인류의 여정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에 따르면, 역동적이고 변화 가능한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이 세상의 부자들이 당연시해왔던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기대할 권한이 없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본 경험은 얼마 되지 않는다. 중요한 원인은 기후가 너무 불안정해서 농업이나 정착 문명을 형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난 1만 1700년간 인간은 긴 여름과도 같은 기후상의 축복을 만끽했다. 이 간빙기는 유례없이 길고 도 평화로웠다. 기후사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이 막간의 시기는 특수한 가능성의 경관으로서 수천년 간 인간이 전 지구적인 문명을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막간극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내일의 가능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의 다음 장이 어떨지는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 특히나 기후시스템이 과거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변칙적인 양상으로 돌아갈 경우 상황은 더욱 난감할 뿐이다. 하지만 3만 2000여 년 전 우리 선조 가 완성해놓은 아름답고도 강력한 프랑스 쇼베 동굴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본질적인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다. 복잡한 문명이 발생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복잡한 방식으로 인간으로서의 특징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황갈색의 암벽에 목탄으로 그려넣은 말 머리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히 목이 굵고 턱이 묵직하며 칫솔모처럼 뻣뻣하게 일어선 갈기를 가진 말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몽골의 초원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말을 본 적이 있었다. 프셰발스키말이라고 하는 이 말은 동굴 벽에 있던 그 말들과 너무 닯은 모습이었다. 이 말이 풀 뜯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단단한 근육질의 몸과 그 세련된 빛깔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황금빛의 어깨에서 초콜릿 빛깔의 다리까지 색깔이 차츰 어두워지는 것이 이 말의 색깔은 열대 지방의 새처럼 현란하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하며 섬세했다. 귀의 끝은 동양의 수묵화 느낌이 나는 어두운 색이었다. 불에 탄 검은색 나무덩어리를 쥔 손은 암석상의 음영 처리와 대담한 선들을 가지고 그 턱과 어깨를 선명하게 그려내고, 귀의 어두운 윤곽과 뻣뻣한 검은색 갈기를 따뜻한 사슴털빛의 몸 색깔과의 대비 속에 그려냄으로써 그 위력적인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이 고대의 예술가의 세상에 대한 반응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서 내게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예술가와 나는 같은 눈과 심장으로 야생마를 보았다.
  만일 지구가 이다음 몇십 년간 더욱더 거친 음악 속에 몸을 맡긴다면 나는 인간들이 복잡한 문명을 포기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 춤사위의 일부로 남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바람을 갖는 것은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체들의 연방제 속에서 인간이 예외적이라거나(위장술의 천재인 오징어는 오징어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각각 특수한 존재이긴 하다) 가이아 또는 우주가 우리를 어떤 이유로든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유구한 드라마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하고 이 푸르고 생기 넘치는 지구상에서 자기만의 순간을 갖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3만 2000년 뒤에도 누군가가 나와 마찬가지로 그 야생마 그림에 사로잡히고 감동을 받아서 말이나 이미지로 그것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이 탐험 과정에서 내게 분명해진 것은 오늘날의 문명이 인류의 척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유일한 또는 최선의 방식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구는 인간이 없으면 더 나아질 것이라거나 우리는 본성적인 결함 때문에 자멸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내릴 이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위험은 과감한 문화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전 지구적 문명이 스스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조직된 인간 사회를 가능케 하는 조건까지도 파괴할 것이라는 점에 있다. 최악의 경우 근대 산업문명이 유발한 전 지구적 변화는 지구를 우리의 생명에 유해한 새로운 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다. 만일 지난 역사를 통해 어떤 지침을 얻을 수 있다면, 지구와 그 거대한 가이아의 과정은 산소 위기와 소행성의 충돌, 다른 충격적인 재난들 속에서 살아남았던 것처럼 근대적 세기의 공습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생명은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창조적이고 그 어마어마한 지구의 과정은 이미 레몬의 가장 쓴 부분을 가지고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독 성의 산소는 복잡한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다. 나는 우리가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인간이 근대적 세기의 악영향 속에서도 살아남아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쓸 수 있기를 기도한다. 


 
 

혼란 속의 길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지점은 그것이 엄청나게 불확실하다는 점뿐이다. 우리 시대의 거대한 유혹은 이 불확실성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충동일 수 있다. 서구의 사고방식이 흑백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때 절망‘(너무 늦었다’는 확신)에서든 과학에 대한 기대를 품고 근거 없는 장밋빛 환상을 대안으로 여기는 방식에서든 위안을 얻으려는 욕망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인류의 미래가 어두워질수록 희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인 희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지난 사회들이 문화적인 함정에 빠져 환경 변화의 도전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점을 돌아보며 인류학자 폴 보해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추려내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맹목적인 희망을 가지고 달리고 있는가? 이런 종류의 희망은 죽음을 몰고올 뿐이다.”
  나는 우리가 금지의 목록들을 다 추려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절망만큼이나 맹목적인 희망이 두렵다. 기술적인 조정에 대한 신념이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구원이든 인류의 역사는 그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종말론적 믿음이든 간에 불확실성에서 달아나 거대한 섭리라는 갑옷 속에 몸을 숨기는 경우, 우리는 미래에 대한 책임에서 멀어진다. 거칠고 비참한 변화의 한 중간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야 할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어려운 선택을 하고 행동하며 미래를 결정할 의무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인간의 문화는 그동안 도피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존재의 필연적인 불확실성과 대면하기 위해 눈앞의 길을 밟아왔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베다의 영향권에 있던 인도처럼 극동의 고대 문명들은 이 세계의 질서인 코스모스는 언제나 혼돈의 위협 속에 있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존재의 드라마는 끝없는 투쟁 속에 펼쳐지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지속된다. 이들의 신화에 따르면 존재의 핵심에는 바로 이 꾸준한 투쟁이 있다. 손쉬운 탈출구에 대한 약속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와 비슷하게 편안한 방법을 찾으려는 생각을 경계하는 북미 나바호 인디언들 사이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고난이나 슬픔이 없는 인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사회는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정상적인 불행을 인정하지 못한다.”
  영국의 역사가 존 그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비극의 경험을 부정하는 종교와 철학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그의 결론에 동의한다.
  “훌륭한 삶은 진보의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대처 속에 있다.”
  내 경험에 따르면 현실의 위기는 내가 이전에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들에 대한 것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두 질병을 통해 나는 사람은 상황이 닥치면 강해지고 이전까지 끔찍하고 불가능해보이던 것도 쉽게 견뎌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명적일 수도 있었던 위급 상황에서 너무 늦어지기 전에 나 자신을 구제하는 데 필요한 차분함의 경지에 얼마나 재빨리 도달했던지 나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는 생명이 평상시에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강요함으로써 우리
를 단련시키고 더 깊어지게 할 수 있다.
  앞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일 이들 또한 폴란드와 보스니아에 있는 내 친구들이 그 길고도 잔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아 투쟁과 상실의 한 가운데서 발견해낸 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거대한 시도의 시기들은 단지 최악의 시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는 최고의 시기 또한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생명을 가장 소중하고 강력하며 의미있는 형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피크레트는 사라예보 위쪽에 있는 언덕으로 등산을 갔을 때 이 놀라운 역설을 설명하려고 했었다. 우리는 세르비아의 준군사 조직들이 역사상 가장 긴(고문과 다를 바 없는 치명적인 4년이었다) 포위 공격이 진행되던 동안 아래쪽 도로를 지나는 시민들을 추적하던 위치를 찾아나선 참이었다. 피크레트는 그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포위당했던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하는 생존자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피크레트에게 물었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아주 분명했거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면 위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이 불확실한 미래에 삶을 개척해나갈 이들은 특별한 기회 또한 손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인간으로서의 여정을 지속하려는 투쟁 속에 이들은 거대한 의도에 대한 공유된 의식을 통해 확장되고 상상력이 배어 있으며 생존에 필요한 창의성으로 더욱 풍부해진 삶을 살 수 있다.
  지난 500만 년간 부침과 큰 고난 속에서도 가까스로 생존해 아주 불확실한 세상에서 창의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낸 우리 선조들처럼 우리는 꿋꿋하게 이 거대한 불확실성에 맞서 이 어두운 혼란 속에서 길을 찾아내야 한다. 항상 그랬듯이 우리는 보호자도 없이 우리 아이들 이 미래의 도전과 맞서도록 내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현명하고도 겸손하다면, 아이들에게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유구한 가정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불안정을 양산했는지를 이해시킬 것이다. 또한 이윤과 효율성보다는 유연성과 중복성을 중심으로 고안된 복원력 있는 제도들과, 이들이 살아갈 변덕스러운 자연의 성질을 반영하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문화 지도,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세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온 가장 값진 자산인 지식과 용기, 또한 정직한 희망을 심어줌으로써 이 험난한 길을 대비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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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과학과 사회가 한데 엮여 있다는 건 상식이다. 아마 한국 사회에서 이런 지식의 확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황우석일 게다. 어찌 되었든 그 이후 관련 도서들이 꾸준히 나오며 나름의 역할을 하는 중이다. 최근 알라딘 과학 분야에는 아예 과학사회학(STS)가 따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과학의 언어>, <한국의 과학자 사회>, <부정한 동맹>, <셀링 사이언스> 등 이 분야 도서를 꾸준히 출간한 궁리에서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이란 재미난 책을 새로 펴냈다. 과학과 사회과 다투거나 삐지거나 등돌린 열세 가지 주제를 재료 삼아 '두 문화'의 즐거운 만남을 시도한다. 아래 내용은 궁리 출판사에서 출간 직후 저자 강윤재 교수와 나눈 인터뷰다. 자연과학출판인회의와 알라딘이 함께하는 '과학책이 세상을 구한다' 캠페인 8월 이달의 과학책 선정에 더해 아래 내용을 함께 올린다.

이달의 과학책 페이지 :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110803_science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은 과학과 종교, 과학과 전쟁, 과학과 여성 등 사회적 맥락에서 과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좀더 이야기해주세요.

이 책은 과학을 외톨이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사회와 더불어 사는 친구로 이해해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흔히, 과학 하면 사회와는 무관하게 세상에서 고립된 무인지경으로 생각하기 쉽잖아요. 과학자란 홀로 진리를 찾아나선 구도자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되고요. 그런 과학과 과학자의 모습은 ‘과학의 황금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것입니다. 과학의 사회적 쓰임새가 획기적으로 커진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과학에 대한 이해에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과학 그 자체에 몰두하여 과학의 본질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과학과 사회의 관계망을 폭넓게 조망하여 과학의 다양한 모습을 접할 때 우리는 보다 더 과학의 참모습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과학과 관련된 13가지 주제가 실려 있습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쟁점들도 있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도 있습니다. 역사적 쟁점은 주로 과학의 성격을 둘러싼 것이라 할 수 있고, 현실적 논쟁은 과학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들은 과학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수년간 수업을 하면서 가다듬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주제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취하고 있는 관점은 논쟁을 진위(眞僞)의 문제가 아니라 대칭의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쟁에는 승패가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대개의 경우 승자는 왜 이겼는지, 패자는 왜 졌는지를 설명해주는 접근방식을 취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서로의 주장을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가급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모든 논쟁에는 찬반이 있기 마련인데, 사실은 두 입장 모두 나름의 옳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위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고 대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서로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법이 중요한 이유는 과학 논쟁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 짓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고, 과학의 참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과 사회, ‘두 문화’의 갈등 문제는 그 기원이 언제쯤으로 거슬러올라가는지요?

‘두 문화’라는 개념이 학술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1950년대에 소설가이자 물리학자인 영국의 스노우(C. P. Snow)가 케임브리지 리드 강연에서 한 연설에서 유래했습니다. 그의 강연은 현재 <두 문화>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두 문화의 경향이 유독 강한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반과 이과반을 선택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교육과정은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창조력이 요구되고 종합적 사고가 요구되고 있는 이 때, 따라서 특정한 한 분야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융합과 결합이 중시되고 있는 이 때, 문과와 이과를 일찍 선택하는 교과과정은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취지와 정반대로 반쪽짜리 전문가만 양성해내는 셈입니다. 조속한 시정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책이 잘못된 교과과정에 따른 여러분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두 문화’의 갈등이 아니라 과학과 사회의 생산적 만남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같은 장르를 낳고 있습니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활동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르는데, 이 잣대를 과학자에게 적용하는 순간 혼란스러워짐을 느낍니다. 자주 드는 사례가 핵무기 개발 관련한 것인데요, 과학자는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까지 져야 하는 걸까요?

본문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논쟁은 사실 그 답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 여부가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기원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더욱이, 과학이 아니라 핵무기처럼 기술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더욱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은 기술의 개발 자체는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없고, 오직 그 사용자에 의해 사회적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기술의 개발자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기술은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자는 사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술이 다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칼은 비교적 가치중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나 의사가 사용하면 매우 유익하지만 강도가 사용하면 흉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칼을 만든 기술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자폭탄은 경우가 다릅니다. 원자폭탄은 결코 좋게 쓰일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과 건물을 파괴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이런 원자폭탄을 개발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애국과 인류애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가치중립성을 이유로 댈 수는 없습니다. 또한 원자폭탄이 어떻게 사용될지에 대해서는 그 개발에 참여한 과학기술자들도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상태에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철면피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겠지만 양심적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참고로, 독일의 과학자들은 비인도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피해자가 내 가족이거나 이웃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이런 엄청난 책임이 있기에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핵무기 반대를 외쳤던 것입니다.


‘연금술사 뉴턴’ 편에서는 경제학자 케인스가 소더비 경매에서 뉴턴의 미출간 원고들을 사들여 살펴보다가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천재 과학자가 30대에 들어서 연금술과 <성경> 연구에 몰입했다고 해서 조금 어리둥절한데, 그렇다면 과연 뉴턴은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일까요. 아니면 시대의 산물일 뿐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책을 읽어보시면 궁금증이 다소 풀리실 텐데요. 중요한 것은 개인과 시대가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입니다. 뛰어난 개인은 시대를 선도하지만, 시대의 물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요지는, 개인과 시대를 분리해서 어느 것이 먼저냐는 문제는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별 볼일 없는 저도 이 시대에 살면서 어느 짧은 순간에 이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뉴턴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과학이나 과학자에 대해 얼마나 큰 허상을 갖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뉴턴을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천재로만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는 17~18세기 영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흑사병이 창궐하고 기독교가 굳건한 사회를 살면서 사랑하고, 기뻐하고, 실망하고, 슬퍼했을 사람이었을 텐데, 왜 우리는 그의 보통 육체는 보지 않은 채 그의 위대한 정신만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왜 유독 뉴턴에 대한 신화가 많은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은 뉴턴이 현대과학의 아버지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위대할수록 그 아버지 또한 위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뉴턴을 시대를 초월한 위인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뉴턴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뉴턴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회가 뉴턴의 이야기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마치 유신시대에 성웅 이순신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우상화는 그 순수성을 잃고 결국은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를 옥조여오는 것이지요. 절대적 권력이 부패하는 것처럼 절대적 과학도 부패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과학이 아니라 균형을 갖춘 현실적인 과학입니다.


현대로 와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 기후 변화, 우주 개발 등 좀더 다양한 곳에서 과학과 사회의 갈등폭이 커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합리적 판단이 과학에서만 올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합리성을 크게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으로 나눕니다. 이 때 과학적 합리성이란 최적의 선택을 위해서 전문가가 인도하는 과학(지식)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사회적 합리성이란 사회적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현대사회에서 최고의 지식은 역시 전문가에서 오기 때문에 그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고요, 후자는 그래도 인류 최고의 제도는 민주주의이니까 과학기술의 문제에서도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가령, 유전자 변형 식품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전문가들은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안전성의 측면에서 이런 종류의 식품이 기존의 식품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민단체들은 최악의 경우 이런 식품이 인류의 유전자를 변형시켜서 인류에게 치명적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 과학적 합리성은 전문가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허용여부를 선택할 때 최선이라고 보는 반면, 사회적 합리성은 그 피해가 인류 전체에 미치는 만큼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이 의견을 충실하게 반영한 선택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느 입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는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절충적 입장이 현실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들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토론회와 모임에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갈고닦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교수님이 과학자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교수님이 오랜 연구 끝에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첨단무기를 개발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무기는 자칫하면 인류에게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럴 때 애국과 인류애 중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민족주의자이긴 합니다만 인류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군대 있을 때 사격은 잘 했지만 첨단무기는 왠지 느낌이 섬뜩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섬뜩한 느낌은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 3>와 같은 영화를 보시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무인정찰기는 물론 정찰개 로봇과 곤충 로봇 등 수많은 전투로봇이 선보이고 있는데요. 저는 과학자들에게 소리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인류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어!!!”


앞으로 또 어떤 책들을 집필하거나 번역하고 싶으신지요?

앞으로도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책을 쓰거나 번역하고 싶습니다. 물론 과학책도 번역하고 싶고요. 특히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하는데, 위험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위험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정리해줄 필요가 있는데,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그런 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과학과 사회 문제를 다룬 책들 중 독자들에게 더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요?

국내학자가 쓴 책과 번역된 책 합쳐서 꽤 많은데요. 아마도 과학과 사회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출판된 책 위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골렘>과 <닥터 골렘>을 추천합니다. 골렘이란 유대교에서 나오는 인간의 피조물인데, 평소에는 인간 주인의 말을 잘 듣지만 가끔 화가 나면 주인을 해치기도 합니다. 과학이 바로 이런 골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과학의 참모습을 매우 생생하게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천적 과학자의 모습에 대해서는 <과학과 사회운동의 사이에서>와 <시민과학자로 살다>(조금 오래된 책인데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여성 과학자의 모습에 대해서는 <생명의 느낌>, 과학과 사회의 어두운 관계에 대해서는 <부정한 동맹>, 전염병과 현대문명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염병의 세계사> 등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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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가 출판사와 제목을 바꿔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으로 모습을 바꾼 두 번째 책이다. 서문에서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과 <빌린 책 / 산 책 / 버린 책 2>로 세 가지 책의 구분을 쉼표에서 빗금으로 바꿨는데 별다른 설명이 없어 단순한 실수인지 다른 의미를 의도한 건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표지에서는 두 권 모두 빗금으로 표현했기에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겠다. 어떻든 최근 <시사IN>과 '프레시안BOOKS'에 꾸준히 서평을 올리며 의미의 확대재생산에 열심을 다하는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1년 만에 돌아오니 반갑기 그지없다. 게다가 이번 독서일기는 '사회적 독서'의 흐름을 더욱 강조하여 각 장의 제목을 '인권의 역사는 시민권의 역사와 동일하다', '뇌관이 제거된 사회주의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시대가 달라도 인간문제는 늘 보편주의를 찾는다', '지성인이라면 거의 본능적으로 소설을 피한다', '근대는 오는가, 왔는가, 도로 갔는가'로 구성하였다. 책은 금요일에 나왔는데 등록과 판매는 월요일에 시작한다. 반가운 소식을 알리고자 책 뒷표지를 위해 따로 쓴 장정일의 글과 서문을 올린다.(빨리 알리고픈 마음에 직접 타이핑을 했는데, 짧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가 책장이 휘기 시작한 걸 알았다, 불행이다.)

 

-뒷표지 글-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안에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
1994년에 출간한 첫 번째 <독서일기> 서문에, 내 꿈은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 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말이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 없이 읽는다”였습니다. 저 문장 가운데 오늘까지 제게 의미 있는 대목은 “책을 쌓아두고 원 없이 읽는다”란 소원이 아니라,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었다는 것과 “딱딱한 침대”군요. 어릴 때의 제 꿈은, 수도사가 되는 건 아니고, 수도사처럼 사는 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책을 쌓아 놓고 그 속을 파고들게 된 것이나 작가 노릇을 하게 된 것도, 다 수도사처럼 못 산 것에 대한 울분이나 앙갚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수도사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도 분명히 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한 게 아니라 한창 시를 쓸 그때도, ‘나는 딱 한 권’ 혹은 ‘딱 한 번만’ 시인이 되고, 시인으로 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첫 시집은 <햄버거에 대한 명상> 서문에 “유고시집” 운운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므로 한 권의 시집을 낸 직후, 혹은 젊었을 때의 몇 년간만 시인으로 살고나서 곧바로 문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문학판을 떠나지 못한 채 어정거리다보니 문학이 그만 직업이 되어버렸습니다. 떠날 때 못 떠나면 항상 이런 횡액을 당합니다.
  저는, 책을 읽는 일에서 처음으로 쾌락을 느낀 어느 때부터 다른 사람의 글이나 책을 읽는 행위가 마치 제가 그 글이나 책을 쓰는 것인 양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각 속에서는, 제가 읽어주기 전에 그 글이나 책은 아예 존재한 적이 없는 게 되죠. 유아적이고 독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바쳐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에 공감하고자 했습니다. 예의 <독서일기>tjansdp "나 아닌 타자의 동일성에 간섭하고 침잠하는 일“이라고 썼던 게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저는 많은 책들의 의사 저자가 되고 양부가 되었습니다. 저에겐 그게 쾌락이었습니다.
  쾌락이란 어떻게 보면 모순되고,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전체에 몰각됨으로써 얻는 쾌락이 있고, 전체와의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명료하게 느끼는 쾌락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서 느끼는 쾌락이 전자라면, 신비주의에 귀일해서 얻는 쾌락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의 생각에 완전히 녹아들기도 하고, 그 속에서 반성적이 되거나 자각을 얻기도 합니다.
 

-서문-
 

책은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온다
이번에 출간하는 <빌린 책 / 산 책 / 버린 책 2>는 1994년부터 내기 시작한 <독서일기>의 아홉 번째 책이다. 새로 책을 낼 때마다 서문이랍시고 써왔으니, 서문을 쓰는 일 또한 아홉 번째다.
  서문은 그 책의 요약이자 지은이의 집필 목표 내지 동기를 적고, 아울러 자기 작업의 한계와 차후의 계획을 밝히는 글이다, 여러 장르의 책을 내면서 그런 일에 숙달됐다면 숙달됐을 텐데, 이 연작물은 특별히 매 권의 서문을 달리 할 게 없는 책이다. 그런데도 편집자는 항상 깅고 멋있게 써주길 바란다. 그렇게 어렵게 쓴 게 <독서일기>에 쓴 서문들이다.
  세상사는 고진감래던가? 언젠가 모처로부터 독서에 대한 강의를 해 달라는 청을 받고, 16년 동안 쓴 여덟 권의 <독서일기>에 쓴 서문만으로 두 시간 강의를 메운 적이 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그 서문들이 나의 독서관을 잘 요약하고 있으면서, 시간에 따라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내 생애를 지배한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독서론은 ‘독서는 극히 개인적인 쾌락’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흔두 살에 이르러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독서론에 당도하게 됐다. 그 차이를 매개한 것은 개인적이고 문학적으로 겪게 된 적지 않은 변화였고,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회적 영향 탓도 컸다.
  지난번에 나온 <빌린 책, 산책, 버린 책>의 서문은 “무릇 책을 읽는 일은 도가 아니다. 이번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이 그렇듯이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로 난 길이다”라는 말로, 변화된 내 독서론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16년 동안 쓴 여덟 권의 <독서일기>에 쓴 서문만으로 두 시간의 독서론을 펼친 자리에서, 나는 이런 변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자문하며 독자 인민들의 조언을 구했다. 작가의 독서론으로서는 마치 초등학교 학생들의 초보적 윤리와 같은 ‘독서는 현실 돌아오기 위해서다’보다, ‘독서 쾌락론’이 훨씬 낫지 않은가? 장고 끝에 악수도 있고, 죽 쒀서 개준다는 말도 있다. 수십 년이나 책을 읽고 나서, 고작 상식과 계몽에 낙착하고 보편주의에 투신한다? 어디로 더 나갈 데가 없을까?
  이번 서문으로 원래 하고픈 말은, ‘인문학 붐’이나 ‘고전 읽기’ 대신, ‘사회적 독서’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또렷이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라고 쓴 2004년부터, 나는 사회적 독서를 해 온 셈이다. 또 실제로 이번 책은 거기에 부합하는 책과 주제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새로운 독서론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앞서 살짝 비췄던 내 마음 속의 번민과 좀 더 부대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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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1-07-30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출간된줄 알고 열심히 찾아봤네요... ㅎㅎㅎㅎ
출간되기 전의 책을 먼저 읽어볼수 있다니!!! 축복받으셨어욧!!!

인문MD 바갈라딘 2011-08-01 15:21   좋아요 0 | URL
네, 이제 막 등록이 되어서 페이퍼에 표지 넣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낭만인생 2011-08-07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은 알라딘 운영 서재인가요? 아니면 개인인가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8-09 11:58   좋아요 0 | URL
운영은 개인이 합니다만(알라딘에서는 운영에 일체 관심 없음), 그 개인이 알라딘에서 월급 받는 직원으로, 대개 알라딘에 득이 되는 글만 올립니다. 개인이 드러날 여지가 거의 없어도 아쉬움도, 약간의 편안함도 있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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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트위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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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좌파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그 논쟁을 전반적으로 긍정 평가하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건 바로 한국적 특수성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강남좌파론은 이 점을 소홀히 한 채 강남좌파를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limousine liberals)’ 모델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나름의 의미는 있겠다고 인정은 하면서도, 어딘가 좀 공허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인 이유에서일까? 그 점에 대해선 <제1장 강남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인가?: 강남좌파 논쟁은 엘리트 논쟁>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그로 인한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와 ‘소통(疏通)’에 대한 고민의 결여다.

 
   

 

 

 

아, 강준만 선생이 오랜만에 본격 정치비평으로 돌아왔다. 이제서야 정치의 계절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얼마 전 불거진 강남좌파 논란, 사실 강준만은 5년 전 지면을 통해 강남좌파 현상의 명암을 분석한 적이 있다. 5년이 지나서야 벌어진 논란은 어떤 맥락에서, 어떤 문제를 담고 있을까. 하나의 키워드에서 시작한 논의는 강남좌파의 아홉 가지 유형 분석으로 이어지며, 유시민, 손학규, 박근혜, 오세훈, 문재인 등 차기 대권 주자에 대한 인물비평을 함께 담아낸다. 독자로서 두 가지 내용 모두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이다.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라는 일갈로 시작하는 머리말을 공개한다. 책은 내일(7월 21일) 출간 예정이다.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다


강남좌파의 명암(明暗)

강남좌파는 보수 진영이 운동권 출신 486세대(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진보 인사들을 꼬집어 쓰던 용어다. 정치적, 이념적으론 좌파지만 행동은 '강남 주민스럽다'는, 일견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2006년 5월 <인물과 사상>에서 강남좌파를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 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정의하면서 "보수언론이 노무현 정권을 공격하려는 혐의로 읽히지만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강남좌파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자 강남좌파를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낸 첫 시도였다. 양홍주, <'노회찬 첼로 연주 사진' 강남좌파 전파에 일조: 강남좌파 형성 과정과 중심 인물들>, [한국일보], 2011년 2월 26일.

2011년 2월 [한국일보]가 게재한 <강남 좌파, 누구냐 넌!>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 중 일부다. 위 기사에 지적된 바와 같이, 나는 [인물과 사상] 2006년 5월호에 쓴 <강남 좌파: ‘엘리트 순환’의 수호신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강남좌파 현상에 주목하면서 그 명암(明暗)을 3가지씩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선 긍정론이다.
  첫째,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건 하층계급에 큰 힘이 된다. 상류층 사람이 점하고 있는 위치의 파워 덕분이다.
  둘째, 갈등의 양극화를 막는 데에 도움이 된다. 모든 상층계급은 보수, 모든 하층계급은 진보라면 갈등이 살벌해지겠지만, 상층에도 진보가 있고 하층에도 보수가 있다는 건 양쪽의 충돌 예방에 도움이 된다.
  셋째,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하층계급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맙다. 그걸 위선으로 보겠다면, 이 세상에 위선 아닌 게 뭐가 있겠는가.
  다음은 부정론이다.
  첫째, 권력․금력까지 누리면서 양심과 정의의 수호자로 평가받는 이른바 ‘상징자본’까지 갖겠다는 건 지나치다. 빈털터리라도 세상을 향해 큰소리 치면서 사는 맛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그런 ‘도덕적 우월감’까지 상류층이 누린다는 건 부당하다.
  둘째, 진보를 보다 많은 권력․금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하층계급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에 진정성이 결여돼 있으며, 상징적인 제스추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셋째,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말로만 강경한 속성이 있어 실천보다는 당위의 역설로 그칠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해낼 수 있는 실천마저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자, 사정이 이와 같은데 무조건 ‘강남 좌파’를 탓할 수만 있겠는가? 각 인물별, 사안별로 구체적인 평가를 내리는 게 공정한 대응일 것 같다. 이론상으론 그렇다. 문제는 한국사회․한국인의 특수성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정치혐오’를 넘어서 ‘정치저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치를 비롯한 공적 영역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높다. 이런 상황에선 ‘강남 좌파’의 이론적 정당성이 인정받기 어렵다. 그건 마치 ‘국민정서’니 ‘위화감’이니 하는 단어들이 누구를 평가할 때에 이론적으론 부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현실에선 정당하게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2005년 11월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가 여론조사기관 TNS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반인 응답자의 82.1%가 사회 지도층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걸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배부른 진보’가 일부러 배가 고픈 척 할 필요까진 없지만, 자신의 포만감을 과시하는 건 금물이다. 그리고 공적 영역을 향해서만 진보를 외쳐댈 게 아니라 자신의 사적 영역과 행태도 진보적 가치의 지배를 받게 해야 한다. 사회를 향해선 기부문화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외치면서 자기 봉급은 고스란히 저축하는 고위 공직자들을 그 누구도 알뜰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공적 영역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해소되는 날까진 과도기적 처방 차원에서라도 ‘강남 좌파’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강남좌파는 엘리트에 관한 문제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을 쓴 시점으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강남좌파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그 논쟁을 전반적으로 긍정 평가하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건 바로 한국적 특수성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강남좌파론은 이 점을 소홀히 한 채 강남좌파를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limousine liberals)’ 모델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나름의 의미는 있겠다고 인정은 하면서도, 어딘가 좀 공허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인 이유에서일까? 그 점에 대해선 <제1장 강남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인가?: 강남좌파 논쟁은 엘리트 논쟁>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그로 인한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와 ‘소통(疏通)’에 대한 고민의 결여다.
  5년전 내가 던진 “강남 좌파: ‘엘리트 순환’의 수호신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강남좌파는 좌우(左右)를 막론한 한국 엘리트의 본질과 맞닿은 문제라는 것이다. 강남좌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엘리트의 위선’이다. 강남좌파는 이념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엘리트에 관한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만 강남좌파의 관한 논의가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생각해보자. 좌우(左右)를 막론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선 학력·학벌에서부터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므로,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좌파는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조건 강남좌파 자체를 비판하는 건 좌파를 싸잡아 비판하겠다는 우파의 정치적 책략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아니 우파라도 서민을 상대로 포퓰리즘(populism: 민중주의) 자세를 취하는 게 ‘정치의 문법’인 바, 우파 정치인에게도 강남좌파 요소가 농후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농후하다뿐인가. 우파는 강남좌파를 ‘위선의 화신’인 양 비난하면서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말로는 늘 국가와 민족이 잘 되게 하겠다는 이타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강남좌파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다”는 전제하에 우리 모두의 삶에 보탬이 될 진지하고 성실한 논의와 연구를 해보자. 강남좌파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사람이나 세력이 있을 것이다. 그 장단점은 무엇인지 그 점이 갖는 사회적 함의는 무엇인지, 그런 걸 차분하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차분하게 생각해보는 걸 막는 또 하나의 장벽이 존재한다. 그건 바로 정치를 과도하게 ‘의인화(personification)·개인화(personalization)'하는 ‘인물 중심주의’다. 본문에서 자세히 논하겠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한국정치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쉽게 설명해보자.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주요 의제를 10가지만 뽑아보자. 예컨대, ①빈곤층 복지 강화, ②부유층 세율 인상, ③부동산 투기 근절, ④지역균형발전 추진, ⑤공정거래법 강화, ⑥병역 비리 척결, ⑦국가보안법 폐지, ⑧학벌주의 완화, ⑨전관예우 강력 억제, ⑩방송의 독립 등 10가지 의제에 대해 단순하게 찬반 표시를 해보자.
  이 10가지 의제에 대해 모두 찬성한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은 정치적으로 같은 편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상호 우호적인 게 옳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예컨대, 노무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서로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아니 될 수도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지금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좌우(左右)로 편을 갈라 싸우는 사람들은 위 10대 의제에 대해서도 ‘10대 0’으로 갈라질까? 그렇지 않다. 생각을 같이 하는 점도 있다. 생각을 달리 하는 것보다는 같이 하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도 싸울 땐 원수처럼 싸운다.
  왜 그럴까? 정치, 특히 대선은 권력을 놓고 다투는 승자 독식게임이고, 그 승자는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제나 이슈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래서 위 10가지 의제에 대해 100% 생각이 같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원수처럼 싸워야만 한다. 그게 바로 우리 시대의 정치를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바로 ‘인물 중심주의’다.


‘인물 중심주의’ 이분법의 재앙
우리 인간이 원래 이분법적인 동물이라는 점도 작용하는 걸까? 우리는 이론적으론 매사를 둘로 나눠서 보는 이분법이 무모하다는 걸 쉽게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늘 그런 이분법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선악(善惡)·흑백(黑白) 구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인터넷 토론 문화를 보라. 중간은 없다. 내가 옳다고 믿더라도 나의 정당성이 7이면 저쪽에도 3의 정당성은 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주장을 펴면 어느 정도의 소통이 가능하겠건만, 인터넷을 지배하는 건 늘 ‘10 대 0’의 게임이다. 나는 10이요 너는 0이라는 식의 ‘배설(排泄)’ 뿐이다. 배설이 소통을 대신하는 불통(不通)의 공간에선 같은 편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카타르시스’ 제공에 능한 사람들이 대표 논객으로 활약하기 마련이다.
  극단적인 이분법 악플에 능한 네티즌은 악한 사람일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적(敵)에게 가혹한 사람일수록 친구에겐 잘하는 법이다. 적에 관대한 사람은 친구에게도 헌신하지 않는 법이다. 이는 정치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정치성의 정의>라는 책에서 정치성을 ‘친구와 적’을 구분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이클 딥딘(Michael Dibdin, 1947~2007)의 소설 <죽은 늪(Dead Lagoon)>에서 베네치아의 민족주의 선동가는 “진정한 적이 없다면 진정한 친구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아닌 것을 증오하지 않는다면 우리 것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적에게 증오의 언어를 잘 퍼붓는 사람이 열정적이다 못해 광신적인 지지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만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인물 중심주의가 매우 심한 편인 건 분명하다. 예컨대, 2007년 2월 한국일보와 미디어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전 서울시장 이명박이나 전 대표 박근혜가 탈당해 신당을 만들어 독자 출마하더라도 지지자의 약 70%가 “계속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2007년 5월 조선일보 조사에선 이명박 지지자의 61.6%, 박근혜 지지자의 64.2%가 ‘계속 지지’를 밝혔다. 또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가 2007년 4월 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한나라당 지지자 가운데 71.2%가 당이 아닌 후보를 보고 투표하겠다고 응답했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한국은 ‘정당 민주주의’ 국가라기보다는 ‘지도자 민주주의’ 국가라는 걸 의미한다. 교과서적 원리와는 달리 한국의 정당 정치는 사실상의 인질 정치다. 정당 중심의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도 엄밀하게 말하면 정당을 지지한다기보다는 불공정과 편파를 자행할 힘이 있는 집단에 표를 주는 것이다. 즉, 정부 인사․예산권의 지배력이나 접근권에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힘 있는 몇몇 정치인만 움직이면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정당이다.
  2007년 5월 이기호는 “그저 감정으로 뭉친, 친목계나 진배없는 정당들. 문제는 그 정당들로 인해 전국민이 친목계화 되어간다는 점이다”고 주장했다. 한심한 정당들에 대한 분노엔 십분 공감하지만, 과연 정당의 친목계화가 전국민의 친목계화를 부른 걸까? 혹 그 반대는 아니었을까? 한나라당이 대선후보 경선 규칙 문제 때문에 한동안 분당 위기로 치달았던 것도 바로 인물 중심의 줄서기 때문이었으며, 이는 한국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관행이요 문화다.
  왜 그럴까? 오랜 세월 동안 정당은 포장마차나 천막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체험한 학습효과도 적잖이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한국인 특유의 ‘인물 중심주의’ 문화가 더 큰 원인이 아닌가 싶다. 유력 정치인을 지지하는 각종 ‘사모(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클럽들의 과도한 전투성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터져 나올 법도 하건만,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이 ‘사모’ 클럽의 규모와 전투성을 해당 정치인의 대중성 수준으로 긍정 평가하는 이상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인물 중심주의’ 문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인물 중심주의 문화의 토양에선 이성적인 정치적 논의와 토론은 물론이고 소통 자체가 매우 어려워진다. 아니 거의 불가능해진다. 매사를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에 대한 유·불리의 관점에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재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시도할 강남좌파론도 그런 장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노릇을 어찌 할 것인가? 답이 없다. 그런데 실은 그게 바로 이 책의 한 주제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는 ‘민주화 이전의 엘리트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그런 인물 중심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본문에서 해보도록 하자.


‘편향성이 이익이 되는 장사’
정치에서 이분법적 대결구도는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니 당사자들이 그렇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 책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와 각 진영의 열성 지지자들은 대선의 향방에 따라 이 나라가 흥하거나 망할 것처럼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혈투를 벌일 임전태세(臨戰態勢)를 다지고 있다. 이 책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며, 누가 되건 ‘정치의 이권화’·‘엘리트의 지대(地代) 추구(rent-seeking)’·‘승자독식주의’를 없애거나 완화시키지 않는 한 대선은 ‘밥그릇 싸움 도박판’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대선과 정치가 ‘밥그릇 싸움 도박판’이 될 때 국민이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두 진영사이의 이해득실을 따진다면 패자(敗者)는 보수라기보다는 진보 진영이다. 진보적 가치의 역설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말이다. 진보진영은 정치행태에 있어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도 되는 건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 이전엔 옳고 바람직한 일이었더라도 그 이후엔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월과 시대가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변치 않는 항상심으로 초지일관하는 게 미덕인가?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비롯하여 역대 서너 정권들을 거치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표방한 이념과 노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기 생각이 다른 정치세력과 유권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과 화합을 이뤄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 이게 어디 한국만의 사정인가. 미국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당파싸움 망국론’ 논쟁의 핵심도 바로 그게 아닌가. 이 책이 강남좌파론을 소통과 연결시켜 논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소통에 대한 열망으로 씌어졌다. 소통은 인기가 없는 주제다. 언론시장에서건 출판시장에서건 속된 말로 “편향성(당파성)이 이익이 되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도 다를 게 없다.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편향성(당파성)’을 보여주는 정치인에게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많은 법이다. 그러니 시장논리상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어렵게 돼 있다. 좌우(左右)를 막론하고 지금 ‘편향성(당파성)’으로 주목을 받고있는 이들이 그게 자기가 잘 났거나 똑똑해서 얻은 성공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좋겠다. 그 성공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엄청난 대의(大義)와 명분을 동원하는,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기만도 더 이상 저지르지 않으면 좋겠다. 이들이 자제해야 소통도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이하랴. 때론 세월이 약인 것을.
  사실 진정한 소통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소통을 근거로 합리적․생산적 경쟁체제를 꿈꾸는 사람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만 명은 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국민 대다수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파편화돼 있으며, 조직화되기 어렵다. 동기부여에 있어서 그런 염원은 비교적 소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열정이 없다. 무엇보다도 소통을 위한 참여에 대한 반대급부로 줄 게 없다. 공직을 줄 수도 없고, 다른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도 없고, 통쾌하고 후련한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한다. 특정 이념․노선․당파성을 내세워 지지자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탁월한 논객들은 많지만, 이 방면의 논객이 거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에서 아무런 사적 이익을 취하지 않으면서 소통을 열망하는 소통파를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 이게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우선 공감대부터 넓혀 나가는 일이 필요하겠다. 이 책을 내게 된 이유다.  

                                                                                                                                      - 2011년 7월, 강준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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