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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접근하든 투퀴디데스야말로 서양에서는 가장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역사가라는 평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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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라틴 고전을 꾸준히 번역해온 천병희 선생님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드디어 나옵니다. 그리스뿐 아니라 서양 문명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 서양 고대사 최대의 사건이자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더불어 역사 서술의 기원으로 불리는 작품이지요. 많은 분들이 꾸준히 찾는 텍스트인데 그간 중역본과 축약본만 소개되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어 원전 번역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게 된 지금, 조금 기뻐하고 많이 뿌듯해 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오늘은 천병희 선생님의 서문 가운데 도움이 될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다음에는 이 책에 실린 40여 편의 연설문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멜로스인들과의 대담'을 전해드리겠습니다.
6월 30일 출간 예정이며 알라딘에서 단독 예약판매를 합니다. 해당 기간에 구매하신 분 가운데 10분을 추첨하여 5분께 <역사>를, 5분께 <일리아스+오뒷세이아 세트>를 드립니다. 여러모로 도움 주신 숲 출판사와 흔쾌히 본문 공개를 허락해주신 천병희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예약판매 이벤트 페이지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10615_sup
[서문_아주 특별한 비극,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주도 세력은 아테나이(Athenai)와 스파르테(Sparte)였다. 그들은 호시탐탐 그리스를 노리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들이었다. 이 놀라운 승리 이후 진취적인 아테나이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강력한 해군력에 힘입어 에게 해에 제국을 건설했고, 보수적인 스파르테는 과두정체를 신봉하며 강력한 중무장보병에 힘입어 그리스 본토 남부의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반도를 지배했다.
황금기의 아테나이는 정치·문화·예술 분야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유산들을 쏟아내는 한편 지속적인 팽창정책으로 제국을 넓혀나갔다. 아테나이의 독주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테는 일부 동맹국의 사주를 받아 기원전 431~404년 아테나이와의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27년 동안 지속된, 그리스 세계의 문명과 흐름을 뒤바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기원전 421년 양국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잠시 전쟁이 중단되지만, 아테나이가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로 국력이 약해진 데다 서아시아의 패자(覇者) 페르시아(Persia)와도 사이가 나빠지자, 전쟁을 재개한 스파르테가 페르시아의 지원 속에 아테나이에게 항복을 받아낸다. 유례 없이 잔혹했던 전쟁에서 패배하며 아테나이는 황혼기에 접어든다.
당시 그리스의 산문문학은 역사가 짧아서 기원전 5세기 후반부 이전에 씌어진 것은 지금까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하는 산문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부에 작품 활동을 하던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 초에 일어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 초점을 맞춰 방대한 저술을 쓰며, 약간의 초기 역사와 여러 부족과 국가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헤로도토스가 소아시아 할리카르낫소스(Halikarnassos) 시 출신인 데 견주어 기원전 460년경 아테나이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기원전 400년경 세상을 떠난 투퀴디데스는 적어도 한 번 이상 장군(strategos)으로 선출되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나이군을 지휘했으며,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서 이 전쟁의 역사를 기술(記述)했다. 모두 8권으로 구성된 그의 저술 1권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그리스 역사와 환경에 관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고, 전쟁에 관한 본격적인 기술은 2권에서 시작된다. 현존하는 저술은 기원전 411년 가을에서 중단되지만 전쟁의 결말은 몇 군데에서 언급되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저술이 넓다면 투퀴디데스의 저술은 깊은 편이며, 헤로도토스가 신의 섭리를 믿는다면 투퀴디데스는 모든 것을 인간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설명한다. 헤로도토스는 일화를 소개할 때 흔히 이설(異說)도 함께 소개하지만 투퀴디데스는 거의 언제나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만 소개하며 그것을 믿어주기를 바란다. 투퀴디데스는 자신의 역사 기술 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각의 인물이 전쟁 직전이나 전쟁 중에 발언한 연설에 관해 말하자면, 직접 들었든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든 나로서는 정확히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실제 발언의 전체적인 의미를 되도록 훼손하지 않으면서 연설자로 하여금 그때그때 상황이 요구했음 직한 발언을 하게 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우연히 주워들은 대로 또는 내 의견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든 남에게 들은 것이든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내가 기술한 역사에는 설화가 없어서 듣기에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책은 대중의 취미에 영합하여 일회용 들을 거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영구 장서용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출판이 되자마자 고전이 되었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그가 중단한 곳에서 그리스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 특별한 비극 속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았다. 그의 영향을 받지 않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함축적인 문체와 날카로운 분석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가장 심오한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았고, 19세기 독일에서는 랑케(L. von Ranke) 등에 의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의 이상(理想)으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전반까지 이어졌지만, 그 뒤에는 그러한 주장에 회의를 품으며 그의 문체와 언어 분석에 치중하는 경향이 차츰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하려는 그의 열의와,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그의 노력과, 평이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기술과, 인간 본성을 파고드는 연설을 적절히 한데 엮는 능력은 여전히 경탄의 대상이다.(중략)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미완으로 끝났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 있었지만 전해오는 텍스트는 기원전 411년 가을에서 갑자기 중단된다. 크세노폰(Xenophon)의 <그리스 역사>(Hellenika) 등 이후의 역사서들이 기원전 411년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미루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투퀴디데스가 발표한 것의 전부라고 확신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기술하기 시작해 전쟁이 끝나고도 살아 있었으니, 우리는 이런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투퀴디데스는 사건을 1년 또는 반년 단위로 사건 직후 바로 기록해 그 부분을 종결한 것일까, 아니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메모만 해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했을까? 아니면 그 두 가지 방법을 다 쓴 것일까?
이를테면 2권 65장의 페리클레스에 대한 평가에서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 등 페리클레스 사후 사건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사건을 1년 또는 반년 단위로 사건 직후 바로 기록해 그 부분을 종결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대부분(1권 1장~4권 51장, 5권 84장~8권 1장)은 연설과 여담을 곁들인 정교한 사건 기술로 짜여 있다. 그러나 두 부분(4권 52장~5권 83장, 8권 2~109장)에는 연설이 거의 나오지 않고 사건이 무미건조한 삽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어, 이는 투퀴디데스가 죽기 전에 마지막 손질을 하지 못한 예비 작업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6권 1장~8권 1장은 시칠리아 섬의 지리와 역사를 포함해 2년 동안 계속된 아테나이의 시칠리아 원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별도의 전공 논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에도 그의 기술에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듯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띈다. 이런 괴리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독일의 역사가 울리히(F. W. Ullrich)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기원전 421년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사이에 니키아스(Nikias)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투퀴디데스는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해 스팍테리아(Sphakteria) 섬의 함락을 포함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1권~4권 51장을 완성했으나, 시칠리아 대참사 후 계획을 수정하여 시칠리아 원정과 그 이전의 멜로스(Melos) 섬 사건에 관해 별도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또한 기원전 404년 아테나이가 최종적으로 패하자 그는 두 번째 서문(5권 26장)을 쓰고 전체를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전에 쓴 것을 조금씩 수정하기 시작했으나 죽기 전에 수정 작업을 끝마치지 못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어떤 편집자가 이것들을 한데 묶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상태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론’에 대해 그렇다면 투퀴디데스는 역사 기술과 정치철학과 관련해 아무 원칙도 신념도 없는 역사가가 되고 말 것이라며, 그가 이용한 여러 가지 방법은 그때그때 가장 적합한 것이라는 ‘통합론’이 요즘은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접근하든 투퀴디데스야말로 서양에서는 가장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역사가라는 평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