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번과 마녀>보다 이 책 <혁명의 영점>을 더 즐겁게 읽고 있다. <캘리번과 마녀>를 통해 페데리치 님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의 어법과 논지에 좀 익숙해졌고, 이 책이 현재를 기준으로 더 가까운 과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례 1.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는 여성 직장 동료들에게서 아이 돌봄과 가사 도움에 지불하는 비용이 급여와 거의 비슷하다는 한탄을 들을 때가 있다. 밖에 나와서 번 돈을 그냥 고스란히 가져다 바치는 격이라고. 경제적인 부분만 생각하면 그냥 집에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사례 2. 직장 생활이 힘들어서 하소연하면 어른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그만두고 결혼해서 애나 키우면서 편하게 살아.”


이 책은 말한다.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와 자본에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요구해야 한다고. 임금지불을 요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적인 영역에서의 투쟁을 공론화하며, 가사노동이 여성에 특화된 활동이라는 터무니없는 환상을 깨고, 종국에는 이러한 부불재생산노동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65) 깁고 있던 양말에서, 조리하던 음식에서 고개를 들고 우리 노동일의 총체성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이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임금으로 귀결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귀중한 상품인 노동력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은 단순한 집 청소가 아니다. 가사노동은 임금노동자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여 매일 같이 일터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사노동은 아이들(미래의 노동자들)을 돌보는 것을, 즉 태어날 때부터 학교 다닐 때까지 시중을 들고, 이들 역시 자본주의하에서 기대되는 방식대로 일을 해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모든 공장 뒤에, 모든 학교 뒤에, 모든 사무실이나 광산 뒤에는 공장, 학교, 사무실, 광산에서 노동하는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노동을 소진한 수백만 명 여성들의 숨은 노동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성은 이미 노동시장에 속해 있으며, 여성의 재생산노동이 노동시장과 자본주의의 근간이다. 따라서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부불재생산노동에 더해 임금노동이라는 부업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은커녕 더욱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격이다. 만약 내가 비혼 무자녀 여성이 아니었다면 일을 그만뒀을까?


이쯤에서 사례 2로 돌아가보자. 그런 상황에서 내 답은 언제나, “나는 어차피 일할 거야, 결혼을 하든 말든 어차피 돈 벌 거라고”이다(‘결혼해서 애나 키우면서’ 사는 게 얼마나 ‘편하지 않은 일’인지의 문제는 일단 제쳐 두자). 내가 버는 돈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경제권에 속해 있어서 타의로 소비를 저지당하는 건 유년기로 충분하다. 경제적 독립 없이 독립을 말할 수 있을까? 돈을 받아서 생활하면서 그 상대와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사례 1에 해당하는 인물 중 프리랜서로 통번역을 하는 선배가 있다. 번역을 하는 날은 아이가 찾아도 웬만해선 방 밖으로 나가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지금 집에 없다, 밖이다’ 생각하고 정해진 시간 이상은 반드시 확보해서 일을 한다면서, 차라리 통역 때문에 아예 나가는 날이 더 낫다고 덧붙인다. 그렇게 번역해서 번 돈이 내가 거기 앉아서 번역하는 동안 이모님이 일해주신 만큼도 충당 안됐을 거야. 그래도 알지? 절대 못 그만둬.


물론 여자들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데는 경제적인 부분 외에 수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불노동의 세계로 편입되어 소비되어야 할 돈을 아끼는 것과 비록 그렇게 소비되는 돈과 동일한 금액이라 할지라도 직접 임금노동시장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89) 사실 여성들은 "똑같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시장의 일자리와 (가사노동)을 맞바꾸고 싶어 했는데, (왜냐하면) 시장의 일자리는 월급을 준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남의 아이와 남의 살림을 돌보는 일엔 임금이 지급된다. 내 아이와 내 살림을 돌보는 일엔 왜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가? 그럼 우린 서로의 아이 돌보미와 가사 도우미가 되어야 하는가? 이 책을 보면 미국에서 "정부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돌보는 여성들에게만 돈을 지급하려 한다면 "아이를 서로 맞바꿔야"한다(89)"는 논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복지제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부추기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복지수당과 생활보호대상으로 다루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부양가족에 대한 세금공제를 임금지불의 일환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 임금지불의 제도적 형태에 대한 고민은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통번역이 여자가 하기 좋은 일이라고,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아이 키우면서 하기 참 좋은 일이라고 누군가 말할 때 그냥 그 말을 싹 갖다 버리고 싶다. 번역가가 자유롭게 여행 다니면서 어디 전망 좋은 카페 같은 데 자리잡고 일할 수 있을 것이란 상상만큼 허황한 얘기다. 소위 교사나 약사를 일컬어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라고 하는데(가사노동과 병행하기 좋다는 면에서?), 맙소사, 세상에 그런 직업은 없다.) 


그러나 선배도 아이에게만큼은 늘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우리가 관계 속에 살 수밖에 없고 가사노동이 그러한 관계에 지나치게 밀접하게 얽혀 있단 생각은 든다. 그러니 딱 잘라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노동이고 어디서부터가 (생리적, 안전, 애정/소속, 존중,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다(특히, 출산과 양육, 섹슈얼리티에서).


(47) 즉, 고립된 조건, 다른 사람들의 삶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 우리의 노동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우리의 노동이 어디서 끝나고 우리의 욕망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확인할 수 없는 문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명절 음식 준비. 이건 헷갈릴 여지없는 엄청난 노동이지만, 한번 이걸로 예를 드는 무모한 시도를 해보자. 명절에 음식을 준비할 때 동생은 주로 누워 있다. “음식 하지 마. 우리도 그냥 사 먹자.” 말로만 거든다. 문제는 우리집이 큰집이라 이걸 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33년 만에 동생이 명절에 전을 부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올케가 일손을 거드는 걸 보더니 마음이 쓰였는지 본인이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내의 고생이 동생의 역치를 건드린 것이다(에잇,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이걸 보면서 엄마와 나는 우리가 얘를 잘키운 건지 못키운 건지 좀 아리송해졌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그동안 안 했다고? 만약 이게 명절 음식 준비 같은 게 아니라 좀 미묘한 다른 문제였다면? 그러면 마음이 불편해서 차라리 몸을 움직인 결정은 노동일까? 마음이 편하고 싶은 이기심일까? 아끼는 사람에 대한 배려일까? 학습된 의무감의 발로로 인한 부채의식의 탕감일까?


한쪽 끝은 '노동' 반대쪽 끝은 '노동이 아닌 것'을 기준으로 하는 하나의 축에 가사노동의 세부항목을 줄세웠을 때 명절 음식 준비는 '노동' 쪽에 아주 가까울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것을 예로 들었을 때의 이득은 하물며 이다지도 노동이 분명한 일의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노동인 부분과 노동이 아닌 부분을 선명하게 가르기 어렵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활동이 노동인지 노동이 아닌지 구분하기도 어렵지만 그 활동의 내부에도 노동과 노동이 아닌 면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명절 노동에 가격표를 붙인다면 명절 풍경은 어떻게 바뀔까? 제사는 못 지낼 것이다. 너무 비싸니까. 모임은 간소해지고, 외식이나 여행은 더 늘어날 것이다. 그 돈이 그 돈이니까.


(77) 사실 우리의 노동과 가족, 남성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를 가장 강력하게 제도화한 것은 바로 가사노동에 대한 보상은 언제나 임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임금노동자가 된다면 임금은 생산성 거래를 통해 받게 되는 대가가 아니다. 우리는 임금에 대한 보답으로 전만큼 혹은 전보다 더 많이 일하지는 않고 오히려 더 적게 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금이 [가사노동에 들어가는]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해결해줄 수 있기를, 경제적 독립의 필요성 때문에 부업에 구속되지 않고 투쟁을 일구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3-02-25 14:2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업주부고 돈 안 받고 아이 둘을 키운 사람이라서, 페데리치의 글들이 시원하고 고마우면서도 가슴을 후벼파는 지점이 여럿 있었습니다. 책먼지님의 이야기로 들으니 다시 읽어봐야겠다 생각이 드네요.
가사노동 임금과 관련해서는, 예전에... 10년 전쯤이었을 거에요. 아이를 집에서 돌보면 아무 혜택(?)이 없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면 해당 비용을 국가가 전부 보조해 주는 정책이 있어서, 엄마들이 아이들을 반강제적으로 어린이집에 맡겼던 일이 있었어요. 그 돈 엄마들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거든요. 최근에는 할머니/할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면 (자기 손자죠) 30만원 정도 준다고 하더라구요. 극강의 출산율이 큰 일 했다 싶었습니다.
좋은 글과 사유를 잘 읽고 갑니다. 편안한 주말 되시길요^^

책먼지 2023-02-25 15:41   좋아요 5 | URL
단발님 이 많은 모순과 부당함을 다 어떻게 끌어안고 사시는지요ㅠㅠ 이 책 읽으면서 정말.. 생각이 너무 많아지더라고요.. 어린이집에 아이 맡기면 보조금 주는 제도는 본래 의도했던 효과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단발님 말씀대로 모든 엄마들에게 소정의 금액을 직접 지원해주었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아요ㅠㅠ 저도 그 이야기 들었어요!! 친정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이 아이 봐주시는 거에 용돈조로 드리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정해진 시세가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그것까지 포함해서 월급이나 아이 봐주시는 분들에게 나가는 비용이나 똔똔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동생부부가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를 누가 봐주게 될까.. 우리 부모님, 그중에서도 우리 엄마가 될 확률이 높은데.. 30만원 받고 엄마가 고생하느니 그돈 안받고 안했으면 좋겠거든요.. 에휴.. 어쨌든 어떤 금액과 시세가 형성된다는 면에서 비록 가족이라 하더라도 양육이 임금노동이란 인식이 퍼지고 있다는 건 긍정적으로 봐야할까요? 이번에 집계된 출산율이 또 최저치 경신했더라고요?? 0.78인가 그랬던 것 같아요!! 단발님의 이야기와 사유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발님도 편안한 주말 되세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스스로를 낮추고 자기 자신을 우습게 만드는 사람을 결코 싫어하지 않는다(그게 도가 지나쳐 보는 사람까지 민망하게 만들 지라도). 그런데 이번 책은 본인의 지적 능력을 능멸하는 것인지 독자의 수준을 능멸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다. 꼭 진지해지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좋은 부분도 희안한 드립으로 날려버리고, 본디 복잡하고 어려워야 마땅한 것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독자는 감당할 수 있는 인생의 허무를 저자 본인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157) 지나친 여가는 인간을 공허하고, 무료하고, 빈둥거리고 낭비하게끔 만든다.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공부하는 삶이 괴로운가? 공부를 안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공부를 하는 게 구원이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게 괴로운가? 사람을 안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2-23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분…. 아재개그하시면서 굉장히 쿨한 줄 아는 거 아직도..??;; ㅎㅎㅎ

책먼지 2023-02-22 23:59   좋아요 2 | URL
와 읽으면서 진짜 미치는줄.. 1장, 2장까지는 그나마 멀쩡해서 오, 이번엔 꽤나 교수님 같은데? 했는데.. 3장부터 고삐풀렸음요.. 그래도 전작들보다 덜해요!!
 

포르투갈어를 했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포르투갈어가, 그 언어의 울림이, 그 말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교환학생으로 포르투갈에 갔고, 포르투갈식 포르투갈어를 배워왔다. 한국에서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으며, 그들 대부분은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는 그 한줌의 사람들마저 내 발음을 신기해하는 걸 보며, 이게 망한 일인 걸 알았다. 언어는 범용성이 생명인데 희귀 언어 사용자 내부에서도 희귀종 취급받다니. 망했다. 이듬해 영미권으로 연수를 갈 땐 브론테 세 자매, 제인 오스틴, 셜록 홈즈, 해리포터에도 불구하고 런던이 아니라 뉴욕을 택했다. 이번엔 다수 중의 다수가 돼야지. 공급도 많지만 그만큼 수요도 많아야 비범과 거리가 먼 나에게까지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다.


처음 통번역 시장에 나왔을 때는 언어 방향도, 분야도 가리지 않았다. 그중엔 출판 번역도 있었다. 지금은 망한 출판 번역 에이전시를 통해 책을 세 권 번역했다. 두 권은 이름을 도둑 맞았으나 한 권엔 내 이름이 실렸다. 그러나 세 권 모두 정산을 받지 못했다. 이후 다른 출판 번역 에이전시에서 출판 번역 교육과정을 수강했다. 해당업체에 번역가로 등록하려면 필요한 절차였다. 이곳에서는 소위 말하는 '리뷰' 일외에는 받지 못했다. 이 '리뷰'라는 것은 출판사에서 해당 외국도서를 번역해서 내도 좋을지 검토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에이전시에 의뢰된다. '리뷰어'는 일주일 내지 열흘 내에 2~300쪽 분량의 원서를 읽고, 각 장을 요약하고, 샘플번역을 첨부해서, 이 책에 시장성이 있을지 분석한 검토서를 제출한다(여기엔 SWAT 분석, 기존에 출판된 도서 중 해당 서적과 비슷한 책이 있는지 비교하는 항목 등도 포함된다). 이 작업을 하고 받는 돈은 세금 포함 10~15만원이다. 번역해서 출간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출판사 측에서 판단할 경우 해당 리뷰어에게 번역을 의뢰하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실제 그 책을 맡을 번역자는 별도로 정해진다. 상상 이상으로 품이 많이 들지만 가성비는 꽝인 이 작업을 나는 무척 싫어한다. 리뷰를 맡은 책의 출판이 결정되어야 번역 기회라도 노려볼 수 있을 텐데 어째 의뢰가 오는 책마다 별로다. 출판되면 안 될 것 같다. 그런 책으로 약 2주를 날려버린 데 분노하며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면 안 될 책이라고 검토서에 적는다. 파국이다. 이처럼 출판 번역과 관련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의 나는 활동 반경이 매우 좁아져서, 통역을 버리고 번역을, 영한을 버리고 한영을, 다른 분야를 버리고 특허 번역과 법률 번역을 주로 한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발을 담가보았고 인접 직역에 있어 그 고충을 감히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기에 출판 번역가를 더욱 존경한다.


(133) 보수와 직업이 불안정한 탓에 배를 곯아 가며 "좋아하는 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한다면 대다수 사람에게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행일 것이다.



이 책을 쓴 김택규 번역가님은 번역이라는 업의 낭만과 감상보다는 현실을 전한다. 지면에 단단히 발을 디딘 채 결코 아름답거나 녹록지 않은 그 현실을 직면하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업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져서, 매너리즘에 빠진 어느 번역업자의 양심이 몹시 아리다. 번역 작업 방식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 공감하며 읽었다(지나치게 완벽한 사람보다는 꼼꼼하되 어딘지 살짝 허술한 사람이 번역을 잘한다는 평소의 가설도 확인되었다).


(95) 번역가마다 퇴고하는 방식이 다르다. 누구는 빠르게 번역을 마친 후 한두 주씩 오래 퇴고를 하고, 누구는 꼼꼼히 점검해 가며 느리게 번역을 마친 후 하루 이틀 만에 퇴고를 끝낸다. 나는 후자다. 퇴고는 빠르면 한나절, 느려도 하루면 된다.


나 역시 확고히 후자다. 그리고 이 부분.


(127) 출발어에서는 문제없이 구현되었지만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 도착어에서는 도저히 재현하기 힘든 소리와 의미와 구문의 난제와 싸워 이겨 내는 것. 확실히 상상은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상상도 하기 싫다.


역시 완벽주의자보다는 허술한 꼼꼼이가 돼야!!


(55) 직역과 의역은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항대립적 개념이다. 사실 현실에서는 순수한 직역도 순수한 의역도 없다. 번역가는 번역 과정에 개입하는 다양한 환경과 변수에 그저 본능적으로 대응할 뿐이다.


번역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질문 (내맘대로) 2위: "평소 본인 번역 스타일이 어떠세요? 직역이세요? 의역이세요?" (문답무용. 이 책 일독하시길)

1위: "영어 잘하시겠네요?" (변형기출: "영어 한번 해봐")


도서관에서 빌려 왔는데 다 읽고 나니 너무 좋아서 그냥 사야지 싶다.


(187) 생각해 보라. 번역서 비중이 높은 나라의 독자가 더 행복할까, 그렇지 않은 나라의 독자가 더 행복할까. 당연히 다양한 번역서를 통해 여러 나라의 색다른 문화와 이야기를 즐기고 견식을 넓힐 수 있는 독자가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더 박식하고 더 세계적이며, 따라서 더 행복한 독자다. 가엾은 서구 독자 같으니.


누구든 번역가로 살려면 우선 글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나야 하고 그다음으로는 그 나라가 교육을 중시해 국민의 문해력이 높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국민의 소비력도 웬만해서 크든 작든 출판시장이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나 번역가로 행세하며 살아온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 P198

어렵지만 의미심장한 책을 가방에 한두 달씩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조금씩 곱씹어 읽는 독자는 거의 소멸했다. 대신 일상을 마무리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머리를 식힐 용도로 책을 꺼내 드는 독자가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이런 까닭에 이 시대의 출판업자들은 어쩔 수 없이 가볍고 매끄러운 책을, 디자인은 앙증맞고 불편한 주제는 피해 가는 범용성 책을 더 많이 내게 된다. 사실 누구나 읽을 만한 책은 누구나 꼭 읽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 P79

하지만 역시 보증하건대 번역가는 자기가 번역하는 작가, 즉 원저자의 스타일을 훼손한다. 도착어로 출발어의 언어 효과를 재현하는 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원저자의 ‘일탈‘이 번역가와 독자와는 거의 무관한 일이라는 게 더 중요하다. 원저자가 그토록 일탈하려 한 자국어의 상투적 언어습관이 그들에게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어서다. 그래서 번역가는 원문을 통해 원저자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도 예외 없이 모국어의 정연하고 정상적이며 표준적인 스타일을 더 존중한다. 원저자의 스타일은 그저 은연중에 제한적으로 거기에 스밀 뿐이다. - P47

번역가는 어쨌든 원문과 번역문의 등가를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어휘적, 문법적 구조의 근접성을 뜻하는 형식적 등가는 두 언어를 조직하는 랑그의 본질적 차이를 고려할 때 거의 실현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번역문의 독자가 두 언어에 다 능숙할 수는 없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유진 나이다가 주창한 역동적 등가가 더 귀에 솔깃하다. 이것이야말로 "기호체계보다는 메시지를 번역하여" "파롤의 본질을 유지하는" 번역 전략의 핵심으로 이른바 ‘수용자 반응‘ 차원의 등가다. 이 등가는 텍스트를 읽을 때 원문 독자가 느끼는 반응을 번역문 독자도 똑같이 느끼게 하면 비로소 실현된다. - P59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3-02-21 0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허술한 꼼꼼이 ^^ 대충 정확히란 표현이 떠오르는군요. 대학원 다닐때 선배가 하던 말인데… 그건 효율을 얘기한 거였지만요 :)

책먼지 2023-02-21 11:27   좋아요 3 | URL
이 책에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다 절대 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번역가 이야기가 나오는데 번역가 일은 늘 시간과의 싸움인 만큼 타협과 타협과 타협의 연속이라서 ˝대충 정확히˝도 완전 들어맞는 말인듯요. 말 한마디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뭘하든 수하님 선배분이 일이 굴러가게 했을 것 같아요!!

다락방 2023-02-21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아델라인>을 혹시 보셨나요? 주인공 아델라인이 29세에서 더이상 늙지 않는 병(혹은 저주)에 걸리거든요. 그 젊은 시절을 계속 사는거예요. 그런 그녀는 덕분에 책도 많이 읽고 외국어도 익힙니다. 현재 사귀는 남자가 업무상 포르투갈어로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걸 띄엄띄엄 하니까 아델라인이 빼앗아서 능숙하게 하는 장면이 있어요. 정말 멋진 장면이죠! 물론 저는 포르투갈어를 전혀 모르므로 실제 배우가 그걸 얼마나 잘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때, 늙지 않고 평생 살면 다양한 외국어를 습득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포르투갈어까지 마스터하게 되는구나, 하고요.

포르투갈 어라니, 너무 멋지네요, 책먼지 님!

책먼지 2023-02-21 11:33   좋아요 1 | URL
위에도 적었듯 지금은 거의 잊었으나 다락방님에게 멋지단 소리 들은 것만으로 그 가치는 다하였다!! 제가 포르투갈어를 가장 잘하던 시점에도 감히 누군가의 포어를 판단할 계제는 아니었으나 <아델라인>의 그 장면은 제게도 인상깊었어요.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는 일단 무조건 좋아하게 되는데(채링크로스 84번지는 그런 면에서 원작도 영화도 완전 취향 저격..) 아델라인으로 분한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책 읽는 장면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심장이 아렸던 기억이 납니다.

2023-02-21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21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3-02-21 14: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리뷰 일 좀 충격이에요! 원서 읽기 요약 샘플번역 시장성 분석 다 시켜놓고 10~15만원? 허.... 저 작업들 글로 읽기만 해도 정말 피곤할 것 같은데요 ㅠㅠ
그리고 완벽주의는 진짜 쓸모가 없는 것 같아요. 완벽주의자라 성공했다는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완벽주의는 스트레스 덩어리에 효율성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요인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성공한 완벽주의자들도 완벽주의자가 아니었으면 덜 스트레스받고 더 성공했을지도...
먼지님 번역 얘기 너무 멋있고 재밌어요!! ㅋㅋㅋㅋㅋ

책먼지 2023-02-21 18:31   좋아요 4 | URL
은오님께 멋지고 재밌었음 되었다!!! 사실 저는 회사 다니면서 부업으로 병행한 거라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재정적으론 괜찮았는데 출판 번역가로 데뷔하겠다고 리뷰를 주업 삼아 따로 부업 뛰며 버티시는 분들 계시거든요.. 제 생각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도 한달에 리뷰 세 개 내지 네 개 이상은 힘들거고 그럼 단순 계산해봐도 한달 수입이 최소 30-45만원 내지 40-60만원인데.. 이걸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요..???😭
완벽주의 관련 은오님 가설 완전 설득력있음요!! 사실 일할 때 완벽주의가 돋을 때가 있는데 신건 배당받고 첫 세문장쯤 지나면 됐다 완벽은 무슨 치아라 배째 일케 되는데 한땀한땀 열과 성을 쏟는 분들 너무 신기해요 진짜..

blueyonder 2023-02-23 13:54   좋아요 3 | URL
저도 이 부분이 제일 충격적이네요. 완전 착취입니다. 번역 일을 주지도 않으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네요. 이러고서 일정한 수준을 만족시키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이상한 거 아닌가요?

책먼지 2023-02-23 14:52   좋아요 3 | URL
아무래도 외국도서를 번역해서 낼 때 초기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가니 출판사 입장에서는 위험 부담을 줄이려고 이러는 것 같기는 해요(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때 검토서를 작성해준 초짜 번역가가 아니라 이미 이름이 나 있는 다른 번역가를 기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 그러나 블루님 말씀이 옳고, 옳고, 또 옳다!!! 같이 분노해주셔서 감사해요🥹

공쟝쟝 2023-02-22 2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멋있어.............📚📚🎧🎧
ㅇ ㅣ 책 내 추천이라고 말해줘요!! 어서~~

책먼지 2023-02-22 20:36   좋아요 3 | URL
쟝쟝님 쟝쟝님 추천 맞습니다 맞고요.. 쟝쟝님 아님 이 책 존재조차 몰랐을 것!! 책도 읽고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몇밤자면 돌아와요???😭
 

어릴 때 읽은 탈무드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예화가 있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귀한 것을 자랑했다. 랍비는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귀하지만 당장은 보여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던 와중 해적이 배를 습격한다. 재물을 가졌던 사람들은 가진 걸 모두 잃었으나 랍비는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랍비의 재산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라서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고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재물은 강탈할 수 있고, 지위와 권세는 박탈할 수 있으나, 머릿속의 지식은 건드릴 수 없다는 이 이야기를 읽고 어린 책먼지는 지식을 쌓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영화 <스틸 앨리스>는 지식도 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평생을 노력해 이뤄낸 학문적 성취와 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기억의 조각들이 침탈당하고 소거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모든 기억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을 여전히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앨리스가 교수로 재직했던 컬럼비아 대학교를 가리키며 남편이 앨리스에게 '저기가 어딘지 아냐'고 묻자 앨리스는 모른다고 답한다. 저기에서 당신이 학생을 가르쳤다고 알려주자 앨리스는 '내가 좋은 선생이었다고 들었다'고 한다. 내가 아주 똑똑했었다고. 남편은 '당신이 내가 평생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현재형으로 말한다. 이윽고 묻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기에 있고 싶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도 여전히 뉴욕에 있고 싶냐는 뜻으로. 먹던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으며 앨리스는 '나 아직 다 못 먹었는데 지금 가야하냐'고 답한다. 이 소통의 불가능성에 나는 마음이 미어졌다.


남편은 앨리스를 두고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해 뉴욕을 떠난다. 마지막까지 앨리스를 보살피는 게 남편도, 의사 아들도, 변호사 딸도 아닌, 끝까지 앨리스를 가장 걱정시켰던 배우지망생 딸이라는 게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원작은 2011년에 원서로 읽었는데 영화를 이제 보았다. 영화에서 <Angels in America>를 인용한 부분이 너무 좋아서 급하게 가져온다. 리사 제노바는 신경과학자인데 어쩜 소설도 이렇게 잘 썼지.



약속 나가기 일보직전이라 마음이 급하다(사진 삐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다이애나 비로 분한 <스펜서>를 보고 완전 다시 보게 됐는데, 이때 이미 연기를 잘했구나(트와일라잇이 너무 강렬했어).. 이하 관련 인용구와 클립



Night flight to San Francisco; chase the moon across America. God, it’s been years since I was on a plane. When we hit 35,000 feet we’ll have reached the tropopause, the great belt of calm air, as close as I’ll ever get to the ozone. I dreamed we were there. The plane leapt the tropopause, the safe air, and attained the outer rim, the ozone, which was ragged and torn, patches of it threadbare as old cheesecloth, and that was frightening. But I saw something that only I could see because of my astonishing ability to see such things: Souls were rising, from the earth far below, souls of the dead, of people who had perished, from famine, from war, from the plague, and they floated up, like skydivers in reverse, limbs all akimbo, wheeling and spinning. And the souls of these departed joined hands, clasped ankles, and formed a web, a great net of souls, and the souls were three-atom oxygen molecules of the stuff of ozone, and the outer rim absorbed them and was repaired. Nothing’s lost forever. In this world, there’s a kind of painful progress. Longing for what we’ve left behind, and dreaming ahead. At least I think that’s so.

Tony Kushner, ‘Angels in America, Part Two: Perestroika’






























+ TED Courses 'How to boost your brain + memory with Lisa Genova'


비밀댓글 요정 스콧님 추천으로 리사 제노바의 테드 강연을 찾아보다가 급기야 이 과정을 발견하게 되었다. 듣고 싶다.. 격하게 듣고 싶다.. 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뇌에서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 기억력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지 알려준다는데.. 이 아름다운 문이과 통합형 인재(하버드대 신경과학 박사 겸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의 4주 짜리 강의가 49달러면... 이건 들어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2-18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8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3-02-18 13: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본문까지 정말 다급함이 느껴지는 페이퍼 ㅋㅋㅋㅋㅋ 약속 잘 다녀오셔요

책먼지 2023-02-18 19:49   좋아요 1 | URL
은오님 배웅받고 잘 다녀왔습니다💕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어릴 때 콩쿨에 나가는 날이면 엄마가 공들여 화장과 머리를 해주셨다. 화장은 눈화장이 제일 중요한 거라면서 긴장으로 움츠러든 내 눈매를 가려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옷은 검은색 투피스였다. 이 옷의 백미는 치마였는데 안감은 새틴처럼 매끄러웠고, 겉감으로는 도트 무늬의 풍성한 검은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어릴 적에도 그게 심상치 않은 옷이라는 걸, 아주 진지한 옷이라는 걸, 곧장 알 수 있었다. 콩쿨에 나가는 다른 여자 아이들이 핑크색 공주 드레스를 입을 때 엄마는 내게 그런 옷을 입혔다. 겨울이면 양털처럼 몽글몽글한 소재의 하얀 원피스에 검은 스타킹을 신겼다.


시상식이 끝나고 분식을 파는 포장마차에서 동생과 함께 떡볶이를 먹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거기에 다른 사람들도 종종 있었음이 분명한데 내게 그런 날들은 엄마와의 일대일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루 종일 엄마가 내 곁에 있고 안전하게 보호받았던 기억. 이 책은 그런 기억들을 자극한다.


읽는 와중에 책의 문장들에 자꾸 걸려 넘어진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내가 감히 뭘 했나요? 내가 감히 이렇게 되었다는 게 뭐가 그리 끔찍한가요? (88)" 서른여섯이 된 지금까지도 어린 시절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에, 언제 어디서든 순식간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놀란다. 이 문장은 나를 어린 시절로 데리고 가 그때를 다시 살게 하고 목이 메게 한다.


엄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동생과 나는 친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는 나를 때렸고, 비꼬았고, 윽박질렀고, 굶겼고, 차별했다. 어떤 땐 이유가 있었고 어떤 땐 이유조차 없었다. 때리고, 굶기고, 차별하는 건 차라리 괜찮았다. 더 괴로운 건 순식간에 바뀌는 태도였다. 다른 어른이 있으면 할머니는 갑자기 내게 잘해줬다. 그런 애정이라도 나는 갈망해서, 도무지 거절할 방법을 몰랐다. 나를 사랑해달라고, 동생에게처럼 내게 잘해달라고. 원하고, 갈구해서 나는 무슨 말이든 잘 들었다.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란 말도 잘 들었다. 내가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건 그때 그렇게 온몸으로 사랑을 애원했던 내 자신이다.


엄마는 내가 맞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할머니가 때리는 걸 엄마가 알고 있다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 되었다. 엄마는 밤에 나를 살폈다. 경미한 날은 멘소래담을 발라줬고, 심하게 열이 오르면 밤새 곁에서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집에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으면 응급실로 갔고, 몰래 나를 정신과에 데리고 다녔다. 그때 집에는 고모와 삼촌들도 함께 살았는데 엄마와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건 내가 맞는 걸 들키는 거였다. 다른 식구들에게 들킬까봐, 아빠에게 들킬까봐 그게 그렇게 무서웠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엄마와 나는 노란 간접등만 켜놓고 부엌 구석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소곤거렸다. 엄마는 그때 술을 마셨는데 내게도 한 모금씩 나눠주었다. 엄마랑 너랑 둘이 나가살까. 우리 둘만 같이 살까. 한숨처럼 얘기할 때 나는 그러자고, 당장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어서, 기대에 부풀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대신 엄마는 나를 피아노 앞으로, 캔버스 앞으로, 테니스 코트로, 교회로 보냈다. 그중 나는 피아노 학원이 가장 좋았다. 문을 잠궈도 아무도 열라고 소리지르거나 미친듯이 두드리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있을 땐 맞지 않았다. 공부를 하고 있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독서가, 공부가 무기인 걸 알았다. 100점 짜리 시험지와 1등 성적표, 경시대회 상장이 나를 지켜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맞지 않았다.


(72) 고통은 실제로 쓸모가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다만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러했다.


우울증은 망령처럼 내 뒤를 따라다니고 나는 가끔 그것에 몸을 내준다. 불면증이 심했던 시기에는 주기적으로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했다. 졸피뎀의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때도 내 수중엔 꽤 많은 졸피뎀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별로 살고 싶지도 않은 게 우울증 환자의 디폴트 값이다. 내가 아동학대의 생존자라서 이렇게 된 건 아니다. 그건 그저 수많은 원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냥 이 세상이 잘못 설계되어서 생각하는 여자가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가 더 어려운 것일 뿐이다. 나는 이제 그냥 이걸 오랜 친구처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겪은 몸과 마음의 상태를 딱 떨어지게 설명하는 이야기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나 가끔 모양이 아주 비슷한 조각을 발견한다. 최근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조각은 버지니아 울프와 헤밍웨이가 고기능성 우울증이라서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글을 쓰고, 끝까지 자신을 소진한 뒤 결국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인데, 그걸 어디서 읽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5:46) I know it sounds silly but the hardest part of every day is just getting out of bed. I lay there thinking about all the things I have to get done. I imagine it all in my mind. And one by one, I fail at everything. I don't finish my schoolwork. I'm late for work. I say the wrong thing at home, and then I think maybe I shouldn't even try. So I lay there for a while...

- <뉴 암스테르담> 시즌 1 에피소드 8 Three Dots

대체 무엇이 글쓰기를 숨쉬기처럼 필수적이게 할까? 우리가 노력하고, 실패하고, 앉아 있고, 생각하고, 저항하고, 꿈꾸고, 복잡하게 하고, 풀어내는, 우리를 깊이 연루시키고, 기민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수많은 나날이다. 시간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몸이 무관해진다.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될 것처럼 의식에 가까워져 있다. 이는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얼어붙은 땅 아래, 보이는 것들 아래로 깊숙이 묻힌 무언가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할 수 있다면 거기 머물러라. 저항하지 마라. 강요하지 마라. 다만 도망치지 마라. 견디자. 인내하자. 보상은 계산되지 않는다.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건 일어난다면, 어떤 작가라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이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 P129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2-16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6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6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6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7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8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23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23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23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23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