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번과 마녀>보다 이 책 <혁명의 영점>을 더 즐겁게 읽고 있다. <캘리번과 마녀>를 통해 페데리치 님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의 어법과 논지에 좀 익숙해졌고, 이 책이 현재를 기준으로 더 가까운 과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례 1.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는 여성 직장 동료들에게서 아이 돌봄과 가사 도움에 지불하는 비용이 급여와 거의 비슷하다는 한탄을 들을 때가 있다. 밖에 나와서 번 돈을 그냥 고스란히 가져다 바치는 격이라고. 경제적인 부분만 생각하면 그냥 집에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사례 2. 직장 생활이 힘들어서 하소연하면 어른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그만두고 결혼해서 애나 키우면서 편하게 살아.”
이 책은 말한다.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와 자본에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요구해야 한다고. 임금지불을 요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적인 영역에서의 투쟁을 공론화하며, 가사노동이 여성에 특화된 활동이라는 터무니없는 환상을 깨고, 종국에는 이러한 부불재생산노동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65) 깁고 있던 양말에서, 조리하던 음식에서 고개를 들고 우리 노동일의 총체성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이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임금으로 귀결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귀중한 상품인 노동력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은 단순한 집 청소가 아니다. 가사노동은 임금노동자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여 매일 같이 일터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사노동은 아이들(미래의 노동자들)을 돌보는 것을, 즉 태어날 때부터 학교 다닐 때까지 시중을 들고, 이들 역시 자본주의하에서 기대되는 방식대로 일을 해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모든 공장 뒤에, 모든 학교 뒤에, 모든 사무실이나 광산 뒤에는 공장, 학교, 사무실, 광산에서 노동하는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노동을 소진한 수백만 명 여성들의 숨은 노동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성은 이미 노동시장에 속해 있으며, 여성의 재생산노동이 노동시장과 자본주의의 근간이다. 따라서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부불재생산노동에 더해 임금노동이라는 부업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은커녕 더욱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격이다. 만약 내가 비혼 무자녀 여성이 아니었다면 일을 그만뒀을까?
이쯤에서 사례 2로 돌아가보자. 그런 상황에서 내 답은 언제나, “나는 어차피 일할 거야, 결혼을 하든 말든 어차피 돈 벌 거라고”이다(‘결혼해서 애나 키우면서’ 사는 게 얼마나 ‘편하지 않은 일’인지의 문제는 일단 제쳐 두자). 내가 버는 돈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경제권에 속해 있어서 타의로 소비를 저지당하는 건 유년기로 충분하다. 경제적 독립 없이 독립을 말할 수 있을까? 돈을 받아서 생활하면서 그 상대와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사례 1에 해당하는 인물 중 프리랜서로 통번역을 하는 선배가 있다. 번역을 하는 날은 아이가 찾아도 웬만해선 방 밖으로 나가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지금 집에 없다, 밖이다’ 생각하고 정해진 시간 이상은 반드시 확보해서 일을 한다면서, 차라리 통역 때문에 아예 나가는 날이 더 낫다고 덧붙인다. 그렇게 번역해서 번 돈이 내가 거기 앉아서 번역하는 동안 이모님이 일해주신 만큼도 충당 안됐을 거야. 그래도 알지? 절대 못 그만둬.
물론 여자들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데는 경제적인 부분 외에 수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불노동의 세계로 편입되어 소비되어야 할 돈을 아끼는 것과 비록 그렇게 소비되는 돈과 동일한 금액이라 할지라도 직접 임금노동시장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89) 사실 여성들은 "똑같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시장의 일자리와 (가사노동)을 맞바꾸고 싶어 했는데, (왜냐하면) 시장의 일자리는 월급을 준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남의 아이와 남의 살림을 돌보는 일엔 임금이 지급된다. 내 아이와 내 살림을 돌보는 일엔 왜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가? 그럼 우린 서로의 아이 돌보미와 가사 도우미가 되어야 하는가? 이 책을 보면 미국에서 "정부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돌보는 여성들에게만 돈을 지급하려 한다면 "아이를 서로 맞바꿔야"한다(89)"는 논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복지제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부추기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복지수당과 생활보호대상으로 다루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부양가족에 대한 세금공제를 임금지불의 일환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 임금지불의 제도적 형태에 대한 고민은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통번역이 여자가 하기 좋은 일이라고,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아이 키우면서 하기 참 좋은 일이라고 누군가 말할 때 그냥 그 말을 싹 갖다 버리고 싶다. 번역가가 자유롭게 여행 다니면서 어디 전망 좋은 카페 같은 데 자리잡고 일할 수 있을 것이란 상상만큼 허황한 얘기다. 소위 교사나 약사를 일컬어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라고 하는데(가사노동과 병행하기 좋다는 면에서?), 맙소사, 세상에 그런 직업은 없다.)
그러나 선배도 아이에게만큼은 늘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우리가 관계 속에 살 수밖에 없고 가사노동이 그러한 관계에 지나치게 밀접하게 얽혀 있단 생각은 든다. 그러니 딱 잘라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노동이고 어디서부터가 (생리적, 안전, 애정/소속, 존중,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다(특히, 출산과 양육, 섹슈얼리티에서).
(47) 즉, 고립된 조건, 다른 사람들의 삶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 우리의 노동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우리의 노동이 어디서 끝나고 우리의 욕망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확인할 수 없는 문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명절 음식 준비. 이건 헷갈릴 여지없는 엄청난 노동이지만, 한번 이걸로 예를 드는 무모한 시도를 해보자. 명절에 음식을 준비할 때 동생은 주로 누워 있다. “음식 하지 마. 우리도 그냥 사 먹자.” 말로만 거든다. 문제는 우리집이 큰집이라 이걸 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33년 만에 동생이 명절에 전을 부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올케가 일손을 거드는 걸 보더니 마음이 쓰였는지 본인이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내의 고생이 동생의 역치를 건드린 것이다(에잇,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이걸 보면서 엄마와 나는 우리가 얘를 잘키운 건지 못키운 건지 좀 아리송해졌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그동안 안 했다고? 만약 이게 명절 음식 준비 같은 게 아니라 좀 미묘한 다른 문제였다면? 그러면 마음이 불편해서 차라리 몸을 움직인 결정은 노동일까? 마음이 편하고 싶은 이기심일까? 아끼는 사람에 대한 배려일까? 학습된 의무감의 발로로 인한 부채의식의 탕감일까?
한쪽 끝은 '노동' 반대쪽 끝은 '노동이 아닌 것'을 기준으로 하는 하나의 축에 가사노동의 세부항목을 줄세웠을 때 명절 음식 준비는 '노동' 쪽에 아주 가까울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것을 예로 들었을 때의 이득은 하물며 이다지도 노동이 분명한 일의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노동인 부분과 노동이 아닌 부분을 선명하게 가르기 어렵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활동이 노동인지 노동이 아닌지 구분하기도 어렵지만 그 활동의 내부에도 노동과 노동이 아닌 면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명절 노동에 가격표를 붙인다면 명절 풍경은 어떻게 바뀔까? 제사는 못 지낼 것이다. 너무 비싸니까. 모임은 간소해지고, 외식이나 여행은 더 늘어날 것이다. 그 돈이 그 돈이니까.
(77) 사실 우리의 노동과 가족, 남성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를 가장 강력하게 제도화한 것은 바로 가사노동에 대한 보상은 언제나 임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임금노동자가 된다면 임금은 생산성 거래를 통해 받게 되는 대가가 아니다. 우리는 임금에 대한 보답으로 전만큼 혹은 전보다 더 많이 일하지는 않고 오히려 더 적게 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금이 [가사노동에 들어가는]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해결해줄 수 있기를, 경제적 독립의 필요성 때문에 부업에 구속되지 않고 투쟁을 일구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