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어릴 때 콩쿨에 나가는 날이면 엄마가 공들여 화장과 머리를 해주셨다. 화장은 눈화장이 제일 중요한 거라면서 긴장으로 움츠러든 내 눈매를 가려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옷은 검은색 투피스였다. 이 옷의 백미는 치마였는데 안감은 새틴처럼 매끄러웠고, 겉감으로는 도트 무늬의 풍성한 검은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어릴 적에도 그게 심상치 않은 옷이라는 걸, 아주 진지한 옷이라는 걸, 곧장 알 수 있었다. 콩쿨에 나가는 다른 여자 아이들이 핑크색 공주 드레스를 입을 때 엄마는 내게 그런 옷을 입혔다. 겨울이면 양털처럼 몽글몽글한 소재의 하얀 원피스에 검은 스타킹을 신겼다.
시상식이 끝나고 분식을 파는 포장마차에서 동생과 함께 떡볶이를 먹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거기에 다른 사람들도 종종 있었음이 분명한데 내게 그런 날들은 엄마와의 일대일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루 종일 엄마가 내 곁에 있고 안전하게 보호받았던 기억. 이 책은 그런 기억들을 자극한다.
읽는 와중에 책의 문장들에 자꾸 걸려 넘어진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내가 감히 뭘 했나요? 내가 감히 이렇게 되었다는 게 뭐가 그리 끔찍한가요? (88)" 서른여섯이 된 지금까지도 어린 시절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에, 언제 어디서든 순식간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놀란다. 이 문장은 나를 어린 시절로 데리고 가 그때를 다시 살게 하고 목이 메게 한다.
엄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동생과 나는 친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는 나를 때렸고, 비꼬았고, 윽박질렀고, 굶겼고, 차별했다. 어떤 땐 이유가 있었고 어떤 땐 이유조차 없었다. 때리고, 굶기고, 차별하는 건 차라리 괜찮았다. 더 괴로운 건 순식간에 바뀌는 태도였다. 다른 어른이 있으면 할머니는 갑자기 내게 잘해줬다. 그런 애정이라도 나는 갈망해서, 도무지 거절할 방법을 몰랐다. 나를 사랑해달라고, 동생에게처럼 내게 잘해달라고. 원하고, 갈구해서 나는 무슨 말이든 잘 들었다.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란 말도 잘 들었다. 내가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건 그때 그렇게 온몸으로 사랑을 애원했던 내 자신이다.
엄마는 내가 맞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할머니가 때리는 걸 엄마가 알고 있다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 되었다. 엄마는 밤에 나를 살폈다. 경미한 날은 멘소래담을 발라줬고, 심하게 열이 오르면 밤새 곁에서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집에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으면 응급실로 갔고, 몰래 나를 정신과에 데리고 다녔다. 그때 집에는 고모와 삼촌들도 함께 살았는데 엄마와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건 내가 맞는 걸 들키는 거였다. 다른 식구들에게 들킬까봐, 아빠에게 들킬까봐 그게 그렇게 무서웠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엄마와 나는 노란 간접등만 켜놓고 부엌 구석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소곤거렸다. 엄마는 그때 술을 마셨는데 내게도 한 모금씩 나눠주었다. 엄마랑 너랑 둘이 나가살까. 우리 둘만 같이 살까. 한숨처럼 얘기할 때 나는 그러자고, 당장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어서, 기대에 부풀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대신 엄마는 나를 피아노 앞으로, 캔버스 앞으로, 테니스 코트로, 교회로 보냈다. 그중 나는 피아노 학원이 가장 좋았다. 문을 잠궈도 아무도 열라고 소리지르거나 미친듯이 두드리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있을 땐 맞지 않았다. 공부를 하고 있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독서가, 공부가 무기인 걸 알았다. 100점 짜리 시험지와 1등 성적표, 경시대회 상장이 나를 지켜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맞지 않았다.
(72) 고통은 실제로 쓸모가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다만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러했다.
우울증은 망령처럼 내 뒤를 따라다니고 나는 가끔 그것에 몸을 내준다. 불면증이 심했던 시기에는 주기적으로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했다. 졸피뎀의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때도 내 수중엔 꽤 많은 졸피뎀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별로 살고 싶지도 않은 게 우울증 환자의 디폴트 값이다. 내가 아동학대의 생존자라서 이렇게 된 건 아니다. 그건 그저 수많은 원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냥 이 세상이 잘못 설계되어서 생각하는 여자가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가 더 어려운 것일 뿐이다. 나는 이제 그냥 이걸 오랜 친구처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겪은 몸과 마음의 상태를 딱 떨어지게 설명하는 이야기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나 가끔 모양이 아주 비슷한 조각을 발견한다. 최근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조각은 버지니아 울프와 헤밍웨이가 고기능성 우울증이라서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글을 쓰고, 끝까지 자신을 소진한 뒤 결국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인데, 그걸 어디서 읽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5:46) I know it sounds silly but the hardest part of every day is just getting out of bed. I lay there thinking about all the things I have to get done. I imagine it all in my mind. And one by one, I fail at everything. I don't finish my schoolwork. I'm late for work. I say the wrong thing at home, and then I think maybe I shouldn't even try. So I lay there for a while...
- <뉴 암스테르담> 시즌 1 에피소드 8 Three Dots
대체 무엇이 글쓰기를 숨쉬기처럼 필수적이게 할까? 우리가 노력하고, 실패하고, 앉아 있고, 생각하고, 저항하고, 꿈꾸고, 복잡하게 하고, 풀어내는, 우리를 깊이 연루시키고, 기민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수많은 나날이다. 시간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몸이 무관해진다.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될 것처럼 의식에 가까워져 있다. 이는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얼어붙은 땅 아래, 보이는 것들 아래로 깊숙이 묻힌 무언가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할 수 있다면 거기 머물러라. 저항하지 마라. 강요하지 마라. 다만 도망치지 마라. 견디자. 인내하자. 보상은 계산되지 않는다.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건 일어난다면, 어떤 작가라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이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 P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