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어를 했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포르투갈어가, 그 언어의 울림이, 그 말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교환학생으로 포르투갈에 갔고, 포르투갈식 포르투갈어를 배워왔다. 한국에서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으며, 그들 대부분은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는 그 한줌의 사람들마저 내 발음을 신기해하는 걸 보며, 이게 망한 일인 걸 알았다. 언어는 범용성이 생명인데 희귀 언어 사용자 내부에서도 희귀종 취급받다니. 망했다. 이듬해 영미권으로 연수를 갈 땐 브론테 세 자매, 제인 오스틴, 셜록 홈즈, 해리포터에도 불구하고 런던이 아니라 뉴욕을 택했다. 이번엔 다수 중의 다수가 돼야지. 공급도 많지만 그만큼 수요도 많아야 비범과 거리가 먼 나에게까지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다.
처음 통번역 시장에 나왔을 때는 언어 방향도, 분야도 가리지 않았다. 그중엔 출판 번역도 있었다. 지금은 망한 출판 번역 에이전시를 통해 책을 세 권 번역했다. 두 권은 이름을 도둑 맞았으나 한 권엔 내 이름이 실렸다. 그러나 세 권 모두 정산을 받지 못했다. 이후 다른 출판 번역 에이전시에서 출판 번역 교육과정을 수강했다. 해당업체에 번역가로 등록하려면 필요한 절차였다. 이곳에서는 소위 말하는 '리뷰' 일외에는 받지 못했다. 이 '리뷰'라는 것은 출판사에서 해당 외국도서를 번역해서 내도 좋을지 검토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에이전시에 의뢰된다. '리뷰어'는 일주일 내지 열흘 내에 2~300쪽 분량의 원서를 읽고, 각 장을 요약하고, 샘플번역을 첨부해서, 이 책에 시장성이 있을지 분석한 검토서를 제출한다(여기엔 SWAT 분석, 기존에 출판된 도서 중 해당 서적과 비슷한 책이 있는지 비교하는 항목 등도 포함된다). 이 작업을 하고 받는 돈은 세금 포함 10~15만원이다. 번역해서 출간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출판사 측에서 판단할 경우 해당 리뷰어에게 번역을 의뢰하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실제 그 책을 맡을 번역자는 별도로 정해진다. 상상 이상으로 품이 많이 들지만 가성비는 꽝인 이 작업을 나는 무척 싫어한다. 리뷰를 맡은 책의 출판이 결정되어야 번역 기회라도 노려볼 수 있을 텐데 어째 의뢰가 오는 책마다 별로다. 출판되면 안 될 것 같다. 그런 책으로 약 2주를 날려버린 데 분노하며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면 안 될 책이라고 검토서에 적는다. 파국이다. 이처럼 출판 번역과 관련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의 나는 활동 반경이 매우 좁아져서, 통역을 버리고 번역을, 영한을 버리고 한영을, 다른 분야를 버리고 특허 번역과 법률 번역을 주로 한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발을 담가보았고 인접 직역에 있어 그 고충을 감히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기에 출판 번역가를 더욱 존경한다.
(133) 보수와 직업이 불안정한 탓에 배를 곯아 가며 "좋아하는 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한다면 대다수 사람에게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행일 것이다.
이 책을 쓴 김택규 번역가님은 번역이라는 업의 낭만과 감상보다는 현실을 전한다. 지면에 단단히 발을 디딘 채 결코 아름답거나 녹록지 않은 그 현실을 직면하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업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져서, 매너리즘에 빠진 어느 번역업자의 양심이 몹시 아리다. 번역 작업 방식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 공감하며 읽었다(지나치게 완벽한 사람보다는 꼼꼼하되 어딘지 살짝 허술한 사람이 번역을 잘한다는 평소의 가설도 확인되었다).
(95) 번역가마다 퇴고하는 방식이 다르다. 누구는 빠르게 번역을 마친 후 한두 주씩 오래 퇴고를 하고, 누구는 꼼꼼히 점검해 가며 느리게 번역을 마친 후 하루 이틀 만에 퇴고를 끝낸다. 나는 후자다. 퇴고는 빠르면 한나절, 느려도 하루면 된다.
나 역시 확고히 후자다. 그리고 이 부분.
(127) 출발어에서는 문제없이 구현되었지만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 도착어에서는 도저히 재현하기 힘든 소리와 의미와 구문의 난제와 싸워 이겨 내는 것. 확실히 상상은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상상도 하기 싫다.
역시 완벽주의자보다는 허술한 꼼꼼이가 돼야!!
(55) 직역과 의역은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항대립적 개념이다. 사실 현실에서는 순수한 직역도 순수한 의역도 없다. 번역가는 번역 과정에 개입하는 다양한 환경과 변수에 그저 본능적으로 대응할 뿐이다.
번역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질문 (내맘대로) 2위: "평소 본인 번역 스타일이 어떠세요? 직역이세요? 의역이세요?" (문답무용. 이 책 일독하시길)
1위: "영어 잘하시겠네요?" (변형기출: "영어 한번 해봐")
도서관에서 빌려 왔는데 다 읽고 나니 너무 좋아서 그냥 사야지 싶다.
(187) 생각해 보라. 번역서 비중이 높은 나라의 독자가 더 행복할까, 그렇지 않은 나라의 독자가 더 행복할까. 당연히 다양한 번역서를 통해 여러 나라의 색다른 문화와 이야기를 즐기고 견식을 넓힐 수 있는 독자가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더 박식하고 더 세계적이며, 따라서 더 행복한 독자다. 가엾은 서구 독자 같으니.
누구든 번역가로 살려면 우선 글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나야 하고 그다음으로는 그 나라가 교육을 중시해 국민의 문해력이 높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국민의 소비력도 웬만해서 크든 작든 출판시장이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나 번역가로 행세하며 살아온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 P198
어렵지만 의미심장한 책을 가방에 한두 달씩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조금씩 곱씹어 읽는 독자는 거의 소멸했다. 대신 일상을 마무리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머리를 식힐 용도로 책을 꺼내 드는 독자가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이런 까닭에 이 시대의 출판업자들은 어쩔 수 없이 가볍고 매끄러운 책을, 디자인은 앙증맞고 불편한 주제는 피해 가는 범용성 책을 더 많이 내게 된다. 사실 누구나 읽을 만한 책은 누구나 꼭 읽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 P79
하지만 역시 보증하건대 번역가는 자기가 번역하는 작가, 즉 원저자의 스타일을 훼손한다. 도착어로 출발어의 언어 효과를 재현하는 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원저자의 ‘일탈‘이 번역가와 독자와는 거의 무관한 일이라는 게 더 중요하다. 원저자가 그토록 일탈하려 한 자국어의 상투적 언어습관이 그들에게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어서다. 그래서 번역가는 원문을 통해 원저자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도 예외 없이 모국어의 정연하고 정상적이며 표준적인 스타일을 더 존중한다. 원저자의 스타일은 그저 은연중에 제한적으로 거기에 스밀 뿐이다. - P47
번역가는 어쨌든 원문과 번역문의 등가를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어휘적, 문법적 구조의 근접성을 뜻하는 형식적 등가는 두 언어를 조직하는 랑그의 본질적 차이를 고려할 때 거의 실현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번역문의 독자가 두 언어에 다 능숙할 수는 없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유진 나이다가 주창한 역동적 등가가 더 귀에 솔깃하다. 이것이야말로 "기호체계보다는 메시지를 번역하여" "파롤의 본질을 유지하는" 번역 전략의 핵심으로 이른바 ‘수용자 반응‘ 차원의 등가다. 이 등가는 텍스트를 읽을 때 원문 독자가 느끼는 반응을 번역문 독자도 똑같이 느끼게 하면 비로소 실현된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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