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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촌놈이 아니고 진짜 촌놈이 부산엘 갔다. 택시를 탔는데 갈려는 곳이 설명하기 어려워서 내비게이션을 찍고 가자고 부탁했다. 연세 지긋해 보이는 기사분은 내비게이션을 잘 다루지 못했다. 우선 정차하면 목적지를 입력하기로 했다. 정차했는데 기사분 내비게이션은 워낙 구닥다리여서 목적지를 입력하는 것이 까다로웠다.

첫 번째 정차에서 목적지 입력에 실패했다. 두 번째 정차에서도 실패했다. 세 번째 정차에서도 실패했다. 운전 기사분은 비록 고물 내비게이션을 가졌지만 ‘끈기’도 가졌다. 포기를 모르신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섰는데 나는 기계치다. 나도 실패했다. 급기야 한 참 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내밷고 말았다. “기사님 좀 좋은 내비게이션을 장만하시지 그러셨어요” 

약속 시각은 다가오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내 휴대전화를 꺼내서 내비게이션을 검색했는데 목적지를 모두 입력하기도 전에 연관 검색어로 ‘여기 갈 거니?’라고 물어본다. 운전석 옆에 내 휴대전화를 두었다. 음성 안내를 듣고 운전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기사분은 정차할 때마다 내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다. 탐독하셨다. 음성안내를 듣고 운전하는 것이 익숙하시지 않으셨다. 

어쨌든 택시는 목적지를 향해서 꾸역꾸역 다가갔다. 기사분이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은 실시간 교통정보를 반영하는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실시간 교통정보를 반영하지 않는 내비게이션을 운용하는 기사분이 당황스러웠다. 본인이 평소 다니는 경로와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내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면서 기사분은 연달아 감탄하셨다. 

차가 꽉 막히는 다른 구간과는 달리 우리가 가는 구간은 뻥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차할 때마다 내 휴대전화를 쓰다듬으면서 성능을 칭송하셨다. 아니다. 찬양하셨다. 잠시 뒤에 목적지라면서 내리란다. 요금을 계산하는데 마침 기사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내 사랑 마나님 하트 하트(원래는 도형이었는데 내가 그림으로 하트 표시를 입력할 줄 몰라 할 수 없이 텍스트로 입력했다)이라는 발신자 정보가 보였다. 내리긴 내렸는데 목적지는 신호등 있는 건널목을 건너야 하는 맞은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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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8-02-11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작가님 고생 많으셨네요ㅠㅠ부산 가신 건 부럽습니다만^^;

박균호 2018-02-11 05:29   좋아요 0 | URL
아...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그렇게 고생은 아니었어요. 맞아요 부산은 참 매력적인 곳이에요.

2018-02-11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8-02-11 22:36   좋아요 0 | URL
아..네 반갑습니다. 원래 웃자고 쓴 이야기 입니다. ㅎㅎㅎㅎ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하더라도 내가 사는 30가구가 넘는 동네에서 TV가 있는 집은 '도랑 건너 할머니 댁'이 유일했다. 책을 읽는 것 말고는 달리 유흥거리가 없었던 것이 나를 독서가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는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는데 '장서의 수'도 조사 항목에 있었다. 언젠가 50권이라고 적었는데 너무 큰 거짓말을 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닥치는 대로'읽어봤자 내가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하다.

우리 동네 가구 전체의 장서 수를 합쳐봐야 얼마 되지 않으니 '닥치는 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만화책을 싫어하는 아이는 없었다. 어찌나 많이 돌려보았는지 만화책 커버는 모두 두툼한 비닐로 무장되었다. 그 당시 만화책은 요즘으로 치면 스마트폰 게임과 같은 것이었다. 더 읽을 책이 없게 되자 베개만큼이나 두툼한 <가정의학>을 읽기도 했다. 벼농사로 생계를 잇는 시골 농가에 왜 그 책이 있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어쨌든 나는 <가정의학>을 코흘리게때 이미 독파한 사람이다. 동시에 농민신문의 애독자이기도 했다.

어쩌다가 새로운 책을 손에 넣으면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그 책이 주는 즐거움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그 방법이란 밥과 함께 그 책을 읽는 것이었다. 대청마루에서 흰 쌀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서 책을 읽는 쾌락은 요즘 아이들로 치면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는 피시방에 가서 컵라면에 가장 화젯거리인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기분에 버금갈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는 나를 보면서 내 친구들은 식사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러나 보다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뭔가를 먹으면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팝콘을 먹는 것과 다름없다. 나처럼 뭔가를 먹으면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독서 간식 안내'를 해본다.

식사류

꼭 밥이어야 한다. 반찬도 단순해야 한다. 소화가 다소 걱정되더라도 국이나 물에 말아 먹는 것을 권한다. 말아 먹기 싫은 사람이라도 반찬이 3개를 넘어서는 안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책을 응시하면서 밥을 먹으면 반드시 국물이나 반찬을 흘리기 마련이다. 책을 원래 험하게 읽는 사람은 책에 국물을 흘리더라도 개의치 않는다고 하지만 며칠 전에 산 신상 옷이라면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까?

경험상 책을 읽으면서 뭔가를 먹으면 책보다는 옷에 뭔가를 흘릴 확률이 높다. 책은 민첩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통제 아래에 있지만, 옷은 당신의 주의력이 미치지 않는다. 먹거리가 입으로 향하는 중간에 흘리지 책에 도착해서 흘리는 경우는 적다. 기왕에 말아먹는다면 국물이 새빨간 육개장보다는 담백한 미역국이 좋겠고 가능하다면 맹물을 권한다. 맹물은 흘리더라도 표시가 덜 나지만 육개장 국물을 책에 흘리면 회복할 수 없다.

면류에 관해서 말하자면 라면은 야식의 제왕이지 독서 간식으로서는 최악의 선택이다. 라면 국물은 냄새도 강하고 여러 가지 혼합물이 많아서 책에 흘리면 복구하기가 까다롭다. 면발이 아무래도 쫄깃한 라면의 특성상 국물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튈 확률이 높다. 면류를 좋아한다면 라면보다 빨리 먹을 수 있고, 국물도 담백해서 피해의 정도가 약한 잔치국수를 권한다.

밥이나 면을 먹으면서 책을 읽을 때는 책의 종류를 고려해야 한다. 책의 내지가 잘 펼쳐져서 손으로 압박을 가하지 않아도 얌전히 자신이 읽을 쪽이 펼쳐지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책을 탁자에 얹어놓고 독자는 먹거리가 자신의 입으로 정확하게 배송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힘을 줘서 내지를 고정해야 하는 책을 밥이나 면을 먹으면서 읽는 것은 최상위 고수만 가능한 영역이다.

과자류

쿠쿠다스는 절대로 안 된다. 상처를 잘 입는 운동선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쿠쿠다스 몸이라고 한다. 쿠쿠다스를 원형을 전혀 손상하지 않고 봉지에서 꺼내서 입으로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쿠쿠다스는 흘리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거나, 잠시 뒤에 초강력 진공청소기를 가동할 사람만 먹기 바란다. 오직 쿠쿠다스를 먹는 것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분명 조각들을 흘리기 마련이거늘 하물며 책을 읽으면서 이 과자를 먹는다는 것은 보통 무모한 짓이 아니다. 바닥은 물론이고 당신 옷의 구석구석, 책의 내지 등등 쿠쿠다스가 침투하지 못하는 장소는 없다.

굳이 독서용 과자를 먹고 싶으면 쿠쿠다스보다 난이도가 현격히 낮은 '아이비'를 권한다. '에이스'도 쿠쿠다스 보다 못할 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삼가야 한다. 그럼 독서용 과자로 적당한 것은 무엇인가? '오징어 땅콩'을 권한다. 흔한 과자이면서도 독서가의 책과 옷에 손상을 거의 주지 않는다. 부스러기도 별로 없다. 보지 않고도 손을 뻗어서 손쉽게 먹을 수 있어서 독서에 집중하기에 쉽다. 그래도 과자 표면의 부스러기에 있는 기름기가 책에 묻기도 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책장을 넘기는 손과 과자를 집는 손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팝콘은 영화와도 좋은 친구지만 책과도 괜찮은 친구다. 부스러기를 흘릴 확률이 낮고 책을 응시하면서 손만 뻗어서 먹을 수 있다. 다만 알이 단단하고 적당히 큰 것이 좋다. 그래야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고 알 자체를 분실하지 않는다. 독서용 과자로 가장 좋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춥파춥스'다. 알이 굵어서 오래 빨 수 있으니까 독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샤프트가 장착되어 있으니 그 어떤 곳에도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이 사탕은 원래 책을 읽으면서 먹으라고 만든 사탕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완벽하다. 너무 완벽하다.

아이스크림류

독서 간식으로 떠먹는 아이스크림이 적당한지 바의 형태로 된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나의 경험만을 가지고 따진다면 떠먹는 것이 좋다. 떠먹는 아이스크림은 먹을 때만 숟가락을 사용하니까 아무래도 위험의 확률이 낮고 집중도도 높다. 막대 형태로 된 아이스크림은 상시 손에 들려 있으니까 조금만 지나면 책에 집중한 나머지 본인이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국물이 용암처럼 흘러내리는데도 말이다.

과일류

독서 과일로 최악의 선택은 방울토마토다. 크기도 한입에 쏙 들어가고 겉이 반질반질한 것이 독서 과일로 적당해 보이지만 입에 넣어서 압박을 가하는 순간 토마토는 하나의 수류탄이나 다름없다. 조심성이 없는 독서가가 먹는 방울토마토는 파편이 입 밖으로 돌진해서 당신의 옷과 책에 씨앗을 뿌린다. 오래된 책에서 싹이 튼다면 그건 방울토마토가 범인이다. 수박의 경우는 잘게 썰어서 포크로 찍어서 먹어야지 길게 자른 수박을 손에 들고 먹으면 피해가 커지니까 조심해야 한다.

독서 과일로 가장 적합한 것은 바나나다. 바나나는 춥파춥스와 함께 독서 간식의 쌍두마차다. 아니다. 원탑이라고 봐야겠다. 사탕은 몸에 해롭지만, 바나나는 건강에 좋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바나나는 조각을 흘릴 확률도 없고 과즙도 거의 없다. 나처럼 조심성 결핍증 환자조차도 바나나와 함께라면 그 어떤 희생을 치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

음료류

모든 음료는 독서 간식으로 좋다. 음료를 마시면서 책을 읽으면 남들이 보기에도 지성미가 넘친다. 이미지 개선용으로는 최고의 선택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차가운 것보단 뜨거운 음료가 좋겠다. 차가운 음료는 벌컥벌컥 마시니까 고급스러운 이미지도 덜하고 아무래도 빨리 마시다 보면 사고의 위험이 존재한다. 음료를 담는 용기는 조그마한 찻잔보다는 머그잔이 낫겠다. 아무래도 책에 집중하면서 사고 없이 집어 들기엔 큰 머그잔이 편하다. 음료의 경우는 그 종류보다 온도와 용기의 선택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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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2-08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만담2에 실어주세요.작가님
재미있네요^^

박균호 2018-02-08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그렇지 않아도 새 책 원고 마감했는데 막차로 넣었어요..ㅎㅎ

양철나무꾼 2018-02-08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전 주식을 먹으면서 독서를 하는 건 성격상 불가능하고,
책상에 앉아서 독서를 할때 간식은 간혹 먹는데,
언젠가 ‘신당동떡볶이‘라는 과자를 먹다가 손자국을 낸 이후로는 간식 먹는 것도 조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간식은 청우식품 ‘파래김스틱‘이예요.
바삭해서 손에 안 묻어나거든요~^^

박균호 2018-02-08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래김스틱...요거 마트에 가서 사야겠어요..ㅎㅎ

북극곰 2018-02-09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ㅎㅎㅎ 너무 재밌어요. 쿠쿠다스, 에이스, 라면 국물 완전 공감합니다.
<가정의학> 책 저희 집에도 있었는데. 나름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ㅋ

글 읽다가 재밌어서, 친구추가하려다 보니 이미 추가가 되어 있어서... 또 살펴보니 ‘잡식성...‘이셨군요. 간만에 알라딘 서재를 둘러보느라고, 책을 내신지도 몰랐습니다. =.=;
처음 책부터 찬찬히 봐야겠어요.


박균호 2018-02-10 08:05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가정의학이 의외로 흔한 책있군요...ㅎㅎ
 
검사내전 - 생활형 검사의 사람 공부, 세상 공부
김웅 지음 / 부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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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판사나 변호사가 낸 책은 많은데 검사는 책을 잘 내지 않는다. 판사가 쓴 책은 뭔가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내용이 많고, 변호사가 쓴 책은 대체로 사회 전반적인 풍조를 다루거나 전문적인 내용이 많다. 정확한 통계를 낸 것은 아니고 대체로 체감 상 그렇다. 


검찰은 군대식 상명하복의 조직이라고들 한다. 군대도 상명하복의 조직인데 오죽 재미난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검사들의 세계가 궁금했는데 마침 현직 검사가 쓴 책이라고 해서 텁석 물었다. 제목이 <검사 내전>이다.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영화 <검사 외전>이 연상되긴 하는데, 책의 내용을 정확히 표현한 좋은 제목이다.책을 펼쳤는데 ‘생활형 검사’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잘 나가서 검찰의 속사정을 좀 더 꼼꼼하게 말해줄 수 있는 검사 양반은 아닌 것 같아서 실망했다. 기왕에 든 책인데 좀 더 읽어가기로 했다. 과연 실적이 낮아서 장래가 절대 촉망되지 않은 검사였다. 피의자들이 멀쩡히 술술 불다가 자기 앞에서만 오면 잡아뗀다고 한다. 잽싸게 책날개에 있는 저자의 사진을 봤다. 과연 순박한 농촌 총각과 비슷한 인상착의였다고 생각하는데, 본인 말로는 ‘비루먹게’ 생겼다. 잘하면 나도 그 앞에서는 거짓말을 해가면서 호통을 칠 수 있을 것 같다.


 <검사 내전>을 읽기 직전 책이 한번 붙잡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어서 웬만한 책은 시답잖게 생각할 상황이다. 놀랍다. 단 한 줄도 놓치기 싫다. 조선 시대 때 왕이 과거 시험지를 채점할 때 좋은 구절을 발견하면 붓으로 붉은 점을 찍었다던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온통 붉은 점을 찍고 싶어졌다. 웃겨도 너무 웃기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누가 2년 묵은 진단서를 품고 다니겠는가? 송혜교가 써준 러브레터라도 그리는 못할 거다.

기록은 이제 절정으로 치달아 할머니의 자영업자 대학살 연대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전임 검사의 출석 요구에 대해 ‘자기는 검찰청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싸니 알아서 잡아가라’고 했다는 할머니의 유난스러운 배설 습관을 기재한 수사 보고서들이 몇 장씩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자신을 성적으로 괴롭혀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답변을 남겼다.

나는 지청에서 만난 부장을 잘 따랐다. 그렇게 된 계기는 어느 날 평소처럼 대들고 있던 나에게 부장이 대뜸 목검을 꺼내 들고 자신이 검도 유단자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옥같은 문장을 읽다 보니 이 분은 직업을 잘 못 선택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검사가 아니고 소설가가 되었다면 지금 성석제의 자리는 이 분의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 경천동지할 만큼 재미있는 책을 기록으로 남겨둬야겠다는 시대적 소명의식에 사로잡혀 중요한 구절이 있는 쪽을 잡아가면서 읽어가기로 했다. 곧 생각을 수정했다. 이토록 귀한 저작을 불경스럽게 접어가면서 읽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읽어가면서 서평을 써나가기로 했다. 왕이 한 말을 토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는 사관이 되기로 했다. 저자 김웅 검사는 내가 보기에 서민 교수에 버금가는 반어법을 기반으로 하는 글쓰기의 대가이기도 하다. 자동차 사고를 위장한 보험 사기단을 묘사한 부분을 읽어보자.


그는 자가 치유 능력뿐 아니라 다른 능력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1+1’ 같은 것인데 바로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는 자신의 불운을 예견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정한 수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개의 보험에 가입했다. 월 보험료를 납부할 능력도 없는 김 씨가 이렇게 많은 보험에 가입했다는 것은 그나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는 연속된 불행과 자가 치유 능력, 그리고 예지력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수억 원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 


<검사 내전>이 내내 유머와 반어법으로 독자들을 웃기는 것만은 아니다. 또 수치상의 실적은 부진할지 모르나 무능한 검사가 아니다. 정권의 핵심과 선이 있는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검사다. 그의 수사는 단순하지만 치밀하다. 법정에서는 피해자의 반신불수보다피의자의 치질이 더 중한 병으로 인식된다는 현실을 토로하며 ‘제발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마시라’고 호소한다. 


이 책을 읽어갈수록, 다양한 범죄자들의 범행 수업을 접할수록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를 알겠다.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법조계의 말하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다른 사람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다양한 수법을 알려줌으로써 범죄의 희생양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으로 읽힌다. 여자를 꾀는 전문가를 픽업 아티스트라고 한다던데 이 책에 나오는 주옥같은 범죄 수법의 사례를 읽다 보니 그들에게도 예술가의 칭호를 줘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어떤 사기꾼의 사건 경위는 솔직히 읽다 보니 너무 복잡해서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이후로는 처음으로 ‘인물관계도’를 그려가면서 읽어야 했다. 꼴찌 검사라고는 하지만 사소한 우연이라든가 선배의 조언 그리고 모든 자료를 수작업으로 조사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내가 보기엔 일등 검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중간 중간 개그맨의 애드립처럼 쏟아지는 유머 있는 표현은 ‘범죄 행각’을 다룬 글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검사가 어쩌자고 이토록 글을 물 흐르듯이, 유머 있게 잘 쓰는지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궁금했는데 끝에 그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광이었다. 검사가 되는 왕도는 따로 없고 시험을 잘 치면 된다는 그의 솔직함이 좋다. 


이 책을 읽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 선배로서 충고 한마디 한다. 뭔가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서는 이 책을 들지 마시라. 이 책을 처음 들은 자리에서 끝까지 완독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하고 나서 읽기 시작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이 책을 들면 그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하교하는 딸아이를 데리러 가야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내로부터 호통을 들을 수도 있잖는가. 물론 내가 겪은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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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집 - 종묘, 경복궁, 자금성, 파르테논 신전 새롭게 보기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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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쉰이 넘도록 두 번 이상 읽은 책은 5권을 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내 인생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숨어 사는 외톨박이>와 소설 <나스타샤>도 한 번 만 읽었을 뿐, 그 내용을 머릿속으로만 음미하고 기억할 뿐, 가끔 책장에서 꺼내어 먼지를 닦아주고 어루만져줄 뿐 다시 읽지는 않았다. 


건축 전문기자였던 고(故) 구본준 선생의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은 내게 각별한 책이 되었다. 이역만리에서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헤어지기 싫어서 다 읽고도 책장에 꽂지 않았고 심지어 마지막 쪽을 넘기자마자 첫 쪽을 다시 펴게 된 책이다. 한 권의 책을 완독했다는 정복심을 만끽하고자 읽은 책을 흐뭇하게 책꽂이에 꼽는 개선식을 하지 않았고 책상에 앉으면 편안하게 닿을 수 있는 곁에 모셨다. 


‘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아 있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두운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이태준의 무서록 중에서


 탐나는 벽을 보게 되면 이태준을 떠올리게 되듯이 앞으로는 장중함과 숭고함이 드러나는 기둥을 보게 되면 구본준 기자를 생각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건축 전문기자의 길을 걸으면서 경험하고 습득하고 느끼고 공부한 동서고금의 건축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묶은 책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은 그저 건축이라는 종합예술의 엑스트라라고 여겨왔던 ‘기둥’으로 시작한다. 


기둥이란 그저 주연배우인 상층부가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부속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기둥이야말로 건축물의 주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집트에 있는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산 피에트로 광장, 로열 크레센트 등이 기둥으로 멋을 낸 우아한 건축물로 소개되고 있는데 정작 내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우리나라 국회의사당 건물에 관한 비화였다. 


공모를 통해 당선된 설계는 원래 수평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이었다고 한다. 건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국회의원들이 이 디자인은 ‘폼이 나지 않는다’며 ‘돔’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단다. 원래는 수평성을 강조하여 민주주의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뽑아낸 디자인은 권위의식이 반영된 기둥이 줄지어 선 모양으로 바뀌고 만다. 기둥은 최고의 디자인이기도 하지만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설계가 엉망으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해서 분노한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작품목록에서 국회의사당을 제외했다는 씁쓸한 뒷이야기다. 


건축 전문기자로서 세계 각국의 유명한 건축물을 많이 답사했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은 우리나라 건축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구본준 선생의 종묘와 궁궐을 비롯한 한국의 건축물에 대한 애정은 깊다.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자금성에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그것은 초라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왜 하필이면 그렇게 대단한 건축물에 비교하느냐?’는 식의 억지 설명도 하지 않는다.


 백성을 그저 일하는 노예로 취급한 중국과 달리 우리의 왕조는 백성을 귀하게 여겨서 만리장성과 같은 백성들의 피해가 엄청날 것이 분명한 대규모 공사를 시도하지도 않았다고 차분히 사실을 기초로 설명한다. 또 경복궁이 원래는 현재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는데 일제에 의해서 상당 부분 훼손되어 오늘에 이른 것 뿐이라고 말한다.건물들만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자금성과는 달리 우리의 궁전은 숲과 연못 나무와 함께 어우러지는 자랑스러운 건축양식이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1930년대 말 세계정복을 꿈꾸던 히틀러가 위압적인 건축물 하나로 한 나라를 집어삼킨 이야기도 흥미롭다. 히틀러가 미친 짓 즉 전쟁을 일으킬 것이 거의 확실해지면서 독일의 이웃 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에밀 하샤는 최후의 수단으로 히틀러와 담판을 짓기로 한다. 에밀 하샤 대통령은 히틀러의 관저를 찾았는데 그 규모가 하도 압도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실제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히틀러의 집무실에 발을 디디기 위해서는 길이 137m 천장 높이만 9m인 대리석 홀을 지나서 높이 5m인 문 5개를 통과해야 했는데 집무실은 넓이가 무려 100평이 넘고 방문자가 문을 열고 히틀러의 책상까지 가는 데에만 거의 1분 가까이 걸리는 규모였다고 한다. 


압도적인 분위기에 기가 완전히 죽은 에밀 하샤 대통령은 히틀러의 협박 몇 마디에 나라를 넘겨주겠다는 조약에 서명한 다음 다시한번 기절했다. 에밀 하샤가 느꼈던 공포는 우리나라의 군사 정권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온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히틀러의 집무실과 남영동 대공분실은 방문자와 수인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어쨌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늘 곁에 두고 싶은 이유는 단 한 줄이라도 그냥 지나치거나 대충 읽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본준 선생의 글은 따뜻하고, 자상하며, 사실에 기초한다. 그 어떤 건축 관련 책보다 쉽게 읽힌다. 메시지는 명확하며 문체는 간결하다. 문제는 진중하지만 유쾌하다. 새삼 그의 묘비명이 허투루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다.


 ‘세상이 궁금했던 유쾌한 글쟁이, 여기에 집 짓다’ 


나는 1968년생 그는 1969년생이다. 보통의 경우라는 나는 그가 지은 따뜻하고 유쾌한 글 집에 놀러 가 그의 글을 맛보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유달리 그의 이른 소천이 아쉽고 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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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 서울편 2 - 유주학선 무주학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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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초기 소설과 유홍준의 답사기를 좋아한다.(이문열의 이름만 나와도 발작하는 괴생명체들이 있어서 굳이 말해두는데 나는 그의 ‘초기 소설’만 좋아할 뿐 그의 정치성향이나 구시대적인 남성중심주의 사고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 수천 권의 각종 희귀본과 값비싼 사진집이 가득한 내 서재에서 유일하게 누군가가 훔쳐간 책이 이문열의 소설이다. 

내가 근무한지 2년 된 학교에서 유일하게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책이 유홍준의 답사기다. 2년 동안 내 책상위에는 아마도 수백 권의 책이 오갔을 게다. 2년 동안 책을 읽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분은 유홍준의 신작 출간 소식을 알고 있었고 간절한 눈빛으로 읽고 싶다고 하셨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편 1>을 빌려가셨다. 책 주인도 읽지 않은 책인 것을 알고도 예의상 2권이 아닌 1권을 선택하는 것을 보고 이 책을 무척 좋아하시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러니컬하지만 돈을 받고 글을 쓰면서 ‘억지로’ 읽어야 하는 책이 늘었다. 반면 유홍준의 답사기는 아껴가면서 읽게 된다.


어쩔 수 없이 2권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과연 유홍준이군이라는 감탄을 했다. 한양도성은 전쟁을 대비한 성곽이 아닌 수도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울타리란다. 그러니까 적들이 수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쌓은 높은 벽이 아니고 ‘보기 좋으라고’ 만든 장식물이라는 것.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치고는 너무 낮고 부실한 것 아니냐는 비판은 잘 못되었다는 것이다. 


이 재미난 사실을 음미하다가 문득 화가 치밀었다. 이 장식물을 만드는 공사에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사람이 무려 872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귀향길에 죽은 자도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15세기의 일을 두고 21세기의 시선으로 바라보니까 생기는 비판이다. 적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 단지 수도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공사에 동원되어서 죽어간 백성들의 죽음이 안타깝고 어이가 없다.


차라리 한양도성이 그냥 ‘부실한’ 성곽으로 건설되었다면 그 백성들은 덜 억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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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7-08-19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 한 권을 떼인 이후로 책을 빌려주는 건 직계가족을 빼면 절대불가입니다. 이 담에 호을 짓는 다면 이불선생 정도 (빌리지도 않고 빌려주지도 않는다는 의미의)로 지을까 할 정도로 절대로 빌려주지 않습니다. 경험상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치고 함부로 남의 책을 빌리는 경우는 드물고, 안 읽는 사람들이 꼭 괜히 빌려가서 책장에 꽂아놓고 읽은 다음에 주겠다는 소리만 하더라구요. 이번에 5권부터 싹 주문해서 드디어 다 갖춰보게 될 유흥준 선생의 책이네요.ㅎ 밑줄 그어가면서 읽던 기억이 새록새록..근데 그게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박균호 2017-08-19 14:28   좋아요 1 | URL
저도 20년째 답사기를 사고 있는 중입니다..책은 그냥 주면 주지 빌려주진 못하겠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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