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위대한 작가가 남긴 명작을 읽고 감동과 공감을 느끼면서 위대한 유산을 남긴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글을 썼을까? 그렇지는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우울한 어린 시절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글쓰기로 치유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 <레 미제라블>은 작가 빅토르 위고의 고향인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령 건지섬에서 그의 망명 생활 중에 탄생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라는 절대 권력에 대항하다가 유배되었는데 민중이 존중받고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한 그의 염원을 <레 미제라블>에 담았다.
평생 자신의 동성애를 숨겨야 했던 토마스 만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비밀스러운 성향을 간접적으로나마 표출함으로써 그나마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었다. 단 두 번의 만남으로 베아트리체를 깊이 사랑한 단테는 <신곡>으로 그녀를 천국에서 다시 만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도와주었던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자신을 배신했던 사람을 지옥의 가장 밑바닥까지 보냄으로써 개인적인 슬픔을 치유했다.
괴테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고 그로 인해 아픔을 잊고 새출발을 하였다. 제인 오스틴은 어떤가? 그녀는 여성이 수동적이고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야했던 당대의 숨 막히는 남성 중심적 가치관에서 벗어난 주체적인 여성상을 <오만과 편견>에 담음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소설 속에서나마 펼쳐 보였다. 작가들에게 글쓰기는 아픈 기억을 치유해 준 일종의 치료제였다.
그렇다. 글쓰기는 위대한 작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종의 치유제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경험을 내버려두면 심리적 불안을 거쳐 우울증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치유하지 못한 상처를 글로 표현하면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그 아픔의 깊이를 가늠하고 나아가 그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숨기고 싶은 상처를 글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그 이상의 긍정적 효과가 크기에 수많은 작가들이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표현하고 드러낸다.
우리가 읽는 것은 이런 위대한 작가들의 내밀한 자기 고백이자 극복의 과정이다. 큰 보상을 지불하지 않고도 이들이 남긴 이 거룩한 유산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니, 이것만큼 어마어마한 재산이 또 있을까? 게다가 그 유산을 내것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재미와 감동까지 겹친다. 고전소설은 지루하고 재미없고 어렵다는 편견만 버린다면 누구든 고전소설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 유산을 소유한다. 일종의 특권을 누리는 셈이다.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이 50권의 책을 통해 문학을 이해하고, 좀 더 깊고 넓은 문학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훌쩍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