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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로 쓴 소설들 - 페스트에서 코로나19까지 문학이 그려낸 감염과 치유의 과학
고관수 지음 / 계단 / 2025년 9월
평점 :
내가 비문학 책을 고르고 읽고 소장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한 분야를 평생 파고든 저자가 쓴 책이다. 믿을만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가능한 새로운 관점을 토대로 쓴 책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서 고관수 선생이 쓴 《미생물로 쓴 소설들》은 평생 곁에 두고 읽을만한 책이다. 책상에 앉아 종이와 연필만으로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서 수 없는 귀중한 지적 자산이다. 고관수 선생은 미생물을 전공하고 평생 미생물을 가르치고, 미생물에 관한 책을 써 온 저자이다. 미생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치 기함과도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나는 여간해서 읽지 않는 ‘들어가는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헤르만 헤세의 《로스할데》 이야기가 이어진다.
부끄럽지만 나도 헤르만 헤세를 좋아해서 그의 작품 코너를 따로 모아둔 책장 한쪽이 있는데도 아직 읽지 못한 소설이었다. 무슨 소설인가 싶어 궁금했는데, 가족이라는 현실과 예술이라는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의 정신적 고뇌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 이 방면이라면 《달과 6펜스》도 생각나고, 최근에 읽은 에밀 졸라의 《작품》도 한가락 하는 작품이다.
어쨌든 《로스할데》의 주인공은 화가로서 성공했지만, 아내와는 애정이 식을 대로 식은 상태다. 마치 《달과 6펜스》의 천재적 화가 스트릭랜드처럼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타히티로 떠나듯이, 에밀 졸라의 《작품》에 나오는 열정적인 화가 랑티에가 피리 근교 세느 강변으로 옮겨가듯이, 《로스할데》의 주인공도 인도로 떠나려는 순간 둘째 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지고 만다.
아들의 병명은 뇌수막염. 헤세는 마치 자신이 이 병을 앓은 것처럼, 아니면 곁에서 뇌수막염 환자를 지켜본 것처럼 사실적으로 죽어가는 아들의 병세를 길게 묘사한다. 이 구절을 소개하는 고관수 선생은 감염질환을 일으키는 미생물학자로서 강의에서 종종 뇌수막염을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마침내 뇌수막염에 굴복하여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 묘사한 소설 덕분에 뇌수막염이라는 질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는 고관수 선생의 설명은 둔기에 맞은 것처럼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효능성을 이토록 묵직하게 설파하다니 놀랍다.
《미생물로 쓴 소설들》은 소설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망라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감염병의 실체와 역사적 흐름,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다룬다. 간혹 한두 작가의 지병과 문학작품의 관계를 다룬 책은 있었지만,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수많은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감염병을 광범위하게 논한 책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런 면에서 《미생물로 쓴 소설들》은 좋은 소설을 음미하는 새로운 레시피를 추가한 문학사적 공헌을 한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페스트》, 《제인 에어》, 《크눌프》, 《마의 산》, 《레 미제라블》, 《드라큘라》, 《발가락이 닮았다》, 《천 개의 파랑》 등 유명 작품이나 덜 알려진 숨은 명작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전염병 이야기에 빠지고 또 질병의 사회사까지 물 흐르듯 이어진다.
따지고 보면 문학작품, 특히 고전에 질병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가 즐겨 읽는 고전이 쓰이던 시대는 페스트, 콜레라, 결핵이 반복적으로 발생해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기 마련이니 질병은 단골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또 주인공이 급작스럽게 질병으로 사망하는 설정은 작품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의 질병은 인생의 덧없음과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매력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나 역시 《레 미제라블》을 사회적 약자의 교육 기회 부족, 빈부 격차, 기득권 남용을 고발한 소설로 읽었는데, 고관수 선생 덕분에 빅토르 위고가 가난한 사람들이 위생·영양 상태가 나빠 더 병에 취약했다는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 소설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고관수 선생에게 후속작을 부탁하고 싶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졸라의 《작품》 속 화가의 어린 아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알료사와 친했던 소년 일류샤를 앗아간 질병까지 이어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따지고 보니 내가 읽은 고전 중 질병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고전 작가들은 의학 지식이 부족하여 질병 자체를 미스터리로 여겼다. 질병을 통해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의 섭리와 운명을 탐구했다면, 질병을 살피는 것이 곧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미생물로 쓴 소설들》은 그 중요한 단서를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는, 소설 처럼 재미있는 저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