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내전 - 생활형 검사의 사람 공부, 세상 공부
김웅 지음 / 부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판사나 변호사가 낸 책은 많은데 검사는 책을 잘 내지 않는다. 판사가 쓴 책은 뭔가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내용이 많고, 변호사가 쓴 책은 대체로 사회 전반적인 풍조를 다루거나 전문적인 내용이 많다. 정확한 통계를 낸 것은 아니고 대체로 체감 상 그렇다. 


검찰은 군대식 상명하복의 조직이라고들 한다. 군대도 상명하복의 조직인데 오죽 재미난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검사들의 세계가 궁금했는데 마침 현직 검사가 쓴 책이라고 해서 텁석 물었다. 제목이 <검사 내전>이다.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영화 <검사 외전>이 연상되긴 하는데, 책의 내용을 정확히 표현한 좋은 제목이다.책을 펼쳤는데 ‘생활형 검사’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잘 나가서 검찰의 속사정을 좀 더 꼼꼼하게 말해줄 수 있는 검사 양반은 아닌 것 같아서 실망했다. 기왕에 든 책인데 좀 더 읽어가기로 했다. 과연 실적이 낮아서 장래가 절대 촉망되지 않은 검사였다. 피의자들이 멀쩡히 술술 불다가 자기 앞에서만 오면 잡아뗀다고 한다. 잽싸게 책날개에 있는 저자의 사진을 봤다. 과연 순박한 농촌 총각과 비슷한 인상착의였다고 생각하는데, 본인 말로는 ‘비루먹게’ 생겼다. 잘하면 나도 그 앞에서는 거짓말을 해가면서 호통을 칠 수 있을 것 같다.


 <검사 내전>을 읽기 직전 책이 한번 붙잡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어서 웬만한 책은 시답잖게 생각할 상황이다. 놀랍다. 단 한 줄도 놓치기 싫다. 조선 시대 때 왕이 과거 시험지를 채점할 때 좋은 구절을 발견하면 붓으로 붉은 점을 찍었다던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온통 붉은 점을 찍고 싶어졌다. 웃겨도 너무 웃기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누가 2년 묵은 진단서를 품고 다니겠는가? 송혜교가 써준 러브레터라도 그리는 못할 거다.

기록은 이제 절정으로 치달아 할머니의 자영업자 대학살 연대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전임 검사의 출석 요구에 대해 ‘자기는 검찰청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싸니 알아서 잡아가라’고 했다는 할머니의 유난스러운 배설 습관을 기재한 수사 보고서들이 몇 장씩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자신을 성적으로 괴롭혀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답변을 남겼다.

나는 지청에서 만난 부장을 잘 따랐다. 그렇게 된 계기는 어느 날 평소처럼 대들고 있던 나에게 부장이 대뜸 목검을 꺼내 들고 자신이 검도 유단자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옥같은 문장을 읽다 보니 이 분은 직업을 잘 못 선택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검사가 아니고 소설가가 되었다면 지금 성석제의 자리는 이 분의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 경천동지할 만큼 재미있는 책을 기록으로 남겨둬야겠다는 시대적 소명의식에 사로잡혀 중요한 구절이 있는 쪽을 잡아가면서 읽어가기로 했다. 곧 생각을 수정했다. 이토록 귀한 저작을 불경스럽게 접어가면서 읽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읽어가면서 서평을 써나가기로 했다. 왕이 한 말을 토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는 사관이 되기로 했다. 저자 김웅 검사는 내가 보기에 서민 교수에 버금가는 반어법을 기반으로 하는 글쓰기의 대가이기도 하다. 자동차 사고를 위장한 보험 사기단을 묘사한 부분을 읽어보자.


그는 자가 치유 능력뿐 아니라 다른 능력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1+1’ 같은 것인데 바로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는 자신의 불운을 예견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정한 수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개의 보험에 가입했다. 월 보험료를 납부할 능력도 없는 김 씨가 이렇게 많은 보험에 가입했다는 것은 그나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는 연속된 불행과 자가 치유 능력, 그리고 예지력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수억 원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 


<검사 내전>이 내내 유머와 반어법으로 독자들을 웃기는 것만은 아니다. 또 수치상의 실적은 부진할지 모르나 무능한 검사가 아니다. 정권의 핵심과 선이 있는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검사다. 그의 수사는 단순하지만 치밀하다. 법정에서는 피해자의 반신불수보다피의자의 치질이 더 중한 병으로 인식된다는 현실을 토로하며 ‘제발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마시라’고 호소한다. 


이 책을 읽어갈수록, 다양한 범죄자들의 범행 수업을 접할수록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를 알겠다.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법조계의 말하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다른 사람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다양한 수법을 알려줌으로써 범죄의 희생양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으로 읽힌다. 여자를 꾀는 전문가를 픽업 아티스트라고 한다던데 이 책에 나오는 주옥같은 범죄 수법의 사례를 읽다 보니 그들에게도 예술가의 칭호를 줘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어떤 사기꾼의 사건 경위는 솔직히 읽다 보니 너무 복잡해서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이후로는 처음으로 ‘인물관계도’를 그려가면서 읽어야 했다. 꼴찌 검사라고는 하지만 사소한 우연이라든가 선배의 조언 그리고 모든 자료를 수작업으로 조사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내가 보기엔 일등 검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중간 중간 개그맨의 애드립처럼 쏟아지는 유머 있는 표현은 ‘범죄 행각’을 다룬 글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검사가 어쩌자고 이토록 글을 물 흐르듯이, 유머 있게 잘 쓰는지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궁금했는데 끝에 그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광이었다. 검사가 되는 왕도는 따로 없고 시험을 잘 치면 된다는 그의 솔직함이 좋다. 


이 책을 읽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 선배로서 충고 한마디 한다. 뭔가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서는 이 책을 들지 마시라. 이 책을 처음 들은 자리에서 끝까지 완독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하고 나서 읽기 시작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이 책을 들면 그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하교하는 딸아이를 데리러 가야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내로부터 호통을 들을 수도 있잖는가. 물론 내가 겪은 일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