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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3일 오전 10시 불쾌한 아침이었다. 간밤에 높은 나무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데 아래에는 늑대를 닮은 맹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노리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하루의 몸 상태에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의 중간쯤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번호였다.

 

 

내심 반가웠다. 드문 경우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요양원에 계신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정서인데 뜬금없이 요양원에서 오는 전화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요양원 직원에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문자로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을 만큼 놀라게 되는 전화다.

그날 예외적으로 요양원에서 오는 뜬금없는 전화가 반가웠던 이유는 조만간 요양원 거주자의 방을 옮기게 되면 예전에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던 할머니들과 같은 방에서 지내게 해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요양원 직원은 어머니께서 식사하시고 토하셔서 약을 드렸는데 ...약마저 토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통화하는 도중에 숨은 쉬시는데 의식이 없으셔서 119에 연락했다고 한다. 하도 차분하게 말씀을 하셔서 그다지 큰일이 아닌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연수를 받고 있던 청주의 모 대학에서 어머니에게 달려가려고 계단을 급하게 내려가는 중에 119 응급 대원의 전화를 받고서야 어머니가 매우 위중한 상태라는 것을 실감했다. 심폐소생술 시술 여부에 대한 의사를 물었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구급대원이 말했다. 고마웠다. 

 

 

어머니가 수송된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셨다. 이마에 손을 대니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데 어머니는 눈을 질끈 감고 계셨다. 얼굴은 평온하신데 이 세상이 몸서리가 나게 싫어지셨는지 눈에 힘을 세게 주고 감아야 나올 수 있는 깊이로 감겨 있었다.

어머니 생애가 참 고단하시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자식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셨는가 생각되어서 서운한 생각마저 들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한 딸아이 자랑을 듣고 싶지 않으셨나. 햇볕이 따뜻한 봄날 딸기 그릇을 받쳐 들고 나와 함께 산책하고 싶지 않으셨나.

 

 

아버지 제사상에 올렸던 배추전과 파전을 주섬주섬 챙겨서 어머니를 뵌 것이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를 뵙고 오는 길에 배추전과 파전을 담았던 플라스틱 용기를 빠뜨리고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역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금방 다시 올 텐데 그때 가지고 오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했다. 그때 다시 돌아갔다면 어머니를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을 터라고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보다 더 앞선 가을쯤이었다. 요양원에 찾아간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항상 머리맡에 두고 지키던 소지품 함을 한참이나 뒤적거리시더니 5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신다. 어머니를 찾은 지인이 주고 간 돈을 나를 주시려고 챙겨둔 것이었으리라. 손녀에게 줄 용돈이냐고 여쭈었더니 나에게 주시는 것이란다.

 

 

어쩐지 그 지폐는 아껴두고 싶었다. 지갑에 넣어두고 돈을 현찰을 쓸 일이 생겨도 현금지급기를 찾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 지폐는 간직했다. 그러다가 어찌하다 보니 지갑 안에 5만 원짜리 지폐가 한 장 더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다른 지폐를 지갑 안에 넣어 버렸던 것.

2장의 지폐 중에 어느 것이 어머니께서 주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그 2장의 지폐를 사용해버렸다. 언젠가는 또 어머니께서 이번처럼 또 지폐 한 장을 주시겠거니 생각했다. 그 지폐가 살아생전 어머니께서 내게 준 마지막 돈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다는 상상조차 하기 무서웠고 어머니는 오래 사실 줄 알았고 오래 사시기를 고대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야 알았다. 내가 어머니를 보살핀 것이 아니고 내가 돌아가시는 그때까지 내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오늘 장을 본 아내가 어린아이 주먹만 한 딸기를 사 왔다. 그 딸기를 먹으면서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맛나게 잡수셨겠느냐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온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눈물이 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눈물이 난다. 어머니가 맛보지 못하는 음식을 먹고, 보지 못하는 풍경을 보는 것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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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5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5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03-15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못 뵙는 동안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래도 편히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은 때가 되면 떠나는 존재들이잖아요.
살아있는 사람 좋자고 떠나실 분을 못 떠나가 막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저 그곳에서 편히 계실 거라는 것에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산사람은 또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인생이구요.
힘내시기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균호 2019-03-15 15:10   좋아요 1 | URL
네 편히 가셨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2019-03-15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5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니 2019-11-26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따뜻합니다. 알라딘에 책 구매하러 들어왔다가 님의 글을 보게 되었는데 모르는 분이지만 글이 좋아서 남깁니다. 좋은 글 많이 쓰세요^^

박균호 2019-11-26 20:04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고맙습니다.

2020-08-06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2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종종 실존한다. 선도부 활동으로 고생하는 학생 5명을 데리고 고기를 먹으러 갔다. 일부러 불러냈는데 된장찌개를 먹을 수는 없다. 삼겹살을 주문했다.

한 참 많이 먹을 나이라 마음속으로는 세 판까지는 각오하였다. 고기를 구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길 들었다. 한 아이의 말이 한 친구가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주인에게 ‘인제 그만 좀 먹지’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단다. 

마침 당사자가 일행 중에 있어서 직접 물어봤다. 무려 사실이란다. 그 친구의 말이 이랬다. 전에 한번 간 적이 있는 무한리필 고깃집에 갔는데 마침 사장이 와인을 많이 마신 터라 본인의 정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입장을 시켰다. 

4시간째 고기를 먹는데 이제야 정신을 차린 주인 양반이 어깨를 두드리며 ‘학생, 인제 그만 먹어도 되지 않나?’라며 통첩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녀석은 놀랍게도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길 듣고 나니 손이 떨리고 입맛이 달아났다. 

나라에서 정한 그날의 식사비는 4만 8천 원이다. 애써 진정을 하고 고기 대신 공깃밥과 밑반찬으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된장국도 원샷을 하다시피 했다. 내 입으로 들어올 고기는 없다. 헛기침을 두어 번하고 나서 아쉽게도 5교시 수업이 있어서 나는 먼저 들어갈 테니 너희들끼리 먹고 오라고 했다. 

계산대로 가서 삼겹살 세 판분을 계산했다. 법인카드로 4만 8천 원을 내 개인카드로 4만 6천 원을 결재했다. 5교시 수업이 없으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천천히 꽃비가 내리는 면 소재지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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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5-08 1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한창 아이들에게 고기를 쏘면 정말 큰일이 일어납니다 ㅎㅎ 저도 중2때 무려 고기 두 근을 앉은자리에서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ㅎㅎㅎ

박균호 2018-05-08 10:51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씨름부가 아닌 것만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해야죠.

2018-05-08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8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내는 처제와 여행을 갔다. 톰과 제리처럼 다툼을 주고받는 나와 딸아이만 집에 남았다. 이제 고3이 되는 딸아이는 독서실을 오간다. 밥을 해놓고 운동을 다녀오다가 딸아이 생각이 났다. 마트에 들러서 딸아이가 좋아하는 딸기와 마트 앞에 있는 노점상 할아버지가 파는 군고구마를 샀다. 딸아이는 어느새 제 혼자 밥을 차려 먹고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금방 다시 독서실에 갔다. 딸아이를 위해서 요리를 할 자신이 없어서 딸기를 씻고 군고구마를 챙겼다. 늦은 밤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딸아이를 위해서다.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끓여준 라면이 생각난다. 45원짜리 삼양라면은 누구에게나 별미였다. 언제였나 모르겠다. 코흘리개였을 때가 분명하다. 라면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어머니는 가마솥을 동원하셨다. 부엌 아궁이에 걸린 가마솥에 불을 지펴가며 라면을 끓이셨다. 조리 도구가 여의치 않으셨던 모양이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석유를 사용해야 하는 곤로를 사용하기가 편하지 않으셨던 것이 아니겠나. 

어머니께서 무심한 표정으로 부지깽이를 부지런히 이리저리 놀리시던 장면만 기억으로 새겨졌다. 가마솥에 끓여주신 라면을 먹었던 풍경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면 맛이 어땠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일 슬픈 것은 어머니에게 라면을 권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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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8-03-22 0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벌써 고3이 됐군요. 어린 시절 정말 삼양라면 많이 먹었죠. 그렇게나 맛있었는데....ㅠㅠ 요즘 좋아하는 라면은 부대찌개라면입니다. 글구 어머니, 지금 혼자 사시는데 어제 어머니 댁에 가서 자고 왔어요. 늦게 가서 잠만 자고 아침일찍 나왔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시네요 ㅠㅠ 맘아파요.

마태우스 2018-03-22 0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구 이벤트 당첨축하드립니다. 주소랑 전번 알려주세요. 글구 받고픈 책도요

2018-03-22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5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울 촌놈이 아니고 진짜 촌놈이 부산엘 갔다. 택시를 탔는데 갈려는 곳이 설명하기 어려워서 내비게이션을 찍고 가자고 부탁했다. 연세 지긋해 보이는 기사분은 내비게이션을 잘 다루지 못했다. 우선 정차하면 목적지를 입력하기로 했다. 정차했는데 기사분 내비게이션은 워낙 구닥다리여서 목적지를 입력하는 것이 까다로웠다.

첫 번째 정차에서 목적지 입력에 실패했다. 두 번째 정차에서도 실패했다. 세 번째 정차에서도 실패했다. 운전 기사분은 비록 고물 내비게이션을 가졌지만 ‘끈기’도 가졌다. 포기를 모르신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섰는데 나는 기계치다. 나도 실패했다. 급기야 한 참 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내밷고 말았다. “기사님 좀 좋은 내비게이션을 장만하시지 그러셨어요” 

약속 시각은 다가오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내 휴대전화를 꺼내서 내비게이션을 검색했는데 목적지를 모두 입력하기도 전에 연관 검색어로 ‘여기 갈 거니?’라고 물어본다. 운전석 옆에 내 휴대전화를 두었다. 음성 안내를 듣고 운전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기사분은 정차할 때마다 내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다. 탐독하셨다. 음성안내를 듣고 운전하는 것이 익숙하시지 않으셨다. 

어쨌든 택시는 목적지를 향해서 꾸역꾸역 다가갔다. 기사분이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은 실시간 교통정보를 반영하는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실시간 교통정보를 반영하지 않는 내비게이션을 운용하는 기사분이 당황스러웠다. 본인이 평소 다니는 경로와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내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면서 기사분은 연달아 감탄하셨다. 

차가 꽉 막히는 다른 구간과는 달리 우리가 가는 구간은 뻥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차할 때마다 내 휴대전화를 쓰다듬으면서 성능을 칭송하셨다. 아니다. 찬양하셨다. 잠시 뒤에 목적지라면서 내리란다. 요금을 계산하는데 마침 기사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내 사랑 마나님 하트 하트(원래는 도형이었는데 내가 그림으로 하트 표시를 입력할 줄 몰라 할 수 없이 텍스트로 입력했다)이라는 발신자 정보가 보였다. 내리긴 내렸는데 목적지는 신호등 있는 건널목을 건너야 하는 맞은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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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8-02-11 0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작가님 고생 많으셨네요ㅠㅠ부산 가신 건 부럽습니다만^^;

박균호 2018-02-11 05:29   좋아요 0 | URL
아...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그렇게 고생은 아니었어요. 맞아요 부산은 참 매력적인 곳이에요.

2018-02-11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8-02-11 22:36   좋아요 1 | URL
아..네 반갑습니다. 원래 웃자고 쓴 이야기 입니다. ㅎㅎㅎㅎ
 

나는 올해 중학교 15살 난 여자 아이다. 아빠는 영어교사로 엄마는 국어 교사로 일하신다. 두 분은 모두 어문 계열을 전공한 공통점이 있지만 마치 국어와 수학이라는 반대되는 과목을 공부한 사람들처럼 서로의 특기가 확연히 다른 분야에서 각기 발휘된다. 아빠가 책을 좋아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국어를 전공한 엄마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책을 사서 읽었다는 점과, 엄마는 학창시절 영어공부를 좋아했고 잘하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공집합만 제외하면 부모님은 묘하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겹치지 않는 특기와 세상을 가진다. 


두 분의 다른 세상은 여행을 가보면 확연히 드러나는데 2년 전 싱가포르 여행이 딱 그랬다.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으로 해외를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여행 일정을 두 분의 역량을 모두 발휘해야하고 두 분의 진면목이 드러난 기회였던 셈이다. 

우선 비행기 티케팅과 호텔 예약은 엄마의 세상이다. 아빠는 비행기 표를 예약한 것도 모자라서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외국의 호텔을 예약한 엄마의 업적에 가슴 깊숙이 경의를 표했다. 아마도 당신이 하면 싱가포르에 도착은 했는데 호텔 예약은 다음 날에 예약이 되어 있는 황당한 실수를 할 것 만 같았으리라.


아빠는 인천 공항에서 필사적으로 나와 엄마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고 혹시나 우리가 당신을 떼어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혼자서는 화장실도 가지 않았고, 다른 장소였다면 혼자서 마구 이리저리 다닐 텐데 낯선 공항에서는 우리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가방을 들고 얌전히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심지어 중학생인 나를 본인보다 더 공항의 지리와 시스템에 정통하다고 여기는 게 확실하다. 엄마가 잠시 어딜 다녀왔는데 내 옆에 딱 붙어서 절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나도 여자라서 육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나를 보호한다는 아빠는 사실 나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쉽게 알았다. 


아빠는 엄마와 내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는 신발을 벗고 타야 한다고 주장하면 신발도 벗을 태세였다. 마침내 비행기를 탈 때 그는 입구에 비치된 신문을 여러 부 가져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 확신을 못 한 나머지, 스튜어디스 언니의 눈치를 보는 것도 나는 쉽게 알아챘다. 그에게 난관은 또 남아 있었다. 끔찍한 고소공포증 환자인 아빠는 이륙을 할 때 눈을 꼼 감고 좌석의 팔걸이를 마치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보루나 되는 것처럼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지막한 산을 올라가는 케이블카에서 아빠가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받친 채 고개를 숙이는 것은 시대의 아픔을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고 지면에서 발이 떨어진 상태의 고통을 견디기 위한 몸부림이다. 비행기가 갑자기 난기류에 진입을 해서 흔들릴 때 그의 공포는 극에 달해 엄마의 손을 부둥켜 쥐고 마치 지구의 종말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고난이 시간이 끝나고 스튜어디스 언니가 입국서류를 나눠주었을 때 마침내 아빠의 세상이 도래했다. 아빠는 입국서류를 영어로 메꾸면서 온갖 유세를 부려서 엄마와 나는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었지만 그나마 아빠가 죽을상을 짓다가 모처럼 살 만해 보이는 게 반가워서 참아주기로 했다. 아빠는 정말 모르는 모양이다. 엄마와 나는 아빠 없이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었고 우리도 그런 간단한 그 입국 서류 작성은 이미 작성해봤지만 아빠의 체면과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모른척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빠는 그간의 서러움을 한 번에 만회하려는 듯 기고만장해져서 ‘내가 아니었으면 어디 감히 너희들이’ 해외여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느냐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공항에서 길을 잃을까봐 13살 난 딸내미의 손을 놔주지 않던 기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빠는 꼼꼼하지 않고 나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가령 내가 짜게 먹지 말라고 주의를 몇 번 주었는데 지키지 않아서 마침내 내가 일일이 양념의 양을 그때그때 숟가락으로 얹어줘야 한다. 미리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조사를 하지 않았고 싱가포르에 도착을 했는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고 달랑 우리 식구끼리 움직여야 한다는 무서운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을 하고서야 이곳저곳 들릴 곳을 검색한다. 


검색과 임기응변은 단연코 아빠의 세상이다. 단 몇 분 만에 그는 그날의 여행지와 일정을 엄숙하게 발표를 했다. 아빠는 택시를, 엄마는 나의 현장체험을 위해서 지하철을 주장했는데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나는 당연히 엄마의 편을 들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 집은 그렇다. 지하철의 이용은 엄마의 세상이다. 아빠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지하철 티켓을 사지 못해서 30분간 고군분투를 한 분이다. 보증금 500원을 고려하지 않아서 생긴 불상사인데 아빠는 지하철을 타고 오라는 죄 없는 친구 분을 향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엄마는 능숙하게 싱가포르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했다. 


아빠가 정한 일정은 나쁘지 않았다. 쇼핑과 볼거리를 적당히 배합했는데 그 와중에도 아빠의 보이지 않는 실수가 있었다. 예전에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에 관심이 많았던 아빠는 싱가포르의 관광명소의 목록을 보다가 ‘리틀 인디아’를 발견했고 별생각 없이 ‘한 꼬마 두꼬마 세 꼬마 인디언’의 인디언을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어리고 귀여운 어린 인디언들이 재롱을 자랑하는 목가적인 풍경을 상상하고 우리를 그곳으로 이끈 그는 인디언이 아닌 인디아를 발견하곤 덥디 더운 날씨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차마, 내가 생각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며 우리를 다시 데리고 나가기엔 너무 어이없는 실수라 그는 평생 카레를 한 번도 먹지 않았으면서 억지로 꾹 참고 인도의 거리를 거닐어야 했다. 마치 정말 인도의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온 것처럼 태연히 걸었지만 나는 아빠가 몸을 파르르 떨고, 구경거리에 대한 기대감이 넘치던 얼굴이 순식간에 초점이 풀린 눈과 축 늘어진 팔자주름이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을 보고 이미 아빠의 실수를 눈치 챘다. 


먹거리의 천국이라는 싱가포르에서 서양문학을 전공했다는 아빠가 먹은 것은 주로 ‘된장찌개’ ‘김치찌개’였다. 그나마 용기를 내서 먹어본 색다른 음식이라곤 ‘칠리 크랩’이 유일했다. 반면 그의 세상의 물건에는 심취를 해서, 라이카 카메라 매장 앞에서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우리들을 그의 시선의 범위에서 풀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텔의 57층에 위치한 야외 옥상 수영장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풍경을 감상한다든지, 수영을 즐긴다든지, 선탠(이건 내가 봐도 불필요하다. 그는 모태 선탠이라는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을 즐기지 않았다. 아빠가 세계적인 그 수영장에서 몰두한 것은 남미계열의 연인이 잠깐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신기해하는 ‘카메라 방수 팩’의 놀라운 성능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빠는 괜한 호기심의 눈초리를 보냈다가 졸지에 붙잡혀서 20분간 카메라 방수 팩의 놀라운 성능에 대한 강의의 수강생이 된 그 불쌍한 커플을 본국에 돌아가자마자 주문을 하겠다는 맹세를 받고서야 풀어주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 우리 가족은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지하철역도 보이지 않고 택시역도 보이지 않는다. 싱가포르는 특이하게 택시도 지정된 장소에서만 탈 수 있는데 우리가 정류장을 알 리가 없다. 그때 아빠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우리를 인적이 많지 않은 도로로 데리고 가서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서 손을 든다. 마치 한국에서 택시를 잡는 그 방식 그대로 말이다. 벌금의 나라에서 하는 아빠의 행동에 우리는 기함을 했지만 아빠를 나무랄 기운조차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우리는 택시 기사가 법규를 위반한 우리를 고발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그 택시 기사는 한국의 택시 기사처럼 급하게 우리에게 택시에 타라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아빠의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임기응변능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자국의 교통법규를 위반하면서 손님을 태운 것에 성공한 기사의 성취감과 위기의 가족을 자신의 기지로 구해냈다는 아빠의 자부심은 서로의 만남이 무슨 전생의 인연이라도 이어진 것처럼 감격해하고 서로를 용기와 배려 심을 치하하기 바쁜 눈치다.


가장의 임기응변을 고마워해야 할지, 타박을 해야 할지를 고심할 기운조차 없어서 멍한 표정으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우리를 두고 그들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열심히 뭔가에 대해서 대화를 즐겼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속 에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나누었냐고 아빠에게 물었더니 ‘싱가포르의 비밀경찰 제도와 위협받는 민주주의’, ‘교육을 통한 싱가포르 국민의 시민 의식 함양’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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