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를 여간해서 사지 않는다. 부는 오직 피와 땀으로만 일궈야 한다는 신념 때문은 아니다. 귀찮아서다. 일부러 로또 판매소를 찾아가는 것은커녕 지나가는 길에 로또 판매소가 눈에 띈다고 해도 차를 세우기 귀찮아서 사지 않는다. 좋은 꿈을 꾸면 로또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잊어버리기 일쑤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꿈에서 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정겹고 아름다운 꿈은 아니었다. 나는 17년간 몸의 반쪽을 놀리지 못하는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고, 목욕까지 시켜주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보낸 세월이 얼마인데, 정작 임종은 내 집사람이 지켜보았다. 그렇게 어머니를 보냈는데 꿈에서조차 어머니를 보지 못했던 차였다. 나쁜 꿈이건 좋은 꿈이건 어머니를 뵈었다는 생각에 로또를 사보기로 했다. 지난 금요일에 샀는데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야 로또를 산 것을 기억해내고 별 생각 없이 확인했더니 오만 원에 당첨되었다. 물론 내 생애에 처음 있는 일이다.
판매소에 가서 당첨된 로또를 보여주었더니 ‘축하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오만 원 짜리 지폐를 내준다. 그 지폐를 받아 들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언젠가 요양원에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쓰지 못하는 오른손이 아니고 서툰 왼손으로 소지품을 구석구석 뒤져서 나에게 건네준 어머니의 오만 원 짜리 지폐.
딸아이에게 건네는 용돈이냐고 여쭈었을 때 고개를 가로지며 이 돈은 네가 쓰라시며 건네주신 오만 원 짜리 지폐.
어쩐지 이 돈이 어머니가 내게 주신 마지막 용돈인 것 같아서 지갑에 한참을 넣고 다니다가 그만 다른 오만 원짜리를 지갑에 넣는 바람에 낭패가 되었다. 어떤 지폐가 어머니가 주신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금방 돌아가실 것도 아닌데 또 기회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분간할 수 없는 그 지폐들을 써버렸다.
내 바람과는 다르게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어머니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마도 그 오만 원 짜리 지폐는 그 당시 어머니가 가진 전부였을 것이다. 두고두고 나의 부주의가 원통할 수밖에. 어머니를 뵌 꿈을 꾸고 당첨된 오만 원 짜리 지폐는 어머니가 철없는 아들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준 것이라 믿는다. 어머니께서 찾아주신 지폐를 오래오래 쓰다듬는다.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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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0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ㅠㅠ; 저도 모르게 훌쩍훌쩍ㅠㅠ 어머니께서 아드님 더 이상 안타까워하지 말라고 꿈에도 나오시고 오만원 지폐도 돌려주셨나봐요. 어쩌면 그 때 받고 쓰신 ‘진짜‘ 그 지폐인지도 하고 생각해봅니다@_@;;;

박균호 2020-08-12 21: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그 오만원짜리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만 사는 여자 - 숙취로 시작해 만취로 끝나는 극동아시아 싫존주의자의 술땀눈물
성영주 지음 / 허들링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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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소극적인 성질이라도 술에 취하면 평시에 품었던 잠재의식을 발산시키고, 아니 취했더라도, 술잔 들면 취한 체하고 화풀이도 할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그때나마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볼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그때나마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볼 텐데, '문 열어라' 하고 내 집 대문을 박차보지도 못한다. 가끔 주정한 바탕 하고 나면 주말여행 한 것같이 기분이 전환될텐데 딱한 일이다. -피천득 <술> 중에서


숙취로 시작해 만취로 끝나는 <오늘만 사는 여자>의 저자 성영주는 술을 못 먹어서 슬픈 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겠다. 술에 관해서라면 피천득 선생 못지않게 젬병인 나는 <오늘만 사는 여자>를 읽으면서 내내 부럽기만 하더라. 평생을 남들이 술 마시는 것을 구경만 한 나로서는 낮술을 4차까지 마셨다는 성영주 선생의 무용담이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이 단칼에 적군 여러 명의 목을 베는 장면보다 더 경이로웠다.


 우리 집 여자 식구인 아내와 딸이 텔레비전으로 먹방을 볼 때마다 ‘도대체 남들이 먹는 것을 왜 보느냐’고 타박을 하곤 한다. 그런 내가 드라마를 볼 때마다 가장 유심히 보고 빨려드는 장면이 술 마시는 장면이다. 여러 명이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마시는 장면은 내 취향이 아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과 지안이 말없이 수육을 먹으면서 소주를 들이켜는 장면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 먹방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혼자서 마시는 소주를 마시는 장면은 또 얼마나 부러운지.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부자나 미남보다는 그저 술을 <나의 아저씨>의 동훈이 만큼만 기품있게, 맛깔스럽게 마실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일본 드라마 <세일즈맨 칸타로의 달콤한 비밀>을 좋아한다. 좋은 직장에 다니던 칸타로가 고작 출판사의 영업직으로 이직한 이유는 오직 한가지다. 사무실에서만 일을 해야 하는 전 직장과는 달리 영업직은 외근이 많기 때문에 근무시간 중에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이름난 디저트를 먹으러 다닐 수 있다는 것. 단 음식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칸타로가 환장하는 일본의 이름난 디저트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칸타로가 맛있다고 하니 그런 것인가 정도이지 동훈이가 마시는 소주처럼 나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칸타로에게 주목하고 리스펙트하는 것은 그의 업무능력이다. 칸타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을 즐기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탁월하게 수행한다. 내가 보기엔 그는 땡땡이를 치는 것이 아니고 재충전을 한다.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속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내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인생. 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삶이란 말인가. 


<오늘만 사는 여자>의 성영주 작가에게서 디저트 마니아 칸타로의 모습이 보일 것이라 기대했고 역시나 그에게는 직장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숙취로 시작해서 만취로 끝나는 하루를 보낼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칸타로의 현실 버전이라고 해야 하겠다. 재벌이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취향을 즐기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대충 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성영주 작가는 만취로 하루를 마쳤지만 이른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빼먹지 않고 ‘아무튼’ 정상 출근한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지각을 하고 근무시간 중에 꾸벅꾸벅 조는 ‘일반인 술꾼’과 비교할 수 없는 ‘프로 술꾼’이 되겠다. 뭐든지 일단 시작하면 프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잡지사 기자의 능력도 출중하다. 감히 내가 이렇게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구절이 있더라. 대학생 시절 때 겨우 동아리 소식지를 발간한 경험 말고는 그 바닥에 발을 들인 적이 없긴 하지만 잡지사 생활이 얼마나 치열하고 수명이 짧은지는 안다. 십 수년간 메이저 잡지사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익히 짐작은 되지만 제목으로 선빵을 날리는 기술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


 초라하지만 그나마 책을 몇 권 낸 나로서도 글쓰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제목’ 정하기다.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톡 쏘는 제목을 정하는 것은 정말 신이 내리는 재능이거나 그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보통 사람은 ‘생리통 피하는 법’과 같은 기사 제목을 정하기 마련이다. 성영주 작가는 이 제목을 ‘아이고, 배야!’로 바꾼다. 좋은 글감은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만회해준다. 좋은 제목 또한 그렇다. 


발표할 때도 성영주 작가에게 배울 점이 많다. 가령 나처럼 만년 서생은 생각했던 바를 그려두었다가 청중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쭉 밀고 나가는 뚝심을 발휘한다. 청중의 반응이 시원찮은 것은 나의 고매한 지식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라고 위안을 한다. 모든 강연자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영주 작가는 ‘빠른 태세 전환’을 요구한다. 청중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재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자들의 반응을 살피고 대응한 잡지사에서의 경험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노하우를 체득하게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오늘만 사는 여자’는 세상을 하고 싶은 대로 막사는 사람이 아니다. 성영주 작가는 좋아하는 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과 호사를 포기하는 절제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언제라도 성영주 작가와 술을 마신다면 달려 나올 사람이 많은 이유도 <오늘만 사는 여자>'를 읽다 보니 알게 되었다. 


컨펌하기 보다는 컨펌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상사의 호통보다는 후배의 평가를 더 무서워하며, 아무에게나 술을 무작정 권하기보다는 각자의 주량과 취향을 존중하는 사람인 것이다. 술꾼 성영주는.


사족) 이 책 제목을 <술꾼 성영주의 슬기로운 직장생활>로 해도 괜찮겠다. 그만큼 직장인으로서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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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6-1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나의 아저씨>는 저의 인생 드라마죠.
그 드라마 보고 훌쩍거렸던 기억이...
그렇게 좋은 드라만데도 다시 보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본집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나오지도 않고.ㅉ
정말 말씀마따나 동훈이 술을 맛있게 먹긴 했죠.
근데 혼술할 때 보통 뭘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주로 TV 다시보기 하면서 마십니다.ㅎ

잘 지내시죠? 이번에 <슬기로운 병원생활> 나름 선빵했던 것 같은데
저는 보다 말았습니다. 기존에 병원 드라마를 많이 한지라 별로 기대가 안 가더군요.
정말 차라리 직장생활이었으면 봤을 것 같은데...^^

박균호 2020-06-16 18:37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오랜 만입니다. 저도 참 좋아하고 지금도 종종 돌려봐요. 저는 잘 지내고 담달에 나올 신간 마무리 때문에 원고를 되만지고 있답니다 ^^
 
산매리 저수지
김주앙 지음 / 비티비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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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의 이동준은 인생의 절정기를 맞보고 있었다. 4선 의원이자 집권당 사무총장의 자격으로 자신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자신의 희망이자 분신인 아들은 착실하고 계획적으로 정치인이 되기 위한 코스를 밟고 있다. 정권의 실세가 된 그에게 줄을 대기 위해서 가져다주는 돈뭉치도 거절하는 청렴결백함도 과시한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고 부러운 것도 없는 결정적 순간에 괴상한 문자가 날아온다. 


그것도 단 세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 휴대폰으로 말이다. 16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진상을 알고 있다는 암시를 하는 괴 문자 메시지는 평온하고 화려한 그의 일상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인생의 절정기에서 엉뚱한 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스토리는 흔한 대중 연예 매체의 상투적 수법이다. 


김주앙 작가의 소설 <산매리 저수지>는 이 흔한 포맷으로 비범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368쪽의 적지 않은 분량의 이 소설은 한번 손에 쥐면 내리기 힘들 정도로 독자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떤 점들이 독자들을 끌어당기는지 이 소설에 배치된 여러 가지 설정과 배경을 살펴보자.


<산매리 저수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한국 추리 소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쫓는 자’가 아니고 ‘쫓기는 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추리 소설의 전형은 의문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담는 것이다. 범인이 비록 주변에 있거나, 일찍 소설 속에 등장했더라도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은 후반부에나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기법이다.


<산매리 저수지>는 철저하게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이동 경로와 심리 상태의 변화에 따라 진행된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처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심리 상태와 행동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묘사가 뛰어나다.


<산매리 저수지>는 다른 추리 소설처럼 형사는 추적하고 범인은 도망을 다니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살인자는 자신의 범죄를 암시하는 문자를 받고 그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집요하게 추리하고 추적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범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도대체 누가 범죄 사실을 알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에 감정이입 되어서 마치 자신이 괴 문자 메시지를 받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산매리 저수지>는 독자들의 궁금증과 흥미를 전방위적으로 펼치고 끌어들인다.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은행원이 된 평범한 남자가 어떻게 은행을 그만둔 지 4개월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지, 여당의 실세에게 감히 누가 괴 문자 메시지를 왜 보내는지, 범인이면서 주인공인 이 남자는 왜 살인을 했는지 그 살인과 출세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숨겨 두었는지 등 이 소설을 다양한 갈래로 독자들의 시선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범죄자이기도 하면서 추격자이기도 한 주인공의 이중적인 정체성과 여러 갈래로 분산된 스토리 전개가 복잡하지만, 톱니바퀴처럼 짜임새 있는 전개 덕분에 <산매리 저수지>를 읽으면서 한 단어조차 놓치지 않게 되는 몰입을 하게 된다. 


추리 소설이라고 하면 오로지 피비린내가 진동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설정도 이 소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추리소설로도 삶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저자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소설 속에서 드러난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자의 심리 묘사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탐내는 사람에게 살해당하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돈은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며 절규를 하는 모습, 20살 연상의 남자에 대한 애정이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변모하는지에 대한 묘사만 살펴보더라도 <산매리 저수지>를 추리소설에 묶어 둘 수 없다.


<산매리 저수지>는 저자가 정치학을 전공했고, 정당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한데 그만큼 정치계 주변에서 일어나는 실감 나는 상황이 많다. 존 그리샴의 법정 스릴러에 버금가는 김주앙의 정치 스릴러는 뛰어난 전문성 덕택에 또 다른 몰입 요소를 제공한다. 


정치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기업에 거절당했을 때는 분노와 전투력을 배가시켰지만 가진 것 없는 시골 노인에게 용돈을 건네다가 거절당했을 때는 위축되었다고 기술하는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으로는 나올 수 없는 대목이다. <산매리 저수지>는 단숨에 읽히지만 오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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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兒 피천득 문학 전집 - 전4권 (10주기 한정판)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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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많은 한국인에게 피천득 선생은 <수필>이나 <인연>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선생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선생은 번역으로도 일가를 이룬 분이기 때문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 중에서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 바로 피천득 선생의 번역이었다. 명 번역이었다. 1910년생인 피천득 선생은 소금상인인 할아버지와 신기료 상인인 아버지를 두었는데 그의 집안은 구한말의 거부였다고 한다. 조부와 부친 모두 거상이었던 모양이다.

7살 때 유치원에 입학했고 동시에 서당에서 한문 공부도 함께 했다. 타고난 천재여서 10살이 되기 전에 당시 서당의 한문 교육의 입문서로 사용된 통감절요를 3권까지 익혔다. 서울고보 부속초등학교를 마친 후 무려 2년을 월반하여 1923년에 현재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13세였는데 고리야마라는 일본인 영어 교사에게 영시를 처음 접하게 된다.

당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던 이광수의 집에 거주하였고 그의 추천대로 많은 조선 유학생이 선택한 일본이 아닌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이광수는 영어실력이 뛰어나서 영역된 러시아 문학을 탐독했는데 영어에 대한 중요성이 피천득 선생에게도 어느 정도 전파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천득 선생의 필명 금아(琴兒)는 거문고의 아동이라는 뜻으로 이광수가 지어준 것이다.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는 등의 집안 사정 때문에 고보를 졸업하지 못하고 이광수 선생의 조언대로 상하이에 소재한 귀족학교 토마스 한베리 공립학교(Thomas Hanbury Public School)에 다녔는데 이 학교는 모든 과목을 오로지 영어로만 수업했다고 한다.

미국인 교사에게 혹독하게 영어 교육을 받은 피천득 선생은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추었고 이것이 후일 뛰어난 번역가가 되는 토대가 되었다.1929년 상하이 후장대학에 입학한 선생은 애초에 상업경영학을 선택하였지만 이내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영문학과로 전과한다. 당시 후장대학의 영문학과 학생은 총 4명이었는데 그 중 여학생이 3명이었고 유일한 남학생은 피천득 선생이었다.

학생이 4명이다 보니 수업은 주로 교수의 자택에서 진행되었고 차나 케이크를 간식 삼아 먹으면서 셰익스피어와 토머스 하디,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학생이 4명이다 보니 수업은 밀도 있게 진행되었고 과제는 혹독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1대 1일첨삭식으로 교수의 지도아래 영문으로 작성된 과제를 고치고 또 고쳐야 했다.

피천득 선생은 20세의 나이로 1930년 4월 7일 자 동아일보에 서정시 <차즘>을 발표한 시인으로서 문인이 되었다. 피천득 문학의 기본과 영혼은 시에 있다. 시를 사랑했던 피천득 선생은 영문학자로서 영시의 번역에 몰두했다. 샘터사에서 출간된 피천득 문학 전집 4권 중 2권이 번역 시집인 것만 보아도 그의 문학 인생에 차지한 번역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애당초 시라는 장르는 해당 민족만의 고유한 정서와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번역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지만, 선생은 당신이 좋아했던 시를 좀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외국 시를 번역했다. 외국 시는 원문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럴만한 외국어 실력을 갖춘 독자는 많지 않다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외국 시를 열심히 번역한 선생이 염두에 두었던 자신만의 번역 원칙은 다음 3가지다.

첫째, 원작자가 심어둔 원래의 의미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둘째, 번역 시지만 마치 우리나라 시를 읽는 것처럼 친근한 느낌을 주고
셋째, 누구나 읽기 쉽고 재미있는 번역을 하자.

피천득 선생의 <내가 사랑하는 시>와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은 이와 같은 원칙대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은 영문학자 피천득 선생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이며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저작물이다. 우리나라 시를 읽는 듯 한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직역보다는 의역에 충실했다.

선생은 자신이 정한 원칙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 발휘해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마치 한편의 우리나라 시로 재창작하려고 시도했다. 소천할 때까지 무소유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가족을 사랑했던 영문학자 피천득 선생은 외국 시를 번역할 때는 실험적이고 자유분방한 ‘홀로서기 번역’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많은 독자는 피천득 선생의 번역 시를 읽으면서 마치 우리나라 시를 읽는 듯 한 느낌이 들고 따로 알려주지 않으면 외국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피천득 선생의 번역시집이 우리에게 유독 친근하게 읽히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문학자로서 문학사적 작품성이 뛰어난 것보다는 시를 좋아하는 독자 개인으로서 좋아했던 시를 골라서 번역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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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진보다 - 지금의 어른들, 무엇이 다른가
김경집 지음 / 레드우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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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보수만큼 억울한 단어가 또 있을까? 국가와 국민보다는 당익이 더 중요한 정당이, 엄마와 애국을 대변한다는 구실로 길거리에서 추태라고 볼 수 밖에 없는 혐오적인 시위를 일삼는 무리가 보수를 자칭하고 있으니 말이다. 김경집 선생의 <어른은 진보다>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잘 설명한다. 보수란 집에서 배운 가치와 학교에서 배운 가치를 실천하는 태도를 말한다. 아버지에게 어른들을 공경하라는 예의를 배웠으니 밖에 나가서도 어른에게 예의바른 태도를 취하는게 보수이고, 학교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배웠으니 부정하고 독재를 일삼는 권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 보수다. 

반면 진보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낡은 교과서대로 살라는 거야? 교과서를 바꿔야해. 라고 주장을 한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태도를 지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우리 사회의 상당수의 보수는 가짜 보수이며, 상당수의 진보는 사실 보수에 가깝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보수의 품격은 촛불혁명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부정한 권력에 대해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항거를 하고 그 뜻을 이루어냈으니 말이다. 진짜 어른이라면 혹시 자신이 가짜 보수는 아니었는지 살펴 볼 일이다.

국민 모두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통령을 만들어준 일이 있었다. 유권자가 그에게 표를 준 것은 청렴해서가 아니고 최소한 경제만큼은 잘 하겠지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경제와 안보는 그래도 보수가 잘 한다는 미신을 버려야 한다. 정신 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 연구한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의 통계에 따르면 보수 정당이 집권할 때 자살자와 타살자가 11만 4,600명이 더 많았다고 한다.

보수 정당이 집권했으니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살인을 할까? 보수 정당은 친기업 정책을 많이 펴고 ‘규제 철폐’라는 선물을 재벌에게 안겨준다. ‘규제 철폐’라는 마법의 지팡이로 기업들은 직원들을 더 쉽고 빨리 해고한다. 더 쉽고 빨리 해고를 당하면 더 쉽고 빨리 새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위 통계는 미국의 것이고 다소 일반화의 오류가 될 수는 있겠으나 보수라고 경제를 잘한다는 명제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미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를 지독한 고통과 함께 경험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책을 한권도 읽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단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다. 심지어 꼰대 정치인의 표상이라고 여겨지는 한 보수 정치인은 누가 봐도 진보의 소굴(?)인 방송 프로그램에 기꺼이 출연해서 토론에 참가했다. 보수(물론 정상적인 보수)와 진보는 절대악이나 절대선이 아니다 나름의 명분과 장단점이 있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성향과 반대되는 채널도 둘러 봐야 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안된다며 혀만 차지 말고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보고 그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난관에 부딛쳐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성향의 기호에 맞는 책이나 영상 그리고 기사에만 탐닉한다면 눈앞에 있어서 3살 짜리도 분간할 수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가짜 뉴스를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세력의 노예이자 앵벌이로 전락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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