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사는 여자 - 숙취로 시작해 만취로 끝나는 극동아시아 싫존주의자의 술땀눈물
성영주 지음 / 허들링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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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소극적인 성질이라도 술에 취하면 평시에 품었던 잠재의식을 발산시키고, 아니 취했더라도, 술잔 들면 취한 체하고 화풀이도 할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그때나마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볼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그때나마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볼 텐데, '문 열어라' 하고 내 집 대문을 박차보지도 못한다. 가끔 주정한 바탕 하고 나면 주말여행 한 것같이 기분이 전환될텐데 딱한 일이다. -피천득 <술> 중에서


숙취로 시작해 만취로 끝나는 <오늘만 사는 여자>의 저자 성영주는 술을 못 먹어서 슬픈 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겠다. 술에 관해서라면 피천득 선생 못지않게 젬병인 나는 <오늘만 사는 여자>를 읽으면서 내내 부럽기만 하더라. 평생을 남들이 술 마시는 것을 구경만 한 나로서는 낮술을 4차까지 마셨다는 성영주 선생의 무용담이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이 단칼에 적군 여러 명의 목을 베는 장면보다 더 경이로웠다.


 우리 집 여자 식구인 아내와 딸이 텔레비전으로 먹방을 볼 때마다 ‘도대체 남들이 먹는 것을 왜 보느냐’고 타박을 하곤 한다. 그런 내가 드라마를 볼 때마다 가장 유심히 보고 빨려드는 장면이 술 마시는 장면이다. 여러 명이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마시는 장면은 내 취향이 아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과 지안이 말없이 수육을 먹으면서 소주를 들이켜는 장면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 먹방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혼자서 마시는 소주를 마시는 장면은 또 얼마나 부러운지.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부자나 미남보다는 그저 술을 <나의 아저씨>의 동훈이 만큼만 기품있게, 맛깔스럽게 마실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일본 드라마 <세일즈맨 칸타로의 달콤한 비밀>을 좋아한다. 좋은 직장에 다니던 칸타로가 고작 출판사의 영업직으로 이직한 이유는 오직 한가지다. 사무실에서만 일을 해야 하는 전 직장과는 달리 영업직은 외근이 많기 때문에 근무시간 중에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이름난 디저트를 먹으러 다닐 수 있다는 것. 단 음식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칸타로가 환장하는 일본의 이름난 디저트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칸타로가 맛있다고 하니 그런 것인가 정도이지 동훈이가 마시는 소주처럼 나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칸타로에게 주목하고 리스펙트하는 것은 그의 업무능력이다. 칸타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을 즐기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탁월하게 수행한다. 내가 보기엔 그는 땡땡이를 치는 것이 아니고 재충전을 한다.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속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내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인생. 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삶이란 말인가. 


<오늘만 사는 여자>의 성영주 작가에게서 디저트 마니아 칸타로의 모습이 보일 것이라 기대했고 역시나 그에게는 직장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숙취로 시작해서 만취로 끝나는 하루를 보낼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칸타로의 현실 버전이라고 해야 하겠다. 재벌이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취향을 즐기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대충 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성영주 작가는 만취로 하루를 마쳤지만 이른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빼먹지 않고 ‘아무튼’ 정상 출근한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지각을 하고 근무시간 중에 꾸벅꾸벅 조는 ‘일반인 술꾼’과 비교할 수 없는 ‘프로 술꾼’이 되겠다. 뭐든지 일단 시작하면 프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잡지사 기자의 능력도 출중하다. 감히 내가 이렇게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구절이 있더라. 대학생 시절 때 겨우 동아리 소식지를 발간한 경험 말고는 그 바닥에 발을 들인 적이 없긴 하지만 잡지사 생활이 얼마나 치열하고 수명이 짧은지는 안다. 십 수년간 메이저 잡지사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익히 짐작은 되지만 제목으로 선빵을 날리는 기술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


 초라하지만 그나마 책을 몇 권 낸 나로서도 글쓰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제목’ 정하기다.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톡 쏘는 제목을 정하는 것은 정말 신이 내리는 재능이거나 그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보통 사람은 ‘생리통 피하는 법’과 같은 기사 제목을 정하기 마련이다. 성영주 작가는 이 제목을 ‘아이고, 배야!’로 바꾼다. 좋은 글감은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만회해준다. 좋은 제목 또한 그렇다. 


발표할 때도 성영주 작가에게 배울 점이 많다. 가령 나처럼 만년 서생은 생각했던 바를 그려두었다가 청중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쭉 밀고 나가는 뚝심을 발휘한다. 청중의 반응이 시원찮은 것은 나의 고매한 지식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라고 위안을 한다. 모든 강연자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영주 작가는 ‘빠른 태세 전환’을 요구한다. 청중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재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자들의 반응을 살피고 대응한 잡지사에서의 경험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노하우를 체득하게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오늘만 사는 여자’는 세상을 하고 싶은 대로 막사는 사람이 아니다. 성영주 작가는 좋아하는 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과 호사를 포기하는 절제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언제라도 성영주 작가와 술을 마신다면 달려 나올 사람이 많은 이유도 <오늘만 사는 여자>'를 읽다 보니 알게 되었다. 


컨펌하기 보다는 컨펌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상사의 호통보다는 후배의 평가를 더 무서워하며, 아무에게나 술을 무작정 권하기보다는 각자의 주량과 취향을 존중하는 사람인 것이다. 술꾼 성영주는.


사족) 이 책 제목을 <술꾼 성영주의 슬기로운 직장생활>로 해도 괜찮겠다. 그만큼 직장인으로서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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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6-1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나의 아저씨>는 저의 인생 드라마죠.
그 드라마 보고 훌쩍거렸던 기억이...
그렇게 좋은 드라만데도 다시 보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본집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나오지도 않고.ㅉ
정말 말씀마따나 동훈이 술을 맛있게 먹긴 했죠.
근데 혼술할 때 보통 뭘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주로 TV 다시보기 하면서 마십니다.ㅎ

잘 지내시죠? 이번에 <슬기로운 병원생활> 나름 선빵했던 것 같은데
저는 보다 말았습니다. 기존에 병원 드라마를 많이 한지라 별로 기대가 안 가더군요.
정말 차라리 직장생활이었으면 봤을 것 같은데...^^

박균호 2020-06-16 18:37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오랜 만입니다. 저도 참 좋아하고 지금도 종종 돌려봐요. 저는 잘 지내고 담달에 나올 신간 마무리 때문에 원고를 되만지고 있답니다 ^^